답사.여행 후기

청주 돌아보기. 용두사지철당간.청주동헌

푸른새벽* 2009. 4. 29. 21:19

답사의 발걸음이 다른 지방보다 충북으로는 꽤 잦았던 것 같다

충주를 비롯하여 괴산.음성.보은.단양.제천까지

그러나 유독 청주엔 발걸음하지 못했던 것이 아쉬워 맘 먹고 청주를 돌아본 것이

2009년 2월 초

그런데

항시 그렇듯 답사를 다녀오면 찾아 본 곳의 사진을 정리하고 그에따른 자료를 찾아서

블로그에 사진과 자료를 게시한 다음 가장 마지막으로 답사기를 쓰는데

어찌된셈인지 청주의 답사기가 없다

난 분명 청주 돌아보기라고 답사기를 쓴 것 같은데 그 참~!

이리저리 찾아보니 답사기를 쓰려고 사진을 정리한 것만 2월 메모장에 정리되어 있었다

이런이런...

 

늦었지만 청주 돌아보기를 쓰려고 하는데 영~ 자신이 없다

두어 달이 지났으니 반득반득한 정취도 날 선 기억력도 없으니 그야말로 낭패로세~~

우찌 이런일이.

하지만 어쩌겠는가 희미해진 기억이라도 더듬어더듬어 쓰는데까지 써 볼 수 밖에.

 

 

분명 무언가 특별한 느낌이 있어 이 건물을 사진기에 담았을 것이다

그리고 답사기사진 정리한 수첩에도 이 사진의 번호를 써 놓은 것을 보면

그런데 토옹~~기억에 없다

왜 이 건물 사진을 찍었는지

청주를 돌아보았던 두 달전의 희미한 기억으로나마  답사기글  쓴다는 것이 매우 어려울 것 같다

 

 




제일 처음의 사진속에 보이는 건물이 자리한 곳은 번잡한 로터리였다

진행신호를 기다리다 고개를 잠시 돌렸더니 눈에 뜨이는 글자가 있어 셔터를 눌렀다

그래 청주는 직지의 고장이니까

 




 

충북 청주시 남문로2가

은행.백화점.약국들이 빼곡히 들어선 번화한 곳

손바닥만한 '광장'이 비워져 있을 뿐이고 사방을 둘러 건물이 들어차 있는 가운데

많이 궁금했고 또 보고싶기도 했던 용두사지 철당간이 있다

고려시대에는 이곳에 용두사라는 큰 절이 있었다는 사실을 증거하듯 
지금 철당간은 홀로 높이 솟아 있다

 




 

용두사터 철당간은 널찍한 기단 위에서 화강암 지주 사이에 세워져 있다
지름이 40cm쯤 되고 높이가 63cm인 철제 원통 스무 개를 맞물려 쌓아 올려서 높이가 12.7m에 이른다
원래는 철통 서른 개가 중첩되어 높이가 60척이었는데
흥선대원군 시절에 경복궁 중건에 쓰느라고 열개를 헐어갔다는 말이 전해온다

 

 




이 당간의 건립연대와 내력을 밝혀주는 명문은
아래에서 세번째 철통 둘레에 393자 가량의 해서로 양각되어 있다
내용은
청주의 호족인 김예종이라는 사람이 유행병에 걸리자 철당을 바쳐 절을 장엄할 것을 맹세하고
사촌형인 희일등과 함께 철통 30단을 주조하여 높이 60척의 철당을 세우게 했다는 것이다
조성연대는 준풍(峻豊) 3년,즉 고려 광종 13년(962) 임술 3월 29일이라 적혀 있다

 




 

동서로 마주선 당간지주는
신라시대 이래의 전형적인 양식으로 아래쪽 폭이 넓고 위로 갈수록 좁아진 모양이다
꼭대기 바깥쪽은 둥글게 공글리면서 약간의 굴곡을 주었고
안쪽에는 당간을 끼우기 위한 빗장 형식이 마련되었다
지주 바깥면은 가장자리에 가느다란 선이 음각되었고 한가운데 굵은 새로선이 두드러져 있으며
앞뒷면에도 장식선이 돌려져 있다

