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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도자계서원(紫溪書院).경북 청도 본문

☆~ 풍경소리/경 북

청도자계서원(紫溪書院).경북 청도

푸른새벽* 2010. 10. 23. 10:58

 

 

 

 

 

 

 

 

 

 

 

 

 

 

 

 

 

 

 

 

자계서원(紫溪書院)


시도유형문화재 제83호(청도군) 
경북 청도군 이서면 서원리 85


조선 초기의 문신이며 학자인 탁영(濯纓) 김일손(金馹孫.1464~1498)의 고향에는 그의 학문과 덕행을 기리기 위하여 세운 서원이 있다.경상북도 청도군 이서면 서원리 85번지에 위치한 자계서원이다.김일손은 25세 때이던 1488(성종 19)이 마을 운계리(서원리의 본디이름)에 운계정사(雲溪精舍)를 건립하고 수학하였는데,그후 무오사화의 참화를 당하고 신원되자 1518년(중종 13) 그를 제향하기 위하여 이곳에 운계서원(雲溪書院)을 세웠다.그리고 1578년(선조 11)에 청도 유림에서 중건하였으며,1661년(현종 2)에 '紫溪書院'이란 사액을 받음으로써 사액서원으로 승격되었다.


무오사화 때 김일손이 화를 당하자 그의 고향 마을에 있는 운계천(雲溪川)에 핏물 같은 붉은 물이 사흘 동안이나 흘렀다고 전한다.그리하여 운계천을 '紫溪川'이라 부르고,마을 이름을 운계리도 '자계리(紫溪里)'로 바꾸어 부르다가 운계서원이 '자계서원'으로 사액을 받자,서원이 있는 마을이라 하여 '자계리'를 '서원리'로 다시 바꾸어 부르게 되었다는 것이다.


김종직의 문인인 김일손은 1486년(성종 17) 식년문과에 갑과로 급제하여 예문관에 등용된 후 청환직(淸宦職)을 거쳐 이조 정랑이 되었다.그는 춘추관의 사관으로 있으면서 전라도 관찰사 이극돈의 비행을 직필하고,그 뒤 헌납 때 이극돈과 성준이 새로 붕당을 만들어 분쟁을 일으킨다고 상소하여 이극돈의 원한을 샀다.이극돈은 전례(典禮)와 사장(詞章)에 밝은 훈구파의 거물로서 성종 이후 등장한 사람파와 항상 반목이 심하던 인물이었다.


성종 때의 훈구 세력은 세조의 찬위에 공훈을 세워 정치적 실권을 장악한 사람들이었다.이들은 세조의 공신이나 총신 혹은 어용학자들로서 의정부와 6조 등의 고위 관직을 독점하고,경제적으로도 과전 외에 수차에 걸친 공신전을 받아 권려과 부를 한 몸에 지니고 있었다.이에 비하여 사림은 지방에 있는 중소지주 출신의 지식인으로,중앙 정계에 진출하지 않은 재야 지식인을 중심으로 형성된 세력이었다.


조선 건국에 협력하지 않고 영남지방으로 낙향한 고려 말의 성리학자 길재의 학통을 이어받은 이들 사림은 성종 때 김종직의 등용 이후 관계에 등장하여 3사(사간원.사헌부.홍문관)의 언록 직과 사관 직을 맡아 훈구 세력의 비리를 공격하였으므로,이들 양 세력의 갈등은 필연적인 것이었다.훈구 세력과 사림의 갈등은 마침내 사화로 이어졌다.그 첫 번째 사화가 1498년(연산군 4) 김일손 등 신진사류가 유자광 중심의 훈구파에게 화를 입은 무오사화이다.


