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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처럼 떠나다
고창 돌아보기. 무장객사 본문
지금으로부터 10여 년전 쯤 답사라는 말의 뜻을 알고 그에 대해 관심을 가졌던 것이 절집의 꽃살문이었다
꽃살문 아름다운 절집을 찾아다니면서 목어에 관심을 가졌고 얼마쯤 지나면서부터 탑이나 부도,절집의 현판에 홀려 다녔었다
그리고 절터를 알았다
그렇다보니 자연스레 답사라면 으례히 불교유적을 찾아다니게 되었고
내 답사목록을 적어놓은 수첩에도 탑이나 부도 절터가 우선순위에 든다
그것은 지금도 변함이 없지만 작년 충북 괴산의 청안면을 돌아보면서 옛날 그 고장의 행정업무를 집행하던
동헌이나 관아,객사에 매력을 느끼게 되었다
우리 옛 건축의 모양새를 살펴보려면 그 고장에 있는 아무개이름의 무슨가옥이나 향교의 건물이 좋은데
향교나 서원 그리고 무슨가옥은 항시 잠겨 있어 나 같은 사람은 감히 살펴 볼 처지가 못되고
객사나 동헌 관아는 항시 열려 있으니 답사의 발걸음은 당연히 그곳으로 향하게 된다
그래서 지금은 가능하면 답사여행에서 그 고장의 동헌이나 객사건물은 돌아보는 편이다
특히 동헌건물에 매력을 느끼고 있다
고창에는 그래서 더욱 돌아 볼 곳이 많았다
고창동헌.관아.객사 그리고 고창읍성을 비롯하여 무장현관아와 읍성.객사 동헌등
이번의 고창답사는 아쉽지만 이 모든곳을 다 볼아볼 수는 없어 무장객사만 돌아보게 되었다
전북 고창군 무장면 성내리
주차장에서는 무장객사의 정문격인 진무루의 지붕이 살짝 보인다
지금은 무장객사의 정문격인 진무루 팔작지붕이 당당하면서도 날아갈 듯 경쾌하다
진무루는 예전 무장읍성의 남문이다
진무루현판
진무루현판의 글씨는 조선조의 명필 이삼만의 것이라 한다
진무루의 천장과 기둥
산 좋고 물 맑은 곳에 세워진 정자나 누각과는 달리 대들보를 장식한 용의 그림이
이곳이 읍성을 지키는 문이였음을 실감케 한다
진무루에는 이곳을 다녀간 많은 시인묵객들이 남긴 글들이 걸려 있다
진무루에 걸린 편액들 중 맘 먹고 사진기에 담아 온 편액
다른 것은 몰라도 김종직이라는 이름과 인물에 대해서 조금이나마 알고 있으니
이곳에서 김종직이라는 이름을 보니 반갑다
김종직
나는 그를 조의제문을 지은 조선조의 성리학자로 기억한다
내가 나와는 아무런 상관도 없는 조의제문을 기억하는 것은
바로 대단한 우리의 주입식교육의 결과일 것이다
조의제문弔義帝文은
김종직이 1457년(세조 3) 10월 밀양에서 경산(京山 : 星州)으로 가다가 답계역(踏溪驛)에서 숙박했는데,
그날 밤 꿈에 신인(神人)이 칠장복(七章服)을 입고 나타나 전한 말을 듣고 슬퍼하며 지은 글이다.
서초패왕 항우(項羽)를 세조에, 의제(義帝)를 노산군(魯山君)에 비유해 세조찬위를 비난한 내용인데
이후 김종직의 제자 가운데 김일손(金馹孫)이 사관(史官)으로 있으면서
이를 사초(史草)에 기록하여 스승을 칭찬했다.
