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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처럼 떠나다

남양주 운길산 수종사 일원 (南楊州 雲吉山 水鍾寺 一圓).경기 남양주 본문

☆~ 절집.절터/경 기

남양주 운길산 수종사 일원 (南楊州 雲吉山 水鍾寺 一圓).경기 남양주

푸른새벽* 2017. 11. 6. 21:07




















































































































































남양주 운길산 수종사 일원(南楊州 雲吉山 水鍾寺 一圓)


명승  제109호
경기도 남양주시 조안면 송촌리 1060 외 7필지


수종사에 대한 유래는, 1458년(세조 4) 세조가 금강산(金剛山) 구경을 다녀오다 이수두(二水頭 : 兩水里)에서 하룻밤을 묵게 되었는데, 한밤중에 난데없는 종소리에 잠을 깬 왕이 부근을 조사하자, 주변에 바위굴이 있고, 굴 안에 18나한(羅漢)이 있었으며, 굴 안에서 물방울 떨어지는 소리가 마치 종소리처럼 울려나와 이곳에 절을 짓고 수종사라고 하였다고 전해온다.


운길산 수종사는 북한강과 남한강이 합류하는 두물머리(양수리)를 바라볼 수 있는 저명한 경관 전망지점으로 자연경관 가치가 높은 곳이다.


예부터 많은 시인묵객들이 이곳의 풍광을 시·서·화로 남겼으며, 서거정(1420~1488)은 수종사를 ‘동방에서 제일의 전망을 가진 사찰’이라 하였으며, 봄·여름·가을·겨울 연중 내내 신록·단풍·설경이 신비스러우며, 일출·일몰·운해 등 어느 시간의 풍광이라도 대단히 아름다운 전망을 지니고 있는 조망지점으로서 경관가치가 큰 곳이다.


정약용은 일생을 통해 수종사에서 지낸 즐거움을 ‘군자유삼락’에 비교할 만큼 좋아 했던 곳으로 역사문화 가치가 높은 곳이며, 또한 다선(茶仙)으로 일컬어지는 초의선사가 정약용을 찾아와 한강의 아름다운 풍광을 즐기며 차를 마신 장소로서, 차문화와 깊은 인연이 있는 곳이며, 현재 수종사는 삼정헌(三鼎軒)이라는 다실을 지어 차 문화를 계승하고 있어 차 문화를 상징하는 사찰로 이름이 높다.


겸재 정선(1676~1759)의 경교명승첩(한강의 북한강·남한강 주변경관과 한강과 서울의 인왕산, 북악산 등의 경관을 그린 화첩으로 총 33점으로 이뤄짐)중 독백탄(獨栢灘)은 현재의 남한강과 북한강이 만나는 ‘양수리’의 경관을 보여주는 고서화로서 그 시대의 명승지 경관과 현재의 경관을 비교 감상할 수 있어 회화 가치가 높다.
*문화재청자료*




운길산 수종사(雲吉山 水鐘寺)


수종사는 일단 가는 길부터가 산수화같이 아름답고 서정이 물씬하다.서울에선 불과 백릿리 길이지만 덕소와 팔당을 거쳐 양수교에 이르는 동안의 시야는 줄곧 한강변의 풍광으로 풍성한 여정을 만끽할 수 있다.


송촌리 동구 앞에서 북쪽으로 꺽어들어 굽이굽이 가파른 산길을 2km쯤 올라가면 운길산(雲吉山)의 품에 안긴 아담하고 소박한 옛절 수종사가 반긴다.저 아래서 종소리에 이끌린 세조 또한 이 길을 허위허위 올라왔을 것이다.


