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밀양 예림서원(禮林書院).경남 밀양 본문

☆~ 풍경소리/경 남

밀양 예림서원(禮林書院).경남 밀양

푸른새벽* 2010. 7. 10. 20:18

 

 

 

 

 

 

 

 

 

 

 

 

 

 

 

 

 

 

 

 

 

 

 

 

 

 

 

 

 

 

 

예림서원(禮林書院)


시도유형문화재 제79호(밀양시) 
경남 밀양시 부북면 후사포리


과거를 보기위하여 서울에 올라온 밀양 선비와 안동 선비가 만나,안동 선비가 밀양 선비에게 말을 걸었다. "밀양에도 명망 있는 학자가 꽤 나왔으니 소(小)안동으로 불러도 되겠소." 짐짓 놀리는 투로 말하는 안동 선비의 말을 밀양 선비가 받았다. " 작은 안동이 아니라,안동을 두고 웃는다는 소(笑)안동이오."


밀양 출신이 지어낸 듯하지만,퇴계 이황.학봉 김성일.서애 유성룡등 조선을 대표하는 학자들을 배출한 안동에도 뒤지지 않는다는 밀양의 선비 정신과 자부심을 느끼게 해주는 이야기이다.


밀양을 대표하는 학자가 점필재(?畢齋) 김종직(金宗直,1431-1492)이다.우리나라 도학의 정맥을 이은 영남 사림파를 대표하는 김종직은 조선 성리학에서 정몽주→길재→김숙자의 뒤를 잇고,김굉필→조광조→이언적→이황의 앞에 선 도통(道統)의 중심으로 평가받는다.
도학은 효제충신을 최고의 덕목으로 삼아 실천하는 학문인데,점필재 김종직은 사리를 버리고 의를 지키며 행하는 것이 도학을 공부하는 목적이라고 하였다.


경상남도 밀양시 부북면 후사포리에 위치한 예림서원은 김종직의 학문과 덕행을 추모하기 위하여 건립한 서원으로,맨 처음 창건한 해는 1567년(명종 22)이다.밀양 유림들과 부사 이경우가 자시산(慈是山)아래 덕성동의 영원사 옛터에 서원을 세우고 그 마을의 이름을 따서 덕성서원(德成院)이라고 명명하였다.그후 퇴계 이황의 지원을 받아 서원 이름을 점필서원(?畢書院)으로 바꾸고,퇴계의 친필 현판을 걸었다.


임진왜란을 겪으면서도 큰 피해를 당하지는 않았으나 서원의 건물이 황폐하여 1606년(선조 39)면모를 일신하였다.그러나 길이 너무 험하고 외진 곳에 서원이 위치해 있었기 때문에 1635년(인조 13) 지금의 상남면 예림리로 이건하였으며,1637년 유림의 공의로 예림서원(禮林書院)으로 이름을 바꾸고 김종직의 문인인 박한주(1459~1504)와 신계성(1499~1562)을 추가 배향하였다. 그리고 1669년(현종 10) '
禮林書院'이란 사액을 받았으나 1678년(숙종 4) 강당이 화재로 불탔으며,1680년에는 사당이 소실되기에 이르렀다.이에 중건 허가를 받아 지금의 자리인 부북면 후사포리로 옮겨 사당인 육덕사(育德祠)와 내삼문인 정양문(正陽門),강당인 구영당(求盈堂)과 동.서재인 돈선재(敦善齋).직방재(直方齋),누문인 독서루(讀書樓)를 건립하였으며,사액된 현판을 모사하여 재차 사액되었다.그러나 1871년(고종 8) 흥선대원군의 서원 철폐령에 따라 훼철되었다.


서원이 훼철된 다음 해 사림에서는 서원의 훼철이 부당함을 진정하였고,1874년에는 강당과 동.서재 등의 건물을 복구한 뒤 예림재(禮林齋)로 개칭하여 유생들의 강학과 사림이 집회소로 활용하였다.그 뒤 1971년에 강당을 중수하고,1974녀에는 사당을 중건하였으며,1985년부터 대대적인 복원 공사를 벌여 1988년에 완공하였다.예림서원은 1974년에 경상남도 유형문화재 제79호로 지정되었다.


서원의 정문 역할을 하는 독서루는 정면 3칸,측면 2칸의 2층 누각이다.
누문을 통해 서원 안으로 들어서면 좌우에 몽양재(夢陽齋)와 열고각(閱古閣)이 있다.열고각 안에는 경상남도 유형문화재 제175호인 《점필재집?畢齋集》책판과 《이존록彛尊錄》책판이 보관되어 있다.《점필재집?畢齋集》책판은 점필재 김종직의 시문을 모은 문집 책판이다.《점필재집》은 1493년(성종 24)에 점필재 김종직의 생질이며 제자인 강중진이 점필재의 초고를 모으고,송계 조위(점필재의 처남)가 편집한 원고가 미처 간행되지 못하고 무오사화 때 모두 잃어버린 것을 강중진이 다시 나머지 글을 모아 1517년(중종 12)선산에서 목판으로 간행한 것이 초간본이다.《점필재집》은 그 뒤 여러 차례의 수정과 보완,교정을 거쳐 오늘에 이르렀는데,시집 23권과 문집 2구너을 합쳐 모두 25권으로 이루어져 있으며,연보와 무오사적(戊午事蹟), 문인록(文人錄)등이 부록으로 붙어 있다.또한 《이존록》은 김종직이 직접 저술하고,송계 조위가 서문을 쓰고 강백진이 발문을 썼으며,상.하권으로 이루어져 있는데,1497년(연산군 3)에 발간된 것은 임진왜란 때 불타 없어져 1709년(숙종 35)에 중간하고,1892년에 다시 중간하였다.


