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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월흥녕사징효대사탑비(寧越興寧寺澄曉大師塔碑).강원 영월 본문

☆~ 풍경소리/강 원

영월흥녕사징효대사탑비(寧越興寧寺澄曉大師塔碑).강원 영월

푸른새벽* 2014. 5. 6. 22:31

 

 

 

 

 

 

 

 

 

 

 

 

 

 

 

 

 

 

영월흥녕사징효대사탑비(寧越興寧寺澄曉大師塔碑)


징효대사 절중(826~900) 은 신라 말 구산선문 중 사자산파를 창시한 철감국사 도윤(798~868)의 제자로 흥녕사(법흥사의 옛이름)에서 선문을 크게 중흥시킨 인물이다.그의 부도비가 법흥상 입구 왼쪽 숲 속에 자리 잡고 있다.높이 3.96m로 귀부 위에 비석을 세우고 그 위에 이수를 얹은 전형적인 부도비의 모습을 갖추고 있다.비신 일부에 약간의 손상이 있을 뿐 보존 상태는 매우 좋은 편이다.


견고한 화강암으로 만든 비신에 "유당신라국사자산ㅁㅁㅁㅁㅁ교시 징효대사 보인지탑비명......(有唐新羅國師子山ㅁㅁㅁㅁ敎諡澄曉大師寶印之塔 碑銘......)"이라는 글씨를 36행으로 새겨 징효대사의 행적과 당시의 포교 내용을 적고 있다.또한 비문 마지막에는 "천복구년세재갑진유월십칠일립(天福九年歲在甲辰六月十七日立)"이라는 기록이 있어 이를 통해 '천복 9년',곧 고려 혜종 1년(944)에 부도비를 세웠으며,보인(寶印)이라는 탑호를 받아 '징효국사보인지비'라고 하였음을 알 수 있다.


지대석과 귀부는 하나의 돌이며,턱을 앞으로 쑥 내일고 있는 거북이 머리가 진취적으로 느껴진다.콧대가 우뚝한 데다 두 눈도 부릅뜨고 잉 험상궂어 보인다.귀부의 등에는 겹으로 된 육각의 귀갑문이 장식되어 있으며,귀갑문 안에 4엽의 꽃무늬가 장식되어 있다.또한 귀부의 네 발은 방형의 지대석을 딛고 있는데 다섯 발가락이 부드럽게 표현되어 있다.


귀부의 등 위에 비신 받침대를 마련하고 각면마다 구름무늬를 조각하였으며,비신 받침대 위쪽에는 연꽃무늬를 두르고 있다.그 위에 비신이 놓여 있으며 비신 위에 이수가 있다.


이수는 네 모서리에 각각 한 마리씩,용 네마리가 모두 목을 길레 뽑고 머리를 가운데로 내밀며 화염에 싸여 있는 보주를 서로 차지하겠다고 다투는 형상이다.정면 중앙에는 '고징효대사비(故澄曉大師碑)'라는 글씨가 전각체로 조각돼 있다.보물 제612호로 지정돼 있다.
*한국문화유산답사회 지음 '답사여행의 길잡이' 중에서

 


영월흥녕사징효대사탑비(寧越興寧寺澄曉大師塔碑)

보물 제612호
강원 영월군 수주면 법흥리 422


흥녕사를 크게 발전시킨 징효대사의 행적을 기리기 위해 세운 석비로, 거의 완전한 형태로 보존되고 있다.


거북 모양의 받침돌 위에 비몸을 올리고, 그 위에 용머리가 조각된 머릿돌을 얹었다. 받침돌의 거북머리는 용의 머리에 가깝고, 입에는 여의주를 물고 있다. 특히 발가락과 발톱은 사실적으로 조각되어 있어 눈에 띈다. 반구형(半球形)에 가까운 등은 길쭉한 6각무늬로 채워져 있으며, 중앙에는 비를 꽂아두는 네모난 홈을 마련해 두었다. 머릿돌에는 네 마리의 용이 중심을 향해 마주보고 있다. 눈, 코, 입은 사실적으로 새겼으나 몸에 표현된 비늘은 약하게 새겨져 형식에 그치고 있다.


비문에는 징효의 출생에서부터 입적할 때까지의 행적이 실려있다. 비문에 의하면 징효는 19세에 장곡사에서 승려가 되어 75세 되던 효공왕 5년(901)에 입적하였다. 끝부분에는 대사의 공적을 기리는 내용도 새겨져 있다.


이 비는 대사가 입적한지 44년 후인 고려 혜종 원년(944)에 세워진 비로, 글은 최언위가 짓고 최윤이 글씨를 썼으며 최오규가 비에 새겼다.
*문화재청자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