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성 돌아보기.관수정.내계리오층석탑.필암서원
답사를 위한 수첩을 정리하다보면 한 번도 가보지 못한 고장일지라도 유달리 낯이 익은 고장이 있고 몇 번을 다녀왔어도 항시 처음인 듯한 고장이 있다.가고 또 갔지만 금방 또 그리운 곳이 있고 한 번 다녀왔는데도 그리 기억에 남지 않는 고장도 있는가하면 수첩에 기록만 되었을 뿐 늘상 그리운 곳으로 남아 있는 고장도 있다.
하지만 전남 장성은 가고 또 갔던 고장도 아니고 한 번 다녀온 고장도 아니고 수첩에 기록되어 언젠가는 꼭 다녀와야지 하며 아껴두었던 고장도 아니다. 그런 장성이라는 고장을 찾게 된 이유는 장흥을 돌아보고 집으로가는 길 중 수월하게 찾을 수 있는 고장이었기 때문.
답사길을 매번 고속도로를 이용해야하는 것이 항시 아쉽고 재미없지만 어쩌랴 많은 고장을 돌아보려면 시간을 아껴야 하는데...
장흥의 답사를 마치고 돌아오는 길에 영광이나 고창으로 가서 내가 보고싶은 당간지주를 만나고도 싶었는데 난 서해안고속도로가 싫다
다 같은 길인데 유달리 싫어하는 이유는 서해안고속도로를 달려 집으로 오려면 반드시 평택쪽을 거쳐야 하는데 그 분위기,매번 당하는 그 도로정체가 싫어서 이다.
서해안 쪽으로 답사를 떠나는 길이면 그나마 괜찮다.하지만 답사의 끝머리 피곤이 함께 할 때면 그 길은 피로를 두 배나 더 몰고오게 하니...
전남 장성은 장흥을 돌아보고 집으로 가는 길 중간에
호남고속도로를 이용해서 다가갈 수 있었기에 선택(?)되었던 고장이다
수첩에 메모한 제일 첫 번째 장성의 답사처
관수정
전남 장성군 삼계면 내계리
관수정으로 드는 초입에는 천방마을이라 쓴 둥글고 커다란 표지석이 이 마을의 내력을 말하는 듯 하다
관수정은 마을로 드는 골목 초입 단정하게 정돈된 담장 안에 있었다
정면 3칸의 팔작지붕집인 관수정은
조선 중기 연산군때 퇴직하여 후진교육에 전심했고 중종반정후에는 복직하여 내외의 여러 요직을 거쳤으며
특히 담양부사, 전주부사, 광주·나주목사, 전라도관찰사 등 이 지방에서 외직을 맡았던 송흠이
중종 34년(1539)에 건립한 것이다.
관수정은 그의 호를 따서 이름지었다고 한다
관수정 정면에 걸린 편액
근래에 새롭게 다듬어 쌓은 두벌대의 돌 기단 위에
복발형(覆鉢形)의 주춧돌을 놓고 원형기둥을 세웠다.
관수정(觀水亭)은
맑은 물을 보고 나쁜 마음을 씻는다는 뜻에 의한 것이라는데
지금은 어디에도 맑은 물을 볼 수 없다
예전에는 이곳 근처에 맑은 물이 흐르는 시내가 있었던가보다
관수정이 있는 위치에서 오른쪽으로는 연결된 담장사이로 문을 내었고
그 문 밖에는 제사를 모시는 공간인 듯한 건물들이 아래 위 축대를 사이에 두고 있었는데
그 건물에 대해선 아는 바가 없어 휘 돌아 살펴보고는 나왔다
좀더 여유를 가지고 살펴 볼 것을...
내계리오층석탑
빌어먹은 네비를 탓하기 보다는 내 조급함과 어설픔을 탓해야 할 것이다
관수정이 있는 마을이 내계리인데 왜 거기서 다시 돌아나왔을까
네비를 믿고 뱅뱅 돌다가 다시 관수정으로 돌아오면서 '아~! 맞다 이곳이 내계리였지' 했으니까
내계리탑은 관수정이 있는 골목길 끝 농가 담장을 낀 좁은 길을 돌아돌아 닿은
넓은 공터같은 과수원 안에 있었다
장성 내계리오층탑은
탑신부의 다섯 몸돌에는 기단에서처럼 모서리에 기둥조각을 두었고,
지붕돌은 밑면에 3단의 받침을 둔 조선시대의 탑이다
얼핏보아 고려때 만든 탑 같기도 하다
잘 생긴 탑이다
금방이라도 비 쏟아질 듯한 날씨가 원망스럽다
시리도록 푸른 하늘을 배경삼았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내계리탑이 있는 곳 바로 앞의 농가
입구에서 보았듯 이곳은 천방마을이다
흙담장과 사과꽃과 낡은 양철지붕집이 이루는 조화
어머니의 품같이 넉넉하고 편안한 풍경이다
들판엔 마늘이 한창이다
갑자기 목이 메인다
이맘 때쯤 이런 풋마늘잎을 된장에 찍어 먹는 걸 참 좋아하시던 어머니
집 앞 텃밭에서 애써 가꾼 풋마늘을 뽑아 정성스레 싸 주시면서
시어머니 갖다 드리라했을 때
이딴 것 시장에 가면 얼마든지 살 수 있다며 필요없다고 했던 그 말이 그 행동이
마늘잎사귀 푸릇푸릇 할 때마다 이렇게 가슴이 아플 줄 어찌 알았겠는가