몽양재와 열고각이 있는 앞마당보다 한 층 위에 기단을 쌓고  세운 구영당은 이 서원의 강학 공간으로 정면 6칸,측면 2칸 규모의 팔작지붕 건물로서 중앙의 3칸은 우물마루를 깔았고,좌우에는 온돌방으로 이루어져 있다.왼쪽 2칸의 온돌방은 일신재(日新齋)이고,오른쪽 1칸의 온돌방은 시민재(時敏齋)이다. '求盈堂'은 퇴계의 '점필재의 문장은 일어났다가 쇠했으나 그가 구한 도는 뜰에 가득 찼네'(?畢
文起衰 求道盈其庭)라는 시구에서 따온 것이다.또한 구영당 앞에는 마당을 가운데 두고 동.서재가 마주 서 있으며,사당은 강당 뒤 경사진 곳에 위치하고 있다. 담장을 둘러서 별도의 영역을 마련한 곳에 자리 잡고 있는 사당은 정양문을 통하여 들어가는데,사당인 육덕사는 정면 3칸 건물로,전면에 툇간을 두었다.이곳에서는 해마다 3월과 9월의 상정일(上丁日)에 향사를 지내고 있다.


점필재 김종직은 1431년(세종 13) 오늘날의 밀양시 부북면 제대리에서 강호 김숙자의 아들로 태어났으며,고려 말 조선 초의 학자 야은 길재의 제자인 아버지로부터 학문을 배웠다..그러므로 김종직은 정몽주→길재→김숙자로 이어지는 성리학의 학통을 계승한 셈이다.
1459년(세조 5) 식년문과에 급제하고,이듬해 사가독서를 한 김종직은 정자.교리.감찰.경상도 병마평사 등을 지내고 성종 초에 경연관이 되었으며,함양군수.참교.선산 부사를 거쳐 응고가 되어 다시 경연에 나갔다.그리고 다시 도승지.이조 참판.경연 동지사.한성 부윤. 공조 참판.형조 판서.중추부지사에까지 이르렀다.


김종직은 1492년(성종 23) 세상을 떠났는데,1498년(연산군 4) 그가 생전에 지은 〈조의제문弔義帝文〉을 사관이 된 김일손이 사초(史草)에 적어 넣은 것이 원인이 되어 무오사화가 일어났다.
무오사화는 김일손 등의 사림파가 유자광을 중심으로 한 훈구파에 의하여 화를 입은 사건을 말한다.성종이 승하하고 연산군이 즉위한 후 《성종실록》 편찬을 위한 실록청이 설치되었다. 이때 당상관이 된 이극돈은 김일손이 기초한 사초에 자신의 비행과 함께 김종직의
〈조의제문〉이 삽입된 것을 보고,이는 항우(項羽)가 초 희왕(楚懷王)을 죽인 중국의 고사를 비유하여 세조의 왕위 찬탈을 비난한 것이라 하여,이것을 문제 삼아서 유자광과 함께 연산군에게 고해 바쳤다.김종직에 대하여 유자광은 일찌기 사감이 있었다.


함양의 학사루(學士樓)에 유자광의 시판(詩板)이 걸려 있었는데,함양 군수로 부임한 김종직이 학사루에 올랐다가 그 시판을 보고는 소인배의 글이라 하여 누각에서 철거토록 한 일이 있었다.이 일로 말미암아 유자광은 김종직에 대한 사감을 품고 있었는데, 때마침 복수 할 기회가 온 것이었다. 드디어 피비린내 나는 일대 숙청이 벌어졌다. 연산군은 이미 죽은 김종직을 부관참시하였고,그의 문집을 모두 소각하였다.그리고 김일손.권오복 등 김종직의 많은 제자들을 죽이거나 귀양 보냈다.


중종이 즉위한 뒤에야 김종직은 그 죄가 풀리고,숙종 때 영의정에 추증 되었으며,문충(文忠)이란 시호가 내려졌다.그리고 김종직은 이곳 예림서원 외에도 선산의 금오서원(金烏書院),함양의 백연서원(栢淵書院),금산의 경렴서원(景濂書院) ,개령의 덕림서원(德林書院) 에 제향되었다.문집은 《점필재집》이 있고,저서는 《유두류록遊頭流錄》》·《청구풍아靑丘風雅》·《당후일기堂後日記》등이 있으며,편서는 《동문수東文粹》.《일선지一善誌》.《이존록彛尊錄》등이 있다.
*이호일 지음 '조선의 서원'중에서*

 

 

예림서원(禮林書院)


시도유형문화재 제15호(밀양시) 

 경남 밀양시 부북면 후사포리


김종직의 학문과 덕행을 기리고 지방민의 유학교육을 위하여 지은 서원으로 조선 명종 22년(1567)에 짓고 위패를 모셨다. 임진왜란으로 불탄 것을 선조 39년(1606)에 다시 지었다. 인조 12년(1634)에는 이름을 예림서원으로 바꾸고, 박한주와 신계성을 더하여 모셨다. 숙종 6년(1680)에 지금의 위치로 옮겨지었다.


현종 11년(1670)에는 사액을 받아, 나라에서 공인과 경제적 지원을 받았다. 고종(재위 1863∼1907) 때 서원철폐령으로 헐리었다가 고종 11년(1874)에 강당을 짓고 예림재라 하였으며, 다시 예림서원으로 복구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건물의 구조는 교육공간은 앞에, 제사공간은 뒤에 위치한 전학후묘의 배치를 하였다. 사당인 육덕사와 유생들의 모임 및 학문을 닦는 곳인 강당, 생활공간인 돈선재와 직방재, 그리고 전사청, 독서루 등이 남아있다. 김종직의 저서인 『이존록』과 『점필재문집』의 목판이 보관되어 있다. 
*문화재청자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