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밀양삼랑진후조창유지비석군(三浪津後曹倉遺址碑石群).경남 밀양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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밀양삼랑진후조창유지비석군(三浪津後曹倉遺址碑石群).경남 밀양

푸른새벽* 2015. 4. 29. 20:10

 

 

 

 

 

 

 

 

 

 

 

 

 

 

 

 

 

 

 

 

 

밀양삼랑진후조창유지비석군 (密陽三浪津後曹倉遺址碑石群)

 

경상남도  문화재자료 제393호

삼랑진읍 삼랑리 612

 

밀양시 삼랑진읍 삼랑리 하부마을 산기슭에는 여러 개의 비석들이 몰려 세워져 있는데, 이 비석들은 모두 조선 후기 이곳에 조성되어 기능하던 後漕倉(三浪倉) 및 이 지역 주민과 관련된 업적을 남긴 역대 수령과 관찰사를 기리기 위해 세워졌다. 이들을 소개해 보면 다음과 같다.

(1) 府使金侯仁大遺愛碑
삼랑진 후조창 창건 당시 밀양부사로 있으면서 후조창 조성을 위해 애쓴 김인대를 기리기 위해 1766년(영조 42) 주민들이 건립한 비이다. 화강석재로 관석과 대석을 갖추고 있다. 비신 크기는 49×23×131cm.

(2) 府使洪侯履簡永世不忘碑
1812년(순조 12, 壬申) 부사 홍이간이 재임중 俸廩을 출연하여 船 人들에게 혜택을 주었던 것을 기리기 위해 後漕倉船主들이 건립한 비이다. 화강석재로 관석과 대석을 갖추었다.

비신의 크기는 41×10 ×120cm.

(3) 觀察使趙相國寅永漕弊釐正永世不忘碑
道光23년(1843, 헌종9) 관찰사 조인영을 기리기 위해 船廳에서 건립한 비이다. 칭송시문에 의하면, 재임중에 조인영은 후조창 운영과 관련된 여러 폐단을 없애기 위한 규정을 만들어 반포하여 폐단이 없어지고 漕船도 규정대로 만들어져 세곡을 싣는 데도 여유가 생겼다고 한다. 鐵碑로 관과 비신이 하나로 연결되어 있다. 크기는 37×3.5×135cm.

(4) 差使員兼都護府使趙公雲杓永世不忘碑
1839년(헌종 5) 月廩의 일부를 출연하여 주민의 어려움을 보살펴 준 밀양부사 조운표를 기리기 위해 선청에서 건립하였다. 철비로 관과 비신이 하나로 연결되어 있다. 크기는 35×3.5×119cm.

(5) 府使李侯定在善政碑
1857년(철종 8) 밀양부사 이정재의 선정을 기리기 위해 三浪里 주민이 건립한 비이다. 화강석재로 비신과 대좌만 있다. 비신의 크기는 30×15×105cm. 칭송시문(16자)의 글자가 많이 마모되어 판독이 어렵다.

(6) 府使李侯喆淵永世不忘碑
同治 11년(1872, 고종 9) 밀양부사 이철연을 기리기 위해 삼랑리 주민이 건립한 비이다. 칭송시문에 의하면 그는 鹽稅의 폐단을 감영에 보고하여 주민의 요구에 부응하게 하였고, 마을의 집들이 연소된 데 대해 관아에서 비용을 일부 출연하여 집들이 새로 들어 서게 해 주었다고 한다. 화강석재로 관석과 대좌가 갖추어져 있다. 비신의 크기는 42×15×114cm.

(7) 府使李侯喆淵永世不忘碑
1872년(고종 9) 월름을 출연하여 조창 관련 잡비와 관련된 폐단을 견감시켜 준 밀양부사 이철연을 기리기 위해 船主가 건립한 비이다. 화강석재로 관석과 대좌를 갖추고 있다. 비신의 크기는 48×16×116cm.

(8) 巡察金公世鎬永世不忘碑
1872년(고종 9) 관찰사 김세호를 기리기 위해 삼랑리 주민이 세운 비이다. 비문에 의하면, 50여년 전에 김세호의 조부가 밀양부사로 부임하여 선정을 베풀었는데, 이후 김세호가 관찰사로 부임하여 다시 石頭稅(석두창(마산창의 옛 명칭)과 관련? 1석당 운반 추가세?) 2전을 복구하는 등, 삼랑진에 은덕을 베풀었다고 한다. 화강석재로 만든 비로 관석은 사라지고 대좌만 있다.

크기는 44×13×88cm.


조선 후기 영조 36년(1760) 경상도 창원부 馬山과 진주목 駕山 포구 에 각각 左漕倉과 右漕倉이 세워진지 5년 뒤인 영조 41년(1765)에 밀양부 三浪津에 後漕倉이 추가로 세워졌다. 원래 밀양을 비롯해 낙동강 하류 연안을 끼고 있는 고을들은 稅穀을 고을 내 특정 포구에 모아 배에 실어 낙동강을 거슬러 올라가 문경 새재를 넘어 충주 慶原倉에서 한강을 통해 서울로 운반하는 방식을 택하고 있었다.

그러나 삼랑진에 후조창이 창건된 이후 密陽·玄風·昌寧·靈山·金海·梁山 등 6개 고을은 세곡을 이곳으로 운반하여 조운을 통해 서울로 운반하는 방식을 취했다. 세곡의 운반을 총괄 지휘하는 都差使員은 밀양부사였고 실제 운송지휘를 한 差使員은 薺浦萬戶였다.

이처럼 삼랑진에 여러 고을의 물산이 몰리자 이곳이 각종 상인들과 선주들이 몰려 번성하기도 하였지만, 여러 가지 폐단도 생기게 된다. 특히 세곡선의 난파로 인해 밀양부사 및 제포만호가 번번히 처벌되었을 뿐만 아니라 주민들도 많은 피해를 보고 있었다. 이런 문제에 대해 해당 수령과 관찰사가 관심을 가질 수밖에 없었지만, 특별히 이에 유의하여 주민이나 선주들에게 혜택을 베푸는 지방관이 있었을 것이다. 이 비석들은 이 과정에서 세워진 것으로 보인다.

*문화재청자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