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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주 탑평리 칠층석탑(塔坪里 七層石塔).충북 충주 본문

☆~ 풍경소리/충 북

충주 탑평리 칠층석탑(塔坪里 七層石塔).충북 충주

푸른새벽* 2006. 12. 16. 00:08

 

 

 

 

 

 

 

 

 

 

 

 

 

 

 

탑평리 칠층석탑(塔坪里 七層石塔)


충주시 가금면 탑평리
이곳의 옛이름은 '탑들'
탑이 있는 곳이라는 뜻이다
그 이름대로 강가의 높직한 토단 위에 칠층석탑 한 기가 치솟아 있다


이 탑의 정식명칭은 탑평리 칠층석탑이지만
'중앙탑'이라는 별명으로 부르는 사람이 훨씬 더 많다
통일신라 때 이곳이 나라의 중앙임을 나타내기 위해 탑을 세웠다는 유래담 때문이다
통일신라 때 나라의 남쪽 끝과 북쪽 끝에서 한날 한시에 출발한 두 사람이
이곳에서 딱 마주졌다는 전설도 전해진다
그것이 사실이든 아니든 이 탑은 충주 일대 중원문화의 한 상징으로 자리잡고 있다
이 고장 사람들은 여기가 남북을 통틀어 나라의 한복판이라는 은근한 자부심을 갖기도 한다


탑평리 칠층석탑은
통일신라시대 석탑 가운데 유일한 칠층석탑이며 높이도 14.5m로 가장 높다
10여매의 크고 긴 돌로 지대석을 이룬 위에 두 층의 기단을 쌓고 탑을 올렸다
두 층 기단의 면석과 갑석은 모두 여러 장의 편편한 돌로 짜맞추어졌고 네 모서리와 그 사이 면에도
각각 3개와 2개씩 기둥이 새겨졌다
아래층 기단 갑석의 윗면에 각진 굄과 둥근 굄이 두 단을 이루었고
위층 기단 갑석의 윗면에 각진 굄 두단이 놓여 탑신을 받는 점
그리고 위층 기단의 갑석 아랫면에 부연(附椽)이 표현된 점 등은 통일신라 석탑의 일반적 모습이다
한편,
아래 위 기단 갑석의 윗면이 마치 지붕돌 윗면처럼 물매져 있는 점은 다른데서 보기 드문 모습이다


몸돌도 아래층은 여러개의 석재로 짜맞추어졌고 위쪽으로 올라갈수록 구성하는 돌의 수가 줄고 간략하다
즉 1층은 네 모서리의 기둥과 면석이 모두 다른 돌이며 면석도 두 장을 이어 맞췄다
2층 이상에서는 모서리에 기둥을 새긴 편편한 돌 넉 장을 엇물려 짜거나
앞뒤 양면에만 기둥을 새긴 판석을 세우고 나머지 면은 그냥 편편한 돌로 면석을 삼았다
6층과 7층에서는 몸돌 자체가 한 개의 돌이다


마찬가지로 지붕돌도 1층의 경우는 윗면과 받침이 각각 4개씩,모두 8개의 돌로 짜맞추어졌으나
위로 올라가면서 전체가 2개의 돌로 이루어졌고 6층과 7층에서는 한돌이다
지붕돌 아래의 층급받침은 모두 5단이며 각 층 지붕돌 윗면에 각진 굄을 두 단 만들어
위층 몸돌을 받도록 하였다
지붕돌 윗면은 경사가 밋밋한 편이며 추녀가 수평으로 이어지다가 네 귀퉁이에서 가볍게 들렸다
귀퉁이마다 풍령을 달았던 구멍이 있다


상륜부에는 노반을 이중으로 두었으며 그 위에 복발과 앙화를 올렸다
노반을 이중으로 만든 것은 다른 데서 볼 수 없는 독특한 모습이다
노반석 받침의 네 모서리가 다른 신라시대 석탑들처럼 수직으로 내려오지 않고 가운데가 불러진 형태여서
고려시대에 보수된 것으로 추측되기도 한다


탑평리 칠층석탑은 높이에 비해 너비가 좁아서 뾰족하고 호리호리하게 치솟은 느낌이 강하고
웅대함이나 든든한 안정감보다 상승감이 두드러지는 탑이다
이 탑은 1917년에 무너질 위험이 있어서 전면적인 해체 복원공사를 거쳤다
그때 6층 몸돌에서 기록이 있는 서류조각과 구리거울 두 개,목제칠합과 은제사리함 등이 나오고
기단부에서는 청동제 뚜껑이 달린 합 등이 나왔다
은제사리함 안에는 사리가 담긴 사리병이 있었고 주변에도 사리가 몇 알 흩어져 있었다고 한다
각 유물이 만들어진 시기는 조금씩 차이가 있다
특히 구리거울 두 점은 고려시대 것으로 추정되므로
고려시대에 탑을 열고 사리장치를 봉안했다고 여겨진다
한편
그 때의 해체 복원이 완벽하지 못해서인지 원형과 달라진 부분이 생겼는데
기단 면석의 기둥 간격이 고르지 못한 것을 그 예로 들수 있다

 

탑평리 칠층석탑은 국보 제 6호이다


지금 탑 바로 앞에 석등의 하대석이었을 팔각연화문 석재가 하나 놓여 있다
건물의 흔적이 주로 탑의 북쪽으로 펼쳐진 공간에서 나온 것으로 미루어
탑을 앞세우고 남쪽으로 향한 절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한국문화유산답사회 지음 '답사여행의 길잡이'중에서*

 

중원탑평리칠층석탑(中原塔坪里七層石塔)


국보 제6호 
충북 충주시 가금면 탑평리 11 


남한강의 아름다운 경관과 잘 어우러져 있는 통일신라시대의 석탑으로, 당시에 세워진 석탑 중 가장 규모가 크다. 우리나라의 중앙부

에 위치한다고 해서 중앙탑(中央塔)이라고도 부르는 이 탑은 2단의 기단(基壇) 위에 7층의 탑신(塔身)을 올린 모습이다.


높은 탑신을 받치기 위해 넓게 시작되는 기단은 각 면마다 여러 개의 기둥 모양을 새겨 놓았고, 탑신부의 각 층 몸돌 역시 모서리마다

기둥 모양의 조각을 두었다. 몸돌을 덮고 있는 지붕돌은 네 귀퉁이 끝이 경쾌하게 치켜올려 있어 자칫 무겁게 보일 수 있는 탑에 활기

를 주고 있으며, 밑면에는 5단씩의 받침을 새겨 놓았다. 탑 정상의 머리장식은 보통 하나의 받침돌 위에 머리장식이 얹어지는 신라 석

탑의 전형적인 양식에서 벗어나, 이중으로 포개어진 똑같은 모양의 받침돌이 머리장식을 받쳐주고 있다.


기단에서의 기둥조각 배치, 탑신의 몸돌과 지붕돌의 짜임수법으로 보아 통일신라 후기인 8세기 후반에 세웠을 것으로 추측된다. 전체

적으로 규모가 커서 웅장하기는 하나 너비에 비해 지나치게 높은 듯 하여 안정감은 덜하며, 세부수법이 약화되고 섬약해져 있어 당시

의 경향이 그대로 나타나 있다.


1917년 탑을 보수할 때 6층 몸돌과 기단 밑에서 사리장치와 유물이 발견되었는데, 특히 6층 몸돌에서 발견된 거울이 고려시대의 것으

로 밝혀져 탑 조성 이후 고려시대에 와서 2차 봉안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문화재청자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