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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성 덕봉서원(德峰書院).경기 안성 본문

☆~ 풍경소리/경 기

안성 덕봉서원(德峰書院).경기 안성

푸른새벽* 2010. 4. 5. 17:20

 

 

 

 

 

 

 

 

 

 

 

 

 

 

 

 

 

 

 

 

 

덕봉서원(德峰書院)


경기도 안성시 양성면 덕봉리 108번지에 위치한 덕봉서원은 숙종 때의 문신인 양곡(陽谷) 오두인(吳斗寅)의 충절과 덕행을 추모하기 위하여 건립한 서원으로, 현재 경기도 유형문화재 제8호로 지정되어 있다.오두인은1689년(숙종 15) 인현왕후 민씨가 폐위되자 이세화.박태보등과 함께 이를 반대하는 상소를 올려 국문을 받고 의주로 귀양가던 도중 파주에서 죽었다.


이 시기는 조선의 정치사상 정치 세력의 기복이 가장 심했을 뿐만 아니라 붕당정치의 정쟁이 격심하였고,당폐(黨弊)가 심화되어 붕당정치 자체의 파탄이 일어나던 시기였다.예론(禮論)에서의 승리로 숙종 즉위 초에 득세하던 남인은 1680년(숙종6) 허견의 역모사건으로 대거 실각하고,정권은 다시 서인에게 넘어갔으니,이것이 이른바 경신대출척(庚申大黜陟) 또는 경신출척으로 불리기도 하는 경신환국(庚申換局)이다.경신환국으로 집권당이 된 서인과 노론과 소론으로 분열되어 서로 대립하는 가운데 남인은 재차 집권을 노리고 있었는데,1689년 희빈(禧嬪)장씨가 낳은 왕자를 원자로 정하는 문제가 빌미가 되어 다시 정권을 잡는 데 성공하였다.


숙종은 오랫동안 아들이 없던 중,소의(昭儀) 장씨가 왕자를 낳자 크게 기뻐하여 왕자를 원자로 삼고 소의 장씨를 희빈으로 책봉하려 하였다. 그러자 서인들이 이를 반대하였다.숙종은 서인들의 반대를 묵살하고 원자의 명호(名號)를 정하였으나,송시열이 두 번이나 상소하여 원자 정호가 시기상조임을 주장하였으므로 그의 관직을 삭탈하여 제주도로 유배시켰다가 사사하였다.송시열의 사사로 된서리를 맞은 서인은 이어서 김수홍.김수항 등 많은 사람들이 삭탈관직당하고 유배되었다.이 사건이 기사년(己巳年)에 일어났으므로 이를 일컬어 기사환국(己巳換局)이라 부른다.이 사건 뒤에 권대운.김덕원.목내선.여성제등의 남인이 득세하였는데.이후 1694년(숙종 20)의 갑술옥사(甲戌獄事)때까지 남인이 정권을 잡았다.


기사환국의 여파로 인현왕후 민씨는 그해 5월에 폐출되고,장희빈이 왕비의 자리에 올랐다.숙종은 왕비 민씨가 원자 정호에 불만을 품고 있다는 이유로 폐위하였는데,이때 오두인.이세화.박태보가 상소를 올려 인현왕후 폐위가 불가함을 적극 주장하여 임금의 분노를 샀다.오두인은 국문을 받으면서 심한 고문을 당했으나 끝내 굽히지 않았다.


오두인은 1648년(인조 26) 진사시에 1등으로 합격하고,이듬해 별시문과에 장원급제하여 성균관 전적에 제수되었으며,1650년(효종 1)에는 시강원 문학으로서 춘추관 기사관을 겸임하여 《인조실록》 편찬에 참여하였다.그리고 1656년(효종 7) 사간원 정언을 거쳐 1665년(현종 6)에는 통정대부에 올라 승정원 동부승지가 되었고,1673년(현종 14) 좌승지.병조 참의를 역임하였으며,1676년(숙종 2) 가선대부에 올랐다.이어서 동지중추부사 겸 도총관,한성부 우윤,호조.형조 참판을 거쳐 장례원 판결사가 되었다.또한 1680년(숙종 6)에는 도승지와 병조 참판에 이어 1683년에는 공조 판서에 올랐으며,이해에 아들 오태주가 현종의 딸인 명안공주와 혼인하였다.그는 다시 정헌대부에 올라 개성 유수를 지내고,지중추부사를 거쳐 숙종 15년에는 형조 판서가 되었다.그러나 기사환국이 단행되어 인현왕후가 폐위되자 이의 부당함을 역설하다가 의주로 귀양 가던 도중 파주에서 객사하였다.