이들 훈구파와 사림파의 대립은 연산군 이후 표면화되었다.이러한 상황에서 김종직과 유자광은 일찍이 개인감정이 있었고,김종직의 제자 김일손이 춘추관의 사관으로 있으면서 훈구파 이극돈의 비행을 낱낱이 사초에 기록한 일로 말미암아 김일손과 이극돈 사이에도 반목이 심했다.그러던 중인 1498(연산군 4) 《성종실록》을 편찬할 때 실록청의 당상관이 된 이극돈은 김일손의 그의 스승 김종직이 쓴 《조의제문弔義帝文》을 사초에 수록한 것을 발견하였다.김종직은 항우에게 죽은 초나라 희왕(楚懷王),즉 의제(義帝)를 조상하는 글을 지었는데,이것은 세조에게 죽음을 당한 단종을 의제에 비유한 것으로 세조의 찬탈을 은근히 비난하는 글이었다.


김종직 일파를 증오하던 유자광과 이극돈은 이것을 문제 삼아 선비를 싫어하던 연산군에게 고해바쳤다.마침내 피바람이 불었다.국청을 열어 김일손을 심문한 연산군은 이 일은 모두 김종직이 선동한 것이라 하여,이미 죽은 김종직의 무덤을 파헤치고 관을 꺼내어 시체의 목을 베었다.그리고 김일손.권오복.이목.허반 등은 간악한 파당을 이루어 선왕을 무록하였다는 죄를 씌워 사형에 처하였다.또한 강겸.강경서.이수공.정승조.정여창.정희량.표연말.홍한 등은 이 일을 고하지 않았다는 죄로 귀양을 보내고,강백진.강혼.김굉필.박한주.이계맹.이원.이종준.이주.임희재.최부 등은 김종직의 제자로서 이 일을 방조하였다는 죄를 씌워 역시 귀양을 보냈다.뿐만 아니라 수사관으로서 문제의 사초를 보고도 바로 보고하지 않았다는 죄로 김전.어세겸.유순.윤효손.이극돈 등은 파직하였다.이 사건을 '사초(史草)'문제가 계기가 되어 일어났기 때문에 '무오사화(戊午史禍)'라고 한다.


무오사화를 일으킨 김일손 등 신진 사림파의 많은 학자들을 제거한 이극돈은 사화가 있은 후 잠시 파직을 당하였으나 다시 광원군(廣原君)에 봉해지고,죽은 후의 익평(翼平)이란 시호가 내려졌다.그러나 뒤에 관직과 함께 추탈되었으며,무오사화의 원흉으로 일컬어졌다.


와룡산 기슭에 자리 잡은 자계서원은 1871년(고종 8) 흥선대원군의 서원철폐령 때 훼철되어 영귀루(詠歸樓)와 동.서재 건물만이 남아 있었으나,1924년에 김용희가 중건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으며,경내에는 외삼문인 유직문.영귀루,동재와 서재,강당인 보인당,내삼문인 유현문과 사당인 존덕사,전사청,김극일효행비각,고직사 등의 건물이 세워져 있다.그리고 영귀루와 동.서재는 1975년에 경상북도 유형문화재 제83호로 지정되었다.


외삼문인 유직문을 들어서면 정면에 우뚝 서 있는 영귀루가 탐방객을 맞는다.영귀루는 정면 3칸,측면 2칸의 누문으로 2층의 누마루에는 사방으로 난간이 둘러져 있으며,아래층의 3칸에는 판문이 설치되어 있다.또한 영귀루 옆 동쪽에는 1969년에 세운 '탁영선생신도비'가 있으며,신도비 옆에는 김일손이 손수 심었다는 수령 500년의 은행나무 두 그루가 푸르름을 자랑하며 서 있다.그리고 신도비 아래쪽에는 김일손이 무오사화의 참화를 당한지 500주년이 되는 1998년에 세운 '탁영선생순절500주년추비'가 세우져 있고,영귀루 옆 서쪽에는 '자계서원원정비'가 세워져 있다.


