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안,첫 번째.삼용동탑.삼태리마애불
능수버들.흥타령.호두과자.천안삼거리...
충남 천안에 관해서 내가 알고 있는 모든 것이다
답사라는 이름으로 길 나서기 시작했을 즈음엔
이동거리 천 킬로가 넘어도 거뜬하게 하루에 다녀오곤 했었지만
이젠 오랜 시간 운전이 두렵다
그러다보니 전남이나 경남은 고사하고 충남이나 전북도 쉽게 맘 먹지 못하고 있다
그동안 내가 다닌 답사길을 살펴보니 충남으로의 답사가 미흡했던 것 같아
작정하고 선택한 곳
근사한 당간지주와 탑, 장엄한 마애불과 오래된 나무를 만나러 찾은 고장
천안...
이제 호두과자와 천안삼거리,흥타령만이 아닌
천안의 새로운 기억을 담으려 일찌감치 집을 나섰다
천안에서 가장 먼저 찾았던 곳
삼거리 공원
삼거리공원은 삼거리에서 한참 지난 곳에 위치하고 있었다
삼거리가 어디 천안에만 있을까마는
삼거리라는 명칭에 가장 먼저 떠올리게 되는 고장 천안의 내력이 각별하다
'천안삼거리'는
옛부터 충청·경상·전라도의 삼도를 연결하는 교통의 요충지였다.
서울에서 내려오는 대로가 천안삼거리에 이르면 두 갈래로 갈라진다.
한 길은 병천을 거쳐
청주로 들어가 문경 새재로 넘어 상주로 통해 영동, 김천을 지나 대구감영, 경주, 동래로 통하는 길이요,
한 길은
공주감영을 거쳐 논산, 강경, 전주, 광주, 순천, 여수, 목포, 등지로 통하는 대로이다.
이 길은 지리적인 요인으로 사람들의 왕래가 잦았던 곳이며 여러 가지 전설과 민요를 낳았다.
삼거리에는 유난히 버드나무가 많은데 이에 따른 설화는 다음과 같다.
조선조 중엽 영남지방에 유봉서란 선비가 어린 딸과 홀로 살다가 변방의 군사로 뽑혀가게 되었다.
그는 임지를 향해 가다가 천안 삼거리에 이르자
어린 딸을 더 이상 데리고 갈 수가 없다고 생각하여 주막에 딸을 맡겨 놓기로 했다.
그리곤 버드나무 지팡이를 땅에 꽂은 뒤 딸 능소에게 이르기를
"이 나무가 잎이 피거든 다시 이곳에서 너와 내가 만나게 될 것이다."라고 하였다.
그 후 어린 딸은 이곳에서 곱게 자라 기생이 되었으며 미모가 뛰어난데다가 행실이 얌전하여
그 이름이 인근에 널리 알려졌다.
이때 마침 과거를 보러 가던 선비 박현수와 인연을 맺게 되었다.
박씨는 그 후 장원급제하여 삼남어사를 제수 받고 이곳에서 능소와 백년가약을 맺었다.
박어사는 유봉서가 심어놓은 지팡이가 무성히 자란 것을 보고는 그 곳에 못을 파고 창포룰 심으면서
"천안삼거리 흥능소야 버들은 흥"하며 글을 읊었는데 그 글이 지금의 흥타령이 되었으며,
전쟁에 나갔던 부친도 살아서 돌아와 다시 만나게 되었다고 한다.
이곳에 버드나무가 많은 것은 헤어질 때 부친이 꽂은 지팡이가 자라서 퍼졌기 때문이라고 전하며
이러한 사연으로 이 버드나무를 능소버들 또는 능수버들이라 부르게 되었다 한다. (천안삼거리문화재에서)
아침 이른 때라 그런지 공원은 그저 조용하기만 하다
주차장에서 공원 안으로 조금 걸어들어가니 먼 발치로 보인다
삼용동 석탑
삼용동석탑(三龍洞三層石塔)은
지금은 경작지로 변해버린 안서동의 유려왕사(留麗王寺)터에 있던 것을 이곳으로 옮겨 놓았는데
아래층 기단 면마다 2개씩 안상(眼象)을 옅게 새겨 놓은
고려시대에 세운 것으로 추측되는 아담한 모양지만
탑의 윗부분의 몸돌은 아무래도 새것인 것 같아 조금 아쉽다
여느곳에서 만났던 유물들의 둘레에 쳐둔 철제 울타리가 아니고
비싼 돌로 깎아 만든 울타리도 아닌
회양목이지 싶은 나무로 탑의 울타리를 삼았는데
철제울타리보다 대리석울타리보다 나을 것 없다는 생각이 든다
공원의 조경을 위해서 탑을 나무로 둘러 놓았을까
탑의 주변에 탑의 한 부분처럼 둘러쳐진 철제울타리가 마냥 이쁘지는 않았지만
이럴땐 철제울타리가 오히려 낫다는 생각을 한다
나무로 둘러쳐진 울타리
탑에서 한 발짝만 물러서면 탑의 기단부는 전혀 보이질 않는다
독립.능수...
