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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주 회연서원(星州檜淵書院).경북 성주 본문

☆~ 풍경소리/경 북

성주 회연서원(星州檜淵書院).경북 성주

푸른새벽* 2015. 9. 21. 09:57

 

 

 

 

 

 

 

 

 

 

 

 

 

 

 

 

 

 

 

 

 

 

 

 

 

 

 

 

 

 

 

 

 

 

 

 

 

 

 

 

 

 

 

 

 

 

 

 

 

 

 

 

 

 

 

 

 

 

 

 

 

 

 

 

 

 

 

 

 

 

 

 

 

 

 

 

 

 

 

 

 

 

 

 

 

 

 

 

 

 

 

 

 

 

 

 

 

 

 

성주 회연서원(星州檜淵書院)


경상북도 성주군의 수륜면과 금수면,그리고 김천시 증산면에 걸쳐 펼쳐진 대가천 계곡은 평생 초야에 묻혀 학문에 정진하기를 원했던 한강(寒岡) 정구(鄭逑, 1543~1620)가 주자의 <무이구곡 武夷九曲>을 본떠서 지은 <무흘구곡武屹九曲>의 배경이 되는 곳으로 탄성이 절로 나오는 비경을 간직한 곳이다.한강은 기암괴석이 많고 수정같이 맑은 물이 흐르는 이 절경을 무흘구곡이라 칭송하며 칠언절구로 노래하였다.


무흘구곡은 행정구역상 성주 지역의 봉비암鳳飛巖.한강대寒岡臺.선암船巖.입암立巖.사인암舍人巖과 김천 지역의 옥류동玉流洞.만월담滿月潭.와룡암臥龍巖.용추龍湫를 가리킨다.이 가운데 봉비암은 깎아지른 듯한 절벽 아래로 대가천이 유유히 흐르는 절경을 이루고 있어 무흘계곡의 제1곡임을 자랑하는데,이 봉비암 아래에 회연서원이 남향으로 자리 잡고 있다.


경상북도 성주군 수륜면 신정리의 양정마을에 위치한 회연서원은 한강 정구의 학문과 덕행을 기리기 위하여 1627년(인조 5) 한강이 회연초당檜淵草堂을 짓고서 제자들을 가르치던 곳으로서,한강이 세상을 떠난 후에 지방 유림에서 그를 추모하는 서원을 세운 것이다.이 서원은 1690년(숙종 16)에 '檜淵書院'이란 사액을 받음으로써 사액서원이 되었으나,1868년(고종 5) 흥선대원군의 서원 철폐령 때 훼철되었다.그러나 강당 건물은 훼철되지 않고 옛 자리를 지키고 있다가 1974년에 복설되었으며,이때 회연서원은 경상북도 유형문화재 제51호로 지정되었다.유형문화재로 지정될 당시에는 강당인 경회당景晦堂 한 채뿐이었으며,나머지 건물은 1977년에 건립한 것이다.


정면 3칸, 측면 2칸의 누각 건물인 견도루見道樓를 들어서면 서원의 넓은 마당이 펼쳐지고,마당을 가로질러 바라보이는 북쪽으로 동쪽에는 강당과 동.서재가 있는 강학 공간이,그리고 서쪽에는 제향 공간이 나란히 위치하고 있다.강학 공간과 제향 공간은 담장으로 둘러싸인 별도의 영역에 자리 잡고 있다.


강학 공간의 정문인 사주문을 들어서면 정면으로 강당이 바라보이고,그 앞에 마당을 사이에 두고 정면 3칸 규모인 동재와 서재인 지경재持敬齋와 명의재明義齋가 마주 보고 서 있다.강당인 경의당은 정면 5칸,측면 3칸의 맞배지붕 건물로서 중앙의 3칸은 대청으로 우물마루를 깔았고,좌우에는 각각 1칸의 협실을 두었다.동쪽의 협실에는 온돌방을 들였고,서쪽의 협실은 마루방으로 이루어져 있다.강당 전면 중앙의 처마 밑에는 '檜淵書院' 현판이 걸려 있고,강당 대청의 뒷벽 중앙에는 '景晦堂' 편액이 걸려 있다.경회당 뒤 동북쪽에는 옛 사당 건물이 있으며,동재 뒤 동쪽에 위치한 백매원百梅園에는 한강 정구의 일대기를 기록한 신도비가 세워져 있다.


김장생과 더불어 조선 예학의 거두였던 한강은 조선 최초의 서원인 백운동서원(후에 소수서원으로 사액)이 세워진 해인 1543년(중종 38)에 이곳 성주에서 태어났다.정여창.조광조.이언적.이황 등과 함께 '동방 5현'가운데 한 사람으로 꼽히는 김굉필의 외증손이기도 한 그의 천재성은 일찍부터 나타났던 모양이다.이미 5세 때 보는 사람마다 재주에 탄복하여 그를 신동이라 불렀고,7세에 《대학》.《논어》의 뜻을 이해하였다고 한다.


그가 본격적인 학문의 길로 접어든 것은 13세 때부터였다.그는 당시 성주 향교의 교수로 와 있던 남명 조식의 제자인 덕계德溪  오건吳健(1521~1574)에게 《주역》을 배웠는데,이때 그는 건곤乾坤 2괘卦를 읽고 배우지 않은 것까지 모두 미루어 통달해버렸다고 한다.그러자 스승인 덕계가 제자들에게 "너희들의 스승이 될 것이다"라면서 매우 기뻐했다는 일화가 있다.


