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그리고 기억 5
끝났다던 장마
장마의 뒤끝이 왜 이리 질퍽거리는지
비를 좋아하기는 해도 이렇게 몇날 며칠 계속되는 눅눅함은 싫다
말간 푸름이 그리워 맑고 산뜻한 날의 기억을 더듬어 본다
경기 가평 축령산
철쭉이 유명한 축령산 산행
만개한 축령산의 화려한 철쭉과 함께 한 산행을 마치고 하산하던 길
휴양림이 있는곳이어서 이렇게 쉴 수 있는 공간이 많았다
저 푸른 초원위에 그림 같은 집이라고 해도 되려나
봄날 산행의 나른하고 피곤한 다리를 쉬기에는 충분한...
저곳에서 뒹굴며 책이라도 읽으면 좋겠다
내가 살고 있는 경기 하남
이렇게 근사한 탑이 있는 줄 미처 몰랐었다
춘궁동절터가 있다는 것은 오다가다 표지판을 보아서 알고 있었지만
누구하나 자세히 알려주는 사람은 없고
절터가 있었냐고 반문하는 사람들이 더 많았다
내가 사는 곳의 유적지나 유물이라도 자세히 살펴야 겠다는 생각으로 찾아갔던 곳
기쁨과 놀라움으로 한 참이나 머물렀었다
함께 살펴보았던 이는 두 탑 중 분명 탑 하나는 다른곳에서 옮겨 온 것 같다고 했다
탑의 모양새나 크기로 봐서 그럴 것 같다고 했다
글쎄...
여느 절터에서와는 달리 절터라는 스산함이 없었던 것은
계절 탓인가,아니면 소복한 분지같은 위치 때문이었을까
하남 춘궁동 동사터에서 만난 탑
별다른 장식없지만 단정하고 우아하다
경기 파주 고령산 보광사
대웅전 뒷벽의 장식
이 그림이 보고 싶어서 일부러 찾아갔던 보광사
연화장 세계가 이같이 고요하고 잔잔한 아름다움일까
빛바랜 나뭇결에 맑음이 더하다
초등학교 다닐 때 큰 언니를 따라 와 본 기억이 있다
그 때 참 이상하다는 느낌을 가졌던
사람들은 다 똑같은 절집을 가면서
가까이 있는 곳을 두고 왜 일부러 먼 곳까지 찾아가며
또 절집에서 만나는 그림들은 왜 그렇게 무서운지...
그리고 사십년이 지나서 찾아간 보광사 였다
경남 합천 황매산 영암사터
고속도로부터 길을 잘 못들어 반나절이 걸려서야 찾을 수 있었던 영암사터
바람이 요란한 늦가을이었다
영암사터 초입의 석축
절집이나 절터에서 이런 훌륭한 석축을 만나는 것은 답사의 또다른 기쁨
보수한 오른쪽 뒷편의 석축
오래된 돌과 새로 끼워 맞춘 돌의 생경한 조화다
마치 아물었지만 덧난 생채기 같다
저 새로 다듬은 돌이 어색하지 않게 본래의 돌과 어우러지려면
또 몇 년의 세월이 더 필요할지...
저 생경한 장면을 보면서 문득
상처는 면역이 되지 않는다는 생각이 들었음은 무슨 까닭?
경기 남양주 운길산 수종사
운길산 꼭대기 쯤 제비집처럼 붙어(?)있는 수종사에는
팔각 층층의 부도도 있고 몇 백년 동안 건강하게 자리를 지키고 있는 은행나무도 있고
넓지 않지만 누구에게나 열려있는 편안한 찻집도 있고
북한강을 이렇게 아득하게 내려다 볼 수 있는 마당도 있다
그리고
"이리와~" 하는 내게 다가와 벌렁 드러누워 반가움을 표시하는
사람을 좋아하는 순둥이 삽사리도 있다~ㅎ
저무는 들길을 따라 터벅터벅 옛 마을로 들어서면
노을진 하늘가에 슬픈 새 한마리 떠 있다
이름하여 솟대라고 어떤이는 이야기했다
나는 솟대를 좋아한다
정성들여 다듬어 선이 곱고 매끈한 솟대보다는
그저 툭툭 나뭇가지 생긴대로 잘라서 거친듯이 만든 그런 솟대가 더 좋다
하늘가 높이 떠 있는 솟대를 보면 왠지 가슴이 아리다
경기 강화 정족산 전등사
대웅보전 추녀를 받치고 있는 裸婦像
전등사 대웅보전 건립시인 광해군 당시
대웅보전 공사를 맡은 도편수는 절 아랫마을에 사는 주모를 사랑하였다
깊은 정을 맺고 목수일로 번 돈마저 몽땅 주모에게 맡겨
공사가 끝나기만 하면 함께 살림을 차릴 꿈에 부풀어 있었는데
마무리 공정을 하던 어느날 주모는 도편수가 맡긴 돈을 가지고 도망가 버렸다
울분을 참지 못한 도편수는
여인상을 깎아 처마 밑에 괴어 무거운 지붕을 받들게 했다고 하는...
전등사에 가면 꼭 봐야 한다는 이 벌거벗은 여인네
도편수는 결코 모질지 못했나보다
세세생생 고통을 맛보게 하려는 증오가 만들어 낸 가혹한 형벌이기보다는
불경 소리를 듣고 개과천선하기를 바라는 도편수의 용서같다는 생각을 하기에.
경기 양주 회암사터
나는 당간지주를 좋아한다
여러곳의 절집에서 여러 모양의 당간지주를 만났었다
다소곳한 당간지주
세련된 당간지주
거칠고 우직한 당간지주
아가볼의 보송한 솜털같은 앙증맞은 당간지주
한쪽 귀 떨어져나가 애처로운 당간지주
그 모두에게서 나는 펄럭이는 깃발을 본다
어서오라고 손짓하듯 펄럭이는 깃발을...
회암사터 당간지주
씩씩하고 날선 남성미 물씬한 한쌍의 당간지주
짝 잃은 외톨이 당간지주
거대한 절터,정리되지 않은 절터를 지키고 있는
한 쌍 반의 당간지주에서
풍요속의 빈곤과 묘한 불협화음을 만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