영귀루를 지나면 정면으로 '紫溪書院'현판을 단 강당이 있다.강학 공간의 중심 건물인 보인당이다.보인당은 정면 5칸,측면 2칸 규모의 팔작지붕 건물로서 중앙의 3칸은 대청으로 이루어져 있는데,이곳에 '輔仁堂' 편액이 걸려 있다.또한 양 측면의 각 1칸은 온돌방이며,건물 사방에는 툇마루가 설치되어 있다.그리고 강당 앞 좌우에는 마당을 사이에 두고 동재와 서재 건물이 마주 바라보고 있다.동재는 정면 3칸 건물로서 강당 쪽 2칸은 온돌방이고,나머지 1칸은 마루이다.이 마루에 '雲溪精舍'편액이 걸려 있다.서재도 동재와 같이 정면 3칸 건물이나,서재의 마루는 가운데 칸에 배치하고,좌우에 양쪽의 각 1칸은 온돌방으로 되어 있다.


대부분의 서원들이 제향 공간인 사당을 강당 뒤에 배치한 것과는 달리 자계서원은 보인당 왼쪽에 담장을 둘러 독립된 별도의 영역을 만든 곳에 사당을 배치하였다.내삼문인 유현문을 들어서면 정면으로 존덕사가 바라보이고,동쪽 모퉁이에는 전사청이 있다.존덕사는 정면 3칸의 맞배지붕 건물로 전면에 툇간을 두었다.사당 내부에는 탁영 김일손을 주벽으로 하여 1615년(광해군 7)에 추가 배향된 김일손의 조부 모암(慕庵) 김극일(金克一.1382~?)과 조카인 삼족당(三足堂)김대유(金大有.1479~1551)의 위패도 함께 모셔져 있다.자계서원에 배향된 이들에 대한 제사는 매년 2월과 8월 중정(中丁)에 지낸다.


김일손은 중종반정 후에 신원되어 도승지에 추증되고,문민(文愍)이란 시호를 받았으며,이곳 자계서원 외에도 도동서원에 배향되었다.
그의 문집으로는 《탁영문집濯纓文集》이 있다.
*이호일 지음 '조선의 서원'중에서*


 
자계서원<영귀루,동.서재>(紫溪書院<詠歸樓,東.西齋>)


시도유형문화재 제83호(청도군) 
경북 청도군 이서면 서원리 85 


조선 초기의 문신이며 학자인 김일손의 학문과 덕행을 기리기 위하여 중종 13년(1518)에 지은 서원이다. 선조 11년(1578)에 다시 지었으며, 임진왜란으로 불타 없어진 것을 광해군 7년(1615)에 다시 짓고 김극일과 김대유를 더하여 모셨다. 현종 2년(1661)에 ‘자계(紫溪)’라는 사액을 받아 나라의 공인과 경제적 지원을 받게 되었다. 고종 8년(1871)에 흥선대원군의 서원철폐령으로 없어졌다가 1924년에 복원되었다.


‘자계’는 연산군 4년 무오사화(1498)로 김일손이 화를 입자 서원 앞을 흐르는 냇물이 3일 동안 붉게 변한데서 유래하였으며, 서원 이름도 자계서원이라 부르게 되었다.


지금 남아있는 건물로는 사당인 존덕사와 제사준비를 하는 전사청, 강당인 보인당, 신문, 영귀루, 동·서재 등이다. 이 중 영귀루와 동재·서재가 경상북도 유형문화재로 지정되어 있다.


영귀루는 서원에서의 여러 행사를 하고, 학생들이 모여 시를 짓고 풍류를 즐기던 곳이다. 동재와 서재는 학생들이 공부하고 숙식하는 생활공간이다. 영귀루 옆에는 김일손이 심었다고 전하는 은행나무가 있고, 원정비·신도비 등이 비각 안에 있다. 『연려실기술』등 수십 권의 문집이 소장되어 있으며, 유물로는 칠현금이 보관되어 있다.


지금은 교육기능은 없어지고, 매년 2월과 8월에 제사만 지내고 있다. 
*문화재청자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