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마음서랍의 깊이 - 전주 2
남녘의 바람이라 순하긴 해도 겨울바람은 역시 으스스하다
경기전을 돌아보고 맞은편 빤히 보이는 전동성당으로 점퍼주머니에 두 손을 넣은채 건너간다.
고딕식이거나 로마네스크식이거나 비잔틴 양식에 로마네스크 양식을 혼합한 것 이거나 구분없이
성당의 건물은 웅장하고 성스럽다
웅장하다거나 성스럽다는 느낌을 밖에서 보이는 건축물로 표현하기는 우습지만 매번 성당 밖에서는
그렇게 느낀다
성당 문을 여는 순간 무거운 돌 하나가 가슴에 떨어진 듯 묵직하고 먹먹하다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
아버지의 이름이 거룩히 빛나시며 아버지의 나라가 오시며
아버지의 뜻이 하늘에서와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소서!
오늘 저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시고
저희에게 잘못한 이를 저희가 용서하오니 저희 죄를 용서하시고
저희를 유혹에 빠지지 않게 하시고 악에서 구하소서
아멘.
제 손을 성수에 담글 자격이나 있는지 모르겠습니다 주님.
손을 적신 성수 때문이었나
저 높은 천장을 그레고리안 성가가 꽉 채우고 있다는 착각에 잠시 빠져들었다
어느곳의 성당이건 성당은 거의 열려있다
미사를 드리는 시간을 제외하고는 누구도 출입을 말리지 않으며 누구도 사진촬영을 막지 않는다
걷는다
전주향교를 찾아서 걷는다
조용하고 한적한 골목을 무심하게 천천히 걷는다
마주보이는 음식점 건물이 세월을 잊은 듯 하다
여기는 전주
걷는 것이 참 좋다
내가 그동안 자동차로 지나면서 보지 못하고 놓친것이 얼마나 많았을까
길을 걸으면서 이런 한적함,이런 고즈넉함을 느껴본 것이 언제였든가
겨울 한낮의 고요가 바닥에 깔린 돌처럼 가지런하다
아직은 아닌데
아직은 꽃눈이 생길때가 아닌데
속절없이 남의 집 담장에 드리운 앙상한 가지에서 꽃눈을 찾는다
뿌연 가슴이 자꾸 울렁거리는 것이 이젠 더 이상 참아 낼 수 없을 것 같아 두렵다
가까이 빤히 보이는 곳 향교의 입구가 있는데
가슴이 울멍울멍한 것이 물 한방울이라도 닿으면 금방 쏟아져 내리지 싶다
유형문화재로 지정되어 말끔하게 씻은 듯 단장한 대성전보다 뒤편에 있는 명륜당에 더 오래 머물렀다
가만히 보아하니 전주향교는 여느향교에서 흔히 볼 수 있었던 전학후묘가 아니라 전묘후학의 배치네
명륜당이 잘 보이는 곳에 한참을 퍼질러 앉아 있었다
울멍울멍했던 마음속 서랍이 기어이 탈을 낸 것이다
덜그럭거리던 서랍은 향교골목을 들어서는 순간 마법에 걸린 것 처럼 스르르 열려
꽁꽁 동여매어 눌러 두었던 잡동사니들을 쏟아내 머릿속을 가슴속을 어지러트린다
대책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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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정 나무가 원하는 삶일까
이렇게 해서라도 생명을 유지해야 하는 것인가
모질고도 모진것이 생명이다
액체의 표면이 스스로 수축하여 되도록 작은 면적을 취하려는 힘의 성질을 말하는 표면장력
자신의 몸피보다 몇 배나 더 큰 시멘트덩어리에 의지해
겨우겨우 생명을 이어가는 나무등걸이
내 울멍울멍했던 가슴에 물 한방울되어 떨어진다
잘 참고 있었는데...
걷고 또 걸어서 그랬을까
아니면 맘 속에 멍울진 것들이 대책없이 쏟아져버려 정신 아득해서 일까
곳곳의 답사처에서 까칠한 눈매로 살펴 혀를차고 화를 내고 한심하단 생각을 했었던 내 눈, 내 맘이 순해진다
향교의 출입문이 랄 수 있는 만화루누각의 마루가 부연 먼지로 덮여 있어도, 곳곳이 낡고 상해서
발을 내 딛으면 금방이라도 내려 앉을 듯 불안하게 삐걱대도 그저 괜찮았다
꺼릴 것 없이 편안한 마음이 사람의 눈을 순하게 한다지만
지극히 서러운 맘도 사람의 눈을 순하게 할 수 있다는 것을 뻑뻑해진 눈을 만지며 깨닫는다
내 가슴속 우묵한 골목 거기에는
한 때 키 높았던 것들이 이끼로 주저앉은 담장이 있다
흙과 돌과 기왓장으로 이쪽 저쪽 그렇게 모질게 갈라놓은 금 앞에서
홍매실 청송이 그저 미련 하나만으로 들여다 보듯 넘지 못한 채 맥없이 삭아가는 사랑도 하나 쯤 있다
타 넘으려면 주저앉아 담따라 담쟁이가 되던지 바람거친 날 마주 모랫바람이라도 되던지 할 것을
그도 저도 아닌
걸어다니는 것이 되어서는
하얀 숨 하나 뿜고 돌아나와야 하는 담장이 있다
내 이름은 누구의 가슴에 문패로 달려 있을까
내 가슴엔 누구의 이름이 문패로 달려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