그렁그렁 눈물을 매달고 내계리를 떠났다
낯선 고장이니 네비가 시키는대로 따른다
말썽부려도 때론 곤혹스럽게해도 어쩔 것인가
내계리탑을 보고 그 다음으로 찾은 곳
장성군 황룡면 필암리
필암서원
시키는대로 찾아왔더니 필암서원 입구도 아니고 뒷편도 아닌 어중간한 지점이다
붉은 홍살문과 오래된 나무가 있는 풍경은 이곳이 서원이라는 신성한 공간임을 알게한다
필암서원에서 가장 으뜸인 건물 곽연루를 먼저 만난다
곽연루는 필암서원의 출입문이다
정면 3칸 측면 3칸에 팔작지붕을 얹은 이층건물로 서원의 정문이면서
동시에 서원에서 공부하던 원생들의 휴식처 역할도 하였다고 한다
곽연루의 정면에 붙은 현판의 글씨는 우암 송시열의 것이다
곽연루의 정면은 아래위층에 모두 활짝 열어 젖힐 수 있는 널문이 달렸다
널문의 태극문양이 지금도 선명하다
곽연루는 측면에 바깥쪽으로 두 칸씩 널문이 달리고 2층으로 올라가는 계단이 있다
필암서원 곽연루 천장의 들보과 서까래
빽빽하게 그려진 문양이 대단히 호화스럽다
곽연루 2층에 걸린 여러개의 편액 중 하나
곽연루가 원생들의 휴식처로 사용된 건물이라는데 이의가 없다
이곳에서 때로는 선비들이 모여 시화를 열기도 했을 것이다
곽연루를 지나 곧바로 닿게 되는 건물인 청절당
정면 5칸 측면 3칸의 강당으로 쓰였던 건물이다
청절당 정면에 걸린 편액
이 글씨는 숙종 때 태어나서 영조 때 죽은 학자 윤봉구의 글씨라 한다
청절당의 마루 위에는 송준길이 쓴 청절당이라는 현판이 걸려 있다
청절당은 이곳에 기거하던 원생들이 모여 학문을 토론하던 곳으로
서원 안에서 가장 규모가 크며 진원현珍原縣 에 있던 것을 1672년에 옮겨 왔다고 한다
필암서원 장서각
작지만 참 이쁘고 야무지게 지어진 건물이다
장서각의 현판
장서각에는 인종이 하사한 묵죽과 『하서집』 등 1300여 권의 책
그리고 보물로 지정된 『노비보奴婢譜』 등 69점의 문서를 소장하고 있다
사진은 인종이 하사했다는 묵죽의 사본을 액자에 걸어 둔 것이다
(사진솜씨가 어설퍼서 영~ 이상하게 되어버렸다)
필암서원의 가장 안쪽에 자리한 우동사
우동사에는 북쪽 벽에 김인후의 위패를 모시고 동쪽 벽에는 그의 사위인 양자징의 위패가 모셔져 있다했다
우동사에서는
일년에 두 번 음력 2월과 음력 8월의 중정일中丁日에 많은 유림과 지방 기관장들이 참석한 가운데
제사를 지낸다고 한다
*한국문화유산답사회 지음 '답사여행의 길잡이'중에서*
아쉽게도 우동사는 살펴보지 못했다
굳건하게 잠겨 있었으므로...
그저 우동사 담장 주변으로 빙빙 돌아가며 까치발로 살펴 볼 수 밖에
겨우겨우 우동사 현판만 사진기에 담을 수 있었다
필암서원을 그저 대충 돌아보고 다시 곽연루를 통해서 밖으로 나오니
저기 또 한 건물이 보인다
원진각
필암서원이 소장하고 있던 각종 문서들을 보관하는 일종의 박물관 같은 곳이다
필암서원(筆巖書院)은
호남 지방의 유종(儒宗)으로 추앙받는 하서 김인후(河西 金麟厚,1510∼1560)와
그의 제자이자 사위인 고암 양자징((鼓巖梁子徵,1523~1594)을 배향하고 있다
김인후 선생이 죽은 후 30년이 지난 선조 23년(1590),호남의 유림들은 그의 도학을 기리기 위해
그가 살고 공부하며 제자를 가르쳤던 장성읍 기산리에 사우(祠宇)를 짓고 그이 위패를 모셨다
이것이 1597년 정유재란 때 소실되자
인조 2년(1624)에 김인후 선생이 태어난 황룡면 증산동에 다시 사우를 지었다
현종 3년(1662)에는 유생들의 요청에 따라 '필암'이라는 액호를 하사받고 서원으로 승격되었다
당시 서원의 입지 조건이 수해를 입을 우려가 있었으므로
현종 13년(1672)에 다시 지금의 위치로 옮겨 지어졌고 1786년에 양자징도 함께 모셔졌다
그 후 1868년 대원군의 서원 철폐 때도 다치지 않은 채 오늘에 이른다
필암서원은
조선 시대 서원 공간의 꾸밈새를 연구하는데 귀중한 사적지로 사적 제 242호로 지정되어 있다
*한국문화유산답사회 지음 '답사여행의 길잡이'중에서*
장성에서 그나마 꼭 돌아보고 싶었던 필암서원을 대충이라도 돌아보았다
이제 장성에서 찾아봐야 할 탑 3기 중 두 번째인 수산리탑을 찾으러 장성읍내로 들어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