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덕수궁(德壽宮 ).서울 중구 본문

☆~ 바람소리/궁궐(宮闕)

덕수궁(德壽宮 ).서울 중구

푸른새벽* 2006. 12. 20. 00:09

 

 

 

 

 

 

 

 

 

 

  

 

 

 

 

 

 

 

 

 

 

 

 

 

 

 

 

 

 

 

 

 

 

 

 

 

 

 

 

 

 

 

 

 

 

 

 

덕수궁德壽宮(경운궁慶運宮)


덕수궁은 서울에 남아 있는 다른 궁궐과 마찬가지로 많은 부분이 사라지고 훼손되어 본래의 모습을 상상하기조차 어렵다
덕수궁의 돌담길 또한 원래는 덕수궁 영역의 일부로 1922년 일제가 덕수궁 서쪽에 있던 선원전(璿源殿)터를 관통하는 도로를 만들면서 생긴 길일뿐 유서 깊은 궁궐의 외곽 길이 아니다.일제는 우리의 지배권을 강탈한 뒤 덕수궁터를 조직적으로 분할 매각했는데 이는 궁궐이 지니고 있는 국권과 자치능력의 상징성을 파괴하기 위한 고도의 책략이었다.그 결과 매각된 터에는 현재의 모습처럼 외국 공사관들이 들어서게 되었다


1910년 당시의 덕수궁 평면도를 보면 덕수궁 영역이 상당히 넓었음을 알 수 있고 특히 최근 미국대사관과 아파트 신축 부지로 문제가 되고 있는 선원전터와 주변 일대의 큰 규모를 살펴 볼 수 있다.선원전터에는 고종의 계비인 엄비의 혼전(魂殿)이 있었으나 일제는 그것을 헐어내고

경성제일여자고등학교를 지었으며, 길 건너 제사 준비소터에는 덕수초등학교를 건립했다.또 지금의 성공회성당이 들어선 정동3번지 일대에 있던 귀족 자제들의 교육시설인 수학원(修學院)을 헐고 경성방송국을 짓기도 했다.이곳이 옛 궁궐이었음을 희미하게나마 전하고 있는 것은 나무들뿐이다.지금 정동 주변에 남아 있는 큰 고목들은 옛 궁궐의 뜰에 있던 나무로 역사의 소용돌이 속에서도 살아남아 옛일을 증언하고 있다


덕수궁의 원래 이름은 경운궁(慶運宮)이다.현재의 정동일대 경운궁 자리에는 원래 세조의 손자인 월산대군(月山大君)의 사저가 있었다.조선초기에는 황화방(皇華坊)에 속한 정릉동으로 불렸는데 이는 태조의 계비 신덕왕후 강씨의 능, 곧 정릉이 처음 이곳에 있었기 때문으로,정릉은 태종 때 지금의 위치인 성북구로 옮겨졌다.그후 이곳의 지명은 일제강점기에 정동으로 바뀌어 지금까지 사용되고 있다


선조 25년(1592) 임진왜란으로 도성 안은 쑥대밭으로 변했다.이듬해 피난갔던 선조 일행이 한양으로 환도했으나 왕이 머무를 궁이 남아 있지 않았다.이렇게 난감한 상황에서 월산대군의 사저를 행궁으로 삼아 머물게 되니 이때부터 이곳은 궁궐의 역할을 수행하게 되었다.흔히 선조가 월산대군의 집을 행궁으로 삼았다 하면 월산대군이 살고 있는 집을 그렇게 한 것으로 이해하기 쉬우나 월산대군은 성종 19년(1488)에 이미 세상을 떠났으며 이때는 월산대군의 증손인 양천도정이 살고 있었다.선조는 비좁은 행궁에서 16년을 살다가 창덕궁으로 환어하지 못하고 선조 41년(1608)에 승하하였다.왕위를 계승한 광해군은 행궁의 서청(西廳.지금의 즉조당)에서 등극하여 머물다가 광해군 3년(1611)에 창덕궁으로 옮겨갔으며 이때부터 이곳 행궁을 경운궁이라 부르게 되었다.이렇게 탄생한 경운궁은 그 뒤 고종이 양위할 때까지 297년 동안 사용되었다


경운궁이 궁궐다운 체모를 갖추게 된 것은 창덕궁으로 환어한 광해군이 그해 12월 다시 경운궁으로 돌아와 머물다가 광해군 7년(1615) 창덕궁으로 돌아가는 시기 동안이다.경운궁은 한때 광해군의 계모인 인목대비(仁穆大妃)가 유폐되어 '서궁'(西宮)이라 속칭되기도 했으며 또 인조반정으로 왕위에 오른 인조가 경운궁 즉조당에서 즉위하기도 하였다.그 뒤 경운궁은 어려운 시절의 상처를 간직한 궁으로 회상되며 즉조당과 석어당,그리고 왕비의 토지를 관리하는 궁방인 명례궁 등 건물 몇 채만 남은 상태로 200여 년 동안 비어 있었다.그동안은 영조가 자기 성찰의 공간으로 즉조당을 찾거나 하는 일이 이따금 있을 따름이었으며 고종 또한 1876(고종 13)에 즉조당을 찾아 예를 갖추었다고 전한다