청년이 된 한강은 21세 때 당시 성리학의 대두였던 퇴계 이황을 만나기 위해 예안의 도산서당을 찾아간다.그가 하룻밤을 머물면서 성리학에 대하여 논하다가 돌아가자,퇴계는 '그의 영민함이 오히려 그에게 병통이 되지 않을까 두렵다'는 편지를 덕계에게 띄웠다고 한다.퇴계를 찾아갔던 그는 다시 3년 뒤에는 두류산 천왕봉 아래에서 모든 벼슬을 거절하고 오로지 산림처사를 자처하며 학문에만 전념하던 남명을 찾아가 배움을 청한다.이로써 그는 영남 유학의 쌍벽을 이룰 뿐만 아니라 조선 유학사를 대표하는 퇴계와 남명을 모두 스승으로 모신 것이다.


회연야인檜淵野人이란 그의 별호가 말해주듯 한강은 과거를 포기하고 오직 학문에만 정진하였다.그는 22세 때 과거에 응시하기 위하여 상경한 적이 있었으나 느낀 바 있어 과장에 들지 않고 그냥 귀향하고 말았다.


과거를 보지 않고 초야에 묻혀 지내던 그는 31세 때인 1573년(선조 6) 유일遺逸로 천거되어 예빈시禮賓寺 참봉에 임명되었으나 취임하지 않았다.이로부터 7년 동안 그는 건원릉健元陵 참봉과 삼가.의흥.지례 등지의 현감에 임명되었으나 모두 나아가지 않고 창평산蒼坪山 선영 곁에 집을 지어 한강정사寒岡精舍라 이름하고 그곳에 거처하면서 제자들을 가르쳤다.


그가 원하지 않았던 벼슬길에 나선 것은 그의 나이 38세 때인 1580년이었다.그는 여러 번의 고사 끝에 비로소 창녕 현감으로 나아가 선정을 베풀어 생사당이 세워졌다.이듬해 그는 지평이 되고,1585년에는 교정청의 교정랑校正郞이 되어 《경서훈해經書訓解》 간행에 참여하였다.그리고 통천 군수.우승지.강원도 관찰사.성천 부사.충주 목사.공조 참판 등을 역임하고 1608년(광해군 즉위년) 대사헌이 되었다.그러나 임해군의 옥사가 일어나자 이에 연루된 모든 사람들을 용서하라고 상소한 뒤 낙향하여 회연초당에서 제자들을 가르쳤으며,정원에 매화 100그루를 심어 백매원을 조성하였다.뿐만 아니라 계축옥사가 일어나자 상소를 올려 영창대군을 구하려 하였다.


강학 공간과 나란히 위치한 제향 공간은 두 영역으로 나누어져 있다.삼문을 들어서면 오른쪽으로 바라보이는 건물이 전사청이다.그리고 정면으로 바라보이는 내삼문 안에 사당이 자리 잡고 있다.사당은 정면 3칸,측면 2칸의 맞배지붕 건물로서,내부에는 한강 정구를 주벽으로 하여 그의 제자인 석담石潭 이윤우李潤雨(1569∼1634)의 위패가 배향되어 있다.


또한 제향 공간 밖 서쪽에는 숭모각崇慕閣과 고직사가 있으며,숭모각에는 한강의 저서와 문집의 각종 판각과 유물 및 유품이 보존되어 있다.그리고 강학 공간 앞 동쪽에는 별사別祠인 향현사鄕賢祠가 사방을 담장으로 둘러쌓은 별도의 영역 안에 세워져 있다.


한강 정구는 경학을 비롯하여 제자백가 및 천문.지리.산술.의학.풍수 등에 이르기까지 달통하였던 대학자로서 많은 제자를 배출하였으며,78세를 일기로 생을 마감하였다.그는 특히 예학에 관한 많은 저술을 남겼으며,당대의 명문장가로서 글씨도 뛰어났다.저서에 《성현풍 聖賢風》.《태극문변太極問辨》.《고금충모古今忠謨》.《오복연혁도五服沿革圖》.《심의제도深衣制度》.《무이지武夷志》.《곡산동암지谷山洞庵志》.《와룡지臥龍誌》.《역대기년歷代紀年》.《관의冠儀》.《혼의婚儀》.《장의葬儀》.《계의?儀》.《갱장록羹墻錄》 등이 있다.


인조반정 후 그에게 이조판서가 추증되고 문목文穆이란 시호가 내려졌으며,이곳의 회연서원 외에도 성주의 천곡서원川谷書院,충주의 운곡서원雲谷書院,창녕의 관산서원冠山書院,성천의 학령서원學翎書院,통천의 경덕사景德祠 등에 제향되었다.
*이호일 지음 -조선의 서원-

 

 

 

성주 회연서원(星州檜淵書院)


시도유형문화재 제51호(성주군)
경북 성주군 수륜면 신정리 258 


한강 정구(鄭逑)의 학문과 덕행을 추모하고 지방민의 유학교육을 위하여 세운 서원이다.


조선 인조 5년(1627)에 제자들이 세운 회연초당이 있던 자리에 짓고 회연서원이라 이름하였다. 그 후 숙종 16년(1690)에 임금으로부터 ‘회연(檜淵)’이라는 이름과 토지·노비를 하사 받았다. 우리나라에 남아있는 서원 중에서도 중심이 되는 서원 중의 하나로 선생의 문집판 『심경발휘』가 보관되어 있고 현판은 한석봉이 쓴 것이다.


대경재·명의재·양현청 등의 건물이 있었으나 양현청은 고종 5년(1868) 흥선대원군의 서원철폐령으로 없어졌고, 해마다 2차례 제사를 지내고 있다. 
*문화재청자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