두 지주 사이에 남북으로 길게 간대석이 마련되어 있다

안양의 중초사지 당간지주와 상주 복룡동당간지주와 같이 통일신라 말기에 일반적으로 쓰이던 수법이다

 





청주는 지형이 무심천 위에 뜬 배(舟)의 형상이라 하여 오래전부터 주성(舟城)이라 불려왔다
이것이 용두사 철당간에 대한 신비감과 결합하여 몇 갈래의 전설을 낳았다


고려 초 혜원이라는 스님이 전국의 이름난 절과 경승지를 순례하던 중 청주 고을 율량에서 쉬어가게 되었다
보름달이 떠 있었는데 한밤중에 갑자기 먹장구름이 몰려와 세찬 비가 내리고 천둥번개가 치므로
혜원은 합장하고 부처께 빌었다
얼마 후 비가 멎고 서쪽 하늘에 무지개가 서더니 부처님이 나타나
"곧 용두사에 가서 배가 떠내려가지 않도록 돛대를 세우라" 고 하였다
혜원은 날이 밝자 용두사로 갔는데 용두사 주지도 간밤에 같은 소리를 들었다고 했다
두 스님이 사흘 동안 고심했지만 부처의 말뜻을 알 수가 없었다
나흘째 되는 날 한 초립동이 절 마당에서
"소금배가 들어올 텐데 돛대가 없구나" 하고 중얼거리는 소리를 듣고 달려나가 자초지종을 물으니
"목암산(지금의 우암산)에 올라 사방을 살피면 알 수 있다"고 대답했다
목암산에 올라가 가만히 보니 청주 고을이 천천히 북쪽으로 떠가고 있었다
이것을 본 두 스님은 용두사에 돛대를 상징하는 철당간을 세웠으며
그후로 청주를 주성으로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신라와 고려시대를 통해 수많은 절이 건립되고 당간이 설치되었지만
지금은 대개 돌로 된 지주만 남아 있고 당간은 보기 드물다
지금까지 남은 당간으로는 담양 읍내리의 석당간,나주 동문밖 석당간,계룡산 갑사 철당간,
안성 칠장사 철당간,속리산 법주사 철당간 그리고 용두사터 철당간이 있다
그중에서도 용두사터 철당간은 건립연대를 알리는 명문이 있어 국보 제41호로 지정되었다

(한국문화유산답사회 지음 '답사여행의 길잡이'중에서)

 

 




당간지주가 있는 곳에서 몇 발짝 떨어지지 않은 곳엔

청주읍성 안에 있던 충청도병마절도사영의 출입문인 충청도병마절도사영문(忠淸道兵馬節度使營門)이 있다

충청도병마절도사영문은 당초 충남 해미현에 있다가 조선 효종 2년(1651)에 이곳으로 옮기었다.




 

 

청주망선루(淸州望仙樓)

망선루는 고려시대 청주관청의 하나로 관리들이 머무는 숙소인 객관 동쪽에 있던 취경루에서 유래한 것이다

청주 중앙공원내에 위치하고 있는데

어느고장이던지 공원엔 어르신들이 많다

특히 남자어르신들이.

 




 

망선루 옆 쪽에 세워진 청주척화비(淸州斥和碑)

척화비는 고종(高宗) 8년(1871) 흥선대원군(興宣大院君)이 신미양요(辛未洋擾)를 치른 후 백성들에게 서양에 대한 항전의식(抗戰意識)을 심어주기 위하여 서울 및 전국의 요충지에 세웠던 비다.

비석에 새겨진 내용은

 "양이침범(洋夷侵犯) 비전즉화(非戰則和) 주화매국(主和賣國)"인데

이 척화비는 윗부분이 깨어져

 '洋'자와 '則'자가 없어졌다. 1976년 2월 29일 석교동(石橋洞) 노상 하수구 뚜껑으로 있던 것을 발견한 것이다.