1498년(연산군 4) 이극돈(李克墩)·유자광(柳子光)·노사신(盧思愼) 등은
왕에게 조의제문이 세조를 비방하는 내용이라고 알려,
김일손 등 많은 사림들이 죽고 김종직은 부관참시되는 무오사화(戊午士禍)가 일어나게 된 동기가 된 글
그것이 조의제문이다
잡다한 것에 대해 이상하리만치 비상한 내 대책없는 기억력 때문에 혼자 실없이 웃었다
그러나 한가지 안타까운 것은 정작 김종직이 이곳 무장객사에 머물면서 썼다는
무장객사 진무루에 걸린 편액의 뜻은 모른다는 것
진무루에 올라보면 이렇게 무장면 성내리의 골목길이 훤히 보인다
예전 읍성을 지키던 병사들이 이 누각에서 읍성의 남문을 들고나는 사람들을 살폈으리라
진무루의 막돌 석축과 석축의 높이에 따라 길거나 짧게 세운기둥
눈에 보이는 여것개 기둥의 길이가 모두 다르다
진무루를 다시 고쳐 세웠다는 것을 눈치챌 수 있는 숫자
누각의 석축을 다시 해체 복원할 때 석축을 이루는 돌 하나하나마다 차례대로 번호를 붙여 놓았던가본데
그 번호들을 미처 지우지 못했나보다
지우지 않았는지 미처 손길이 닿지 않았는지 모를 숫자를 보며
행여 파손이라도 될까 조심스레 하나하나 돌을 들어내어 잘 갈무리했다가
다시 하나하나 번호맞춰 세심하게 석축을 쌓았을 그 손길을 그 정성을 생각했다
무장객사건물
객사 건물의 주관(主館)
주관은 궐패(闕牌)를 모셔두고 매달 초하루와 보름에 현의 수령과 대소관헌이 모여
대궐을 향하여 배례하던 곳이다
객사주관에 걸린 편액
송사지관이라함은 예전의 두 고을 무송(지금의 고창)의‘송'과 장사의'사'를 따 붙인 이름이다
무송은 지금 고창의 고려시대 이름이며
장사는
지금의 고창군 무장면·성송면·대산면·공음면·상하면·해리면·심원면 일대의 통일신라시대 이름이다
객사주관의 문살
가지런하고 단정한 띠살문인데 창호지가 찟어진 채로 방치되어 있다
예전같았다면 큰일날 일이다
무장객사의 서쪽 익헌翼軒
서쪽인헌은 가운데 주관보다 한 단 낮게 지어졌다
주관의 양쪽으로 연결된 익헌은 왕명을 받고 지방에 파견된 벼슬아치들이 숙소로 쓰던 곳이다
무장객사의 동쪽 익헌翼軒
주관헌보다 낮은 것은 물론이고 서쪽익헌 보다도 약간 낮게 지어졌으며
역시 왕명을 받고 지방에 파견된 벼슬아치들이 숙소로 쓰던 곳이다
객사로 오르는 계단
계단 난간석의 끝은 태극문양으로 이쁘게 마무리하였다
계단의 난간석
토끼같기도 하고 뛰노는 아이들 같기도 한 재미있는 조각장식이다
계단 양옆의 동쪽 축대 끝에 새겨진 조각
동그란 화병에 꽂힌 연꽃을 조각하였다
계단 양옆 서쪽 축대 끝에 새겨진 조각
이것도 역시 연꽃같다
생각지도 않은 곳에서 이렇게 이쁜 조각을 만나는 것도 답사의 즐거움이다
무장객사는
조선 선조 14년(1581)에 건립된 무장현 객사 건물로 전라북도 유형문화재 제34호로 지정되어 있다
무장객사의 서쪽 나무숲아래에 늘어선 비석들
예전 고창현을 다스리던 현감이나 관리들의 선정비와 공덕비다
비석머리의 재미있는 조각
입을 있는대로 벌리고 있는 용 인듯한 동물의 표정이 멍청해보이기도 하고 아둔해보이기도 한다
비석받침으로 쓰인 거북
절집에서 익히 보아왔던 부도비를 업고 있던 거북과는 그 격이 다르다
줄줄이 늘어선 각종 선정비과 공덕비 중 눈에 띄는 얇고 까만 비석하나
가까이 다가가보니 역시 짐작했던대로 철비鐵碑였다
이 공덕비를 세운 이는 그의 공덕이 세세년년 영세불망이길 원했던 것 같다
하지만 이렇게 찾는이 뜸한 객사 한쪽 귀퉁이 나무그늘에 가리워져 비석의 주인이 누군지도 모르게 된 것을
무덤속에서나마 알고 있을까 싶다
그가 바라던 영세불망이 이런 것은 아니었을 터
무장객사의 한 편에선 아직도 공사가 한창이다
하기는 객사건물과 진무루외에는 이렇다 할 유적이 복원되지 않았으니
내가 즐겨보는 답사책에서 무장객사는 느슨한 마음으로 가볍게 산책하기 좋은 곳이라했다
맞다
찾는 이 많지 않아 한적하고 오래된 나무들이 숲을 이룬 이곳은
느긋하게 걸으며 머리를 식히기엔 더없이 좋은 곳이다
무장객사를 나오며 생각했다
나도 오늘 이곳 고창에서 하룻밤 묵어야 하는데
이곳 객사에 여장을 풀었을 예전 관리들은 참 좋았겠다고
이제 고창의 짧은 하루동안 답사의 마무리를 위하여 고창읍내로 향한다
그곳에는 찾아봐야 할 당산이 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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