독립기념관과 능수버들이리라
이 두 단어는 다른 어느 고장에서 만나더라도 의례히 천안을 떠올리게 되겠지
삼용동 석탑이 자리잡은 삼거리 공원의 주차장 맞은 편에는
이렇듯 천안을 대표하는 단어들로 상호를 삼은 점포들이 몇 있다
과히
천안이구나
집 떠나오기 전 메모한 주소대로 영남루를 찾았더니
그 근처를 아무리 돌아다녀도 영남루 비슷한 것도 없었고
덩그러니 커다란 예식홀만 있었다
영남루라면 반드시 누각일터인데
하는수 없어
또 천안시청에 전화를 했더랬다
영남루는
내가 막 찾아보고 온 삼거리공원 안에 있다고한다
원래의 자리에서 공원안으로 옮겨 졌다고 하는데
다시 공원으로 들어갈 볼 맘은 없어 영남루는 포기하고
시청담당자가 안내 해 준대로 광덕사와 삼태리마애불을 찾으러
풍세면으로
천안시 풍세면 삼태리에는 태학산 자연휴양림이 있었다
자연휴양림이라 여기저기 자동차 진입을 금지하는 푯말이 있어
어쩔까하고 한참을 난감해 하고 있을 때
휴양림을 관리하는 듯해 보이는 서너명의 사람들을 만났다
정중하게 인사하고
삼태리마애불을 찾으러 가는데 자동차는 어디에 주차를 해야 좋을 지 물었다
절집까지 자동차로 들어가도 된단다
얼마나 고마운지
그렇지 않으면 시간도 바쁜데 휴양림 입구에서 꼼짝없이 삼십여분이 넘게 걸어야 했을 터인데
자연 휴양림 깊숙히 들어가면 천연동굴을 이용한 굴법당이 있는 태학사가 있고
태학사 입구에는 삼태리마애불로 가는 길을 친절하게 안내하는 표지판이 있다
쪼르를 달려나와 반갑게 꼬리를 흔드는 절집의 견공
똘망똘망 영리하게 생겼다
깎아지른 절벽을 지지대삼아 기대고 있는 태학사 뒷편으로 걸어 올라가니
친절한 표지판이 있다
조금만 올라가면 되겠다
삼태리마애불의 위치를 알려주는 표지판대로 걸어 오르니
꿈결인 듯 시야가 확 트인다
아~
이곳이 휴양림이라 그랬지
잘 관리된 넓은 터에는 운동기구와 약수터와 나무의자들이 있었다
휴양림 넓은 터에서 오른쪽으로 난 샛길을 따라 오르면 그 중간 쯤에 마애불이 있다고 한다
한 번 턱 보고 보물이라는 이름값을 하는 마애불이란 느낌을 받았다
마애불은
태학산으로 오르는 등산로 중간 쯤에 이렇듯 의연하게 세월을 지키고 있었다
천안 삼태리마애불(天原三台里磨崖佛)은
근처에서 고려 때의 기와조각이 많아 고려 때의 절이 있었던 곳이라 추정되지만
마애불이 있었던 그 절의 내력은 알려져 있지 않다
전체적으로 세심하기보다는 조금 무거운 느낌을 주는
고려시대 불상의 전형적이 모습이지만
눈 코 입이 뚜렷하고 뺨도 도톰해 보이며
단순하고 분명한 선 처리가 오히려 시원한 느낌을 준다
오랜세월 비바람에 닳고 닳아 그 형체마저 알 아 볼 수 없는 마애불에서
표정이며 모양새를 어림해보는 맛도 각별하지만
삼태리마애불처럼 시원시원하고 또렷한 불상을 만나는 것은 답사의 큰 즐거움이다
마애불의 오른쪽 측면에서 바라 보니
불룩한 자연암석에 새긴 불상이 오히려 가슴을 쭉 내밀고 아래를 내려다보듯 해서
훨씬 당당하고 씩씩해 보인다
마애불을 지지하고 있는 뒷편의 바위위에 앉아 있던 이쁜 새 한마리
삼태리마애불의 발 앞은 깨끗하다
마애불의 앞을 가리는 그 어떤 인공의 구조물이 없다
여태껏 찾아 본 마애불들,산 속 깊숙히 위치한 마애불의 앞에도 당연한 듯
양초들과 불전함이 있었더랬는데
이곳은 이리 깨끗하니 오히려 이상하다
마애불의 앞이 아무런 구조물 없이 깨끗했던 이유를 찾았다
천안시장님의 이름으로 이렇듯 서슬푸른 안내문을 세워둔 것이다
고맙다고 해야하나
천안시장님의 이름으로 세워 놓은 서슬푸른 경고문 바로 옆에는
고은 시인의 고운 詩가 걸려 있다
바람부는 날
풀 보아라
나무 보아라
가만히 있지 못하는 짐승 보아라...
삼태리마애불이 있는 산등성에서 내려오려면
태학사라는 절집의 마당을 돌아야 한다
암벽을 기댄 절집이 가을 해바라기를 하고 있다
짙어가는 가을 한 조각이
절집 수조에 잠시 머물러있다
계절이 변하고 있다
사람이건 계절이건 변해가는 것을 보는 것은 쓸쓸한 일이다
내게 익숙한 모습이라야 고향같은 푸근함을 느끼게 되는 이 못된 이기심
항시 변하는 것이 계절이거늘
어찌 이리도 변하는 것에 익숙해지지 않는 것인가...
절집 마당에 돌아다니는 떼글떼글 야문 가을볕을 뒤로하고 광덕사로 향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