(문화재청자료)

 





 

공원에는 노인들이 참 많았다

서울이나 지방이나 마찬가지다

소일거리 없는 어른들이 갈 곳은 정녕 공원 뿐이던가

씁쓸한 풍경이다

 




 

청주 중앙공원을 나와 청주동헌이 있는 상당구 북문로 1가를 찾았다

청주동헌은 청원군청건물 뒤에 바짝 붙어 있었기에 찾기는 어렵지 않았는데

그 초라하고 옹색한 모습이라니...

 




 

청주동헌임을 말해주는 유일한 현판

기록에 의하면 조선 영조(재위 1724∼1776) 때는 근민헌이라 했으며
고종 5년(1868)에는 이덕수가 다시 지으면서 청녕각이라 하였다고 한다

 

동헌은 조선시대에 지방장관인 감사나 수령이 공무를 집행하던 곳으로 관청의 중심건물이다

 




 

관아의 건물은 호기심을 자극한다

 




 

나랏일과 살림집의 기능이 혼재하기에 나는 동헌이나 관아의 건물을 좋아한다

 

 




문화재청 자료실에서 가져온 청주동헌의 복원되기 전의 모습

옹색한 터에 건물만 으리번쩍하게 지어놓은 답답한 지금의 모습보다 훨씬 정감이 간다

 

 




애초에 복원을 잘못한 것이라고 옆에서 누군가 귀띔을 한다

이렇게 하는 것이 아니라고

애꿎은 세금만 축냈다고...

지금의 청주동헌 건물주변으로는 빽빽하게 주차된 자동차들로 인하여

낱낱이 살펴본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한 형편이다

 




 

청주동헌에 대해서 좀더 자세히 알고파서,또 청원관광지도 하나 얻으려 찾았던 청원군청의 문화홍보과

마침 점심시간이었다

아무리 그래도 한 사람쯤은 자리를 지키고 있겠지 싶어 단단하고 굳세게 생긴 문을 밀어보았다

붉은 문은 노려보기라도 하듯 꿈쩍하지 않는다

 

 




청원군청 문화홍보과의 문은 굳게 잠겨 있었다

한 사람도 남김없이 모두 점심식사를 하러 갔다

관광홍보자료하나 얻으러 왔는데 어떡하나 싶어 그 옆 사무실에 가보았더니

민원실로 가보란다

문화홍보과의 옆 사무실엔 점심시간이었지만 직원 두어명은 자리에 있었고

물론 민원실이야 말 할 것도 없지만...

어찌어찌하여 몇 군데의 방을 거쳐 이층의 어느 부서에서 겨우 청원의 관광지도 한 장을 얻을 수 있었다

이 기회에 묻고 싶다

청원군청 문화홍보과에 근무하시는 담당자들은  모든 문화재에 대한 자료나 홍보나 혹은

문화재에 관련된 모든 일을 그렇게 철저하게 칼 같이 해결하느냐고...

제발 점심시간 칼같이,그렇게 철저히 지키는 것 만큼 문화홍보과 입구에

청원의 관광지도라도 비치해두길 부탁한다

그건 민원실이 아닌 문화홍보과에서 제일 먼저 해야 할 가장 기본적인 업무이니까...

 

 




예전의 모습은 간데 없이 덩그렇게 큰 건물이 옹색한 터에 있는 것이

몸에 너무 꽉끼는 옷을 입은 것처럼 엄청 불편해보였다

불쌍한 생각이 든다

 

청주에 있는,청원군청 건물 바로 뒤에 붙어 있는 청주동헌의 관리는 청주시청이 담당하고 있단다

 

 




자동차가 빽빽하게 그 주변을 막고 있는 청주동헌

불쌍하고 또 불쌍하다

 

답답한 심정으로 그 자리를 떠나왔지만 청주동헌만 생각하면 지금도 몹시 불편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