숙종은 그 해에 오두인을 복관(復官)시켰으며,5년 뒤인 1694년(숙종 20) 갑술옥사로 남인이 몰락하자 그의 충절을 높이 평가하여 영의정에 추증하고 충정(忠貞)이란 시호를 내렸다.인현왕후가 폐위된 후 김춘택.한중혁등은 폐비 민씨 복위운동에 관련된 자들을 신문한 뒤 처형하려 하였다.그러나 이때 숙종은 중전 장씨(희빈 장씨)와 남인들에게 염증을 느끼고 있었고, 인현왕후를 폐위시킨 것을 후회하고 있던 중이었으므로 갑자기 정국을 변동시켜 국문에 참여한 남인의 대신 이하 고관들을 모두 삭탈관직하여 축출한 뒤 조성의 요직에 서인의 노론계와 소론계를 중용하여 정국 전환을 꾀하였다.이 사건을 갑술옥사,또는 갑술환국이라고 부른다.이와 같이 창졸간에 조정의 국면을 전환시킨 숙종은 폐비 민씨의 복위와 왕비 장씨를 다시 희빈으로 강봉한다는 하교를 내렸다.


오두인의 절의를 기리기 위한 덕봉서원이 건립된 것은 갑술환국 이듬해인 1695년이다.지방의 사림에서 역대로 해주 오씨들의 세거지인 이곳 덕봉리에 서원을 건립한 것이다.덕봉서원은 1700년(숙종 26)에 숙종으로부터 사액을 받아 사액서원으로 승격되었으며,흥선대원군의 서원 철폐령 때도 훼철되지 않고 존속한 47개 서원 가운데 하나이다.


바리봉을 뒤에 두고 앞으로는 넓은 농경지가 내려다보이는 위치에 동남향으로 자리 잡은 덕봉서원은 전당후묘(前堂後廟)의 전형적인 배치 형식을 따르고 있으며,외삼문.강당.내삼문.사당이 일직선상에 놓여 있다.경내의 건물로는 사당.내삼문.강당.동재.서재.홍살문.정문(旌門)등이 있다.


홍살문을 지나서 외삼문을 들어서면 맞은편에 강당 건물인 정의당(正義堂)이 있다.정의당은 정면 5칸,측면 2칸의 팔작지붕 건물로 가운데 3칸은 대청으로 이루어져 있으며,좌우 양쪽으로 각 1칸의 협실이 있다.정의당은 1794년(정조 18)에 중수하였는데,전면에 장초석을 놓아 기단과 대청마루 사이가 2자 정도 떨어져 반누각 같은 느낌을 준다.그리고 강당 뒤쪽으로 동재와 서재를 두어 필암서원.흥암서원과 같이 전당후재(前堂後齋)의 형식을 따랐다.동재와 서재는 각각 정면3칸,측면 1칸의 맞배지붕 건물로 2칸의 온돌방과 1칸의 부엌으로 이루어져 있다.동.서재는 1940년에 훼철되어 빈 터로 남아 있던 것을 1984년에 중건한 것이다.


재향 공간은 서원의 맨안쪽에 위치하고 있다.내삼문을 들어서면 정면3칸,측면1칸 반의 맞배지붕 건물인 사당이 있다.사당의 전면은 툇간을 조성하였고,측면과 뒷면은 방화벽을 쌓았으며,지붕의 양쪽 끝 박공 아래에는 방풍판을 달았다.또한 사당 전면 중앙의 처마 밑에는 '德峰祠宇' 현판이 걸려 있으며,내부에는 양곡 오두인의 위패가 모셔져 있다.그리고 사당의 오른쪽 앞에는 수령이 약 250년 된 향나무 한 그루가 서 있다.


서원에서는 매년 2월과 8월의 중정(中丁)에 향사를 지내는데,오두인은 파주의 풍계사,광주의 의열사,의성의 충렬사에도 제향되었다.그의 저서로는 《양곡집陽谷集》이 있으며,서원에서 소장하고 있는 전적과 유물은 《양곡집》2권 4책과 오두인의 화상 1점,숙종이 하사한 사액 현판이 있다.
*이호일 지음 '조선의 서원'중에서*

 

 

덕봉서원(德峰書院)


시도유형문화재 제8호(안성시) 
경기 안성시 양성면 덕봉리 108 


덕봉서원은 오두인의 충절과 덕행을 기리고, 지방 백성의 교육을 위해 지었다. 충정공 오두인(1624∼1689)은 조선 숙종(재위 1674∼1720) 때의 문신으로, 인현왕후의 폐위를 반대하다가 의주로 유배가는 도중에 죽었다.

 

이 서원은 숙종 21년(1695)에 지어진 후 숙종 23년에 임금이 ‘덕봉’이라는 현판을 하사하여 공인과 지원을 받게 되었다. 고종 8년(1871) 서원철폐령 때에도 헐리지 않고 존속한 전국 47개 서원 가운데 하나이다.

 

마을입구 언덕에 남동쪽으로 자리잡고 있으며, 아래쪽 낮은 곳에 공부하는 장소가 있고 위쪽 높은 곳에는 제사지내는 사당이 배치되었다. 학생들이 모여 공부하는 강당인 정의당과 생활공간인 동재와 서재, 위패를 모시고 있는 사당, 그리고 외삼문·내삼문·홍살문 등이 있다. 소장 전적과 유물로는 오두인이 지은 『양곡집』과 숙종 7년(1681) 김창협이 그린 오두인의 초상화 1점 등이 있다.

 

덕봉서원은 큰 규모는 아니지만 건물도 훌륭하고 공간도 매우 짜임새 있게 구성되어 있다. 지금은 교육적 기능은 없어지고 제사 기능만 남아있다.
*문화재청자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