경운궁이 다시 궁궐로 쓰이게 된 시기는 1895년 을미사변에 이은 고종의 아관파천(1896)이후이다.정치적으로 불안정한 상황이 계속되자 신변에 위협을 느낀 고종은 경복궁에서 러시아 공사관으로 피신하고 왕실가족은 경운궁으로 옮겨 살게 된 것이다.고종은 러시아 공사관에서 경운궁의 전각을 복구,증축하도록 명하고 1년여 만인 1897년 경운궁으로 이어한다


그 뒤로도 경운궁을 다른 궁궐에 비해 손색이 없도록 꾸미는 공사는 계속되어 고종이 국호를 대한(大韓)으로 선포하고 연호를 광무(光武)로 정하여 원구단에서 대한제국의 황제로 즉위한 1897년부터 경운궁에 중화전.함령전.선원전.경효전.홍덕전. 준명당.덕경당사성당.경운당.함유재.청목재.보문각.문화각.수옥헌.정관헌.구성헌.인화문.돈례문.희극문.영성문 등 여러 전각이 들어서게 되었다


광무 11년(1907) 8월에 고종은 일본의 압력에 의해 순종에게 양위하고 태황제로 물러앉았다.순종은 경운궁의 돈덕전에서 즉위식을 거행하였다.이때 태황제 고종의 궁호(宮號)를 덕을 누리며 오래 살라는 의미로 '덕수'(德壽)라 정하였으며 그해 11월 고종을 남겨두고 순종만이 창덕궁으로 거처를 옮기면서 경운궁은 이때부터 고종의 궁호를 따서 덕수궁으로 불리게 되었다


덕수궁은 사실상 1907년 이후 국가의 실권을 잃으면서 궁궐로서의 권위와 신성성을 상실했다고 볼 수 있다.여기에 더하여 1919년 1월  함녕전에 머물던 고종이 승하함으로써 덕수궁은 주인 없는 빈 궁궐로 쓸쓸하게 자리를 지키다가

1933년에 공원이 되어 일반인에게 완전히 공개되었다.그 뒤 계속되는 일제강점기와 해방 뒤의 혼란,한국전쟁을 겪으며
덕수궁의 궁역과 건물들은 훼손과 퇴락을 거듭하며 오늘에 이르고 있다
*한국문화유산답사회 지음 '답사여행의 길잡이'중에서*

 

덕수궁(德壽宮)


사적 제124호
서울 중구 정동 5-1 


조선시대의 궁궐로서 경운궁으로 불리다가, 고종황제가 1907년 왕위를 순종황제에게 물려준 뒤에 이곳에서 계속 머물게 되면서 고종황제의 장수를 빈다는 뜻의 덕수궁으로 고쳐 부르게 되었다.


덕수궁 자리에는 조선 9대 임금인 성종의 형 월산대군의 집이 있었다. 임진왜란이 끝나고 한양으로 돌아온 선조는 궁궐이 모두 불에 타고 없어서 임시로 월산대군의 집을 거처로 정하고 선조 26년(1593)부터 궁으로 사용하기 시작하였다. 그리고 근처의 계림군과 심의겸의 집 또한 궁으로 포함하였다. 선조의 뒤를 이은 광해군은 즉위 3년(1611)에 이곳을 경운궁으로 고쳐 부르고 1615년 창경궁으로 옮길 때까지 왕궁으로 사용하였다. 그후 선조의 왕비인 인목대비가 경운궁으로 쫓겨나와 있게 되었는데 그 후로 광해군은 이 곳을 서궁으로 낮추어 부르게 하였다.


광해군이 인조반정으로 1623년에 물러나면서 인조는 즉조당과 석어당만을 남기고 나머지 건물들을 옛 주인에게 돌려주거나 없애버렸다. 그 뒤로 고종황제가 러시아공관에서 옮겨오면서 다시 왕궁으로 사용되었는데, 그 때부터 이 궁은 비로소 궁궐다운 건물들을 갖추게 되었다.


1904년의 큰 불로 대부분의 건물들이 불에 타 없어지자 서양식 건물인 석조전들이 지어지면서, 원래 궁궐 공간의 조화를 잃어버리게 되었다. 그 중 가장 큰 변화는 정문이 바뀐 것이다. 덕수궁의 정문은 남쪽에 있던 인화문이었는데, 다시 지으면서 동쪽에 있던 대안문을 수리하고 이름도 대한문으로 고쳐 정문으로 삼았다.


비록 조선 후기에 궁궐로 갖추어진 곳이지만, 구한말의 역사적 현장이었으며 전통목조건축과 서양식의 건축이 함께 남아있는 곳으로 조선왕조의 궁궐 가운데 특이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문화재청자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