광주산맥이 남서로 내려오다가 불쑥 한번 파도를 치면서 빚어놓은,상서로운 기운이 듬뿍 서린 운길산은 정상 가까이에 자리잡은 수종사 절마당에 들어서면 일단 전망이 빼어나다.시선을 멀리 던져보면 높고 낮은 산봉들이 봉긋봉긋 솟아 있고,다시 그 앞으로 수굿이 눈길을 떨궈보면 한강으로 합류하기 직전의 북한강이 장관이다.드넓은 수면이 바람 따라 꿈틀대며 은빛으로 찬란하고 산그림자는 그대로 맑은 호수면에 잠겨 일렁거린다.


자칫 해거름이나 새벽녘에 수종사에 올라서는 그 산수화같이 아름답고 절묘한 풍경을 놓치기 십상이다.그럴 때면 어김없이 강에서 피어오르는 뽀얀 운무가 운길산까지 차올라 세상을 덮기 때문이다.비로자나삼존불을 모신 대웅보전 꽃창살도 운무에 씻기고 씻겨 그만 하얗게 바랬다.절 왼쪽으론 등산로가 열려 있으며 전나무,참나무 등 우거진 밀림도 늠름하다.


운길산 수종사의 창건연대는 확실치 않다.1939년 경내의 석조부도를 중수하면서 조선 초기 유물이 대거 발견됨에 따라 유물이 조성된 같은 시기에 창건 되었을 것으로 추정할 뿐이다.세종 21년(1439)에 조성된 듯한,정의옹주(貞懿翁主)의 부도로 추정되는 석조부도가 그것이지만 절의 자세한 내력은 알 길이 없다.그뒤 세조 4년(1458)에 왕명으로 크게 중창하면서 비로소 연혁이 새로 성립하게 된다.세조가 중창불사를 하여 법등을 잇게 된 내력이 재미있다.


금강산을 순례하고 돌아오던 세조가 마침 양수리쯤에 도착하자 나이 저물어 이 부근에서 하룻밤을 묵게 되었단다.당시의 사정으론 양수리에서 서울은 꼭 하루가 걸리는 백릿길이었다.그 저녁 한밤중에 세조는 귀를 의심했다.지금의 수종사 부근에서 은은한 종소리가 들리는 게 아닌가.기이하게 생각한 세조는 날이 밝자 종소리를 따라 발걸음을 옮겼다.종소리가 들리는 곳은 뜻밖에도 바위굴이었고, 굴 속엔 16나한이 앉아 있었다.종소리로 들렸던 것은 그 굴속으로 물방울이 떨어지면서 암벽을 울려 일어나는 공명(共鳴)이었는데 그리도 청량하고 명징하게 들렸던 것이다.


세조는 왕명을 내려 그곳에 절을 짓고 절 이름을 수종사(水鐘寺)라 했다.현재 약사전 앞에는 아무리 큰 장마와 가뭄에도 물줄기가 마르지 않은 약수가 있어 병자들이 자주 찾곤 하는데, 이곳이 수종사를 중창하게 된 연원의 암굴이었다.하나 당시의 굴이었던 흔적은 거의 찾아볼 수 없고,약사전 오른쪽 위에 나한을 모신 나한전만 보존돼 있다.세조가 돌계단을 쌓아 터를 닦고 굴 속의 16나한을 꺼내 모셨다는 전각이다.이때 대웅보전 옆에 8각오층석탑을 세워 절의 품격을 갖춘다.


1890년(고종 27) 풍계 혜일(楓溪 慧一)스님이 고종에게서 8천 냥을 하사받아 폐허가 된 절을 중건하고 이듬해 4천 냥과 금백홍사(金帛紅絲)를 시주받아 사존불을 개금했는데 이때 방광(放光)이 있었다는 기록이있다.1939년 태욱스님이 중수했으나 한국전쟁 때 전소되고 마는 참화를 겪는다.지금의 수종사는 1974년 부터 중건한 것으로 대웅보전과 나한전.약사전.산신각.경학원(經學院)과 요사가 있으며,석조부도와 삼층석탑,세조의 명으로 중창할 때 세운 팔각오층석탑이 아름다운 자태를 간직하고 있다.
*한국문화유산답사회 지음'답사여행의 길잡이'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