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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항 영일냉수리신라비(浦項 迎日冷水里新羅碑).경북 포항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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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항 영일냉수리신라비(浦項 迎日冷水里新羅碑).경북 포항

푸른새벽* 2019. 2. 3. 12:35

































포항 영일냉수리신라비(浦項 迎日冷水里新羅碑)


국보 제264호 
경북 포항시 북구 신광면 토성리 342-1 신광면사무소 


영일 냉수리 신라비는 1989년 4월 6일 포항시 북구 신광면 냉수리 이상운씨가 소유한 밭에서 밭가리를 하던 중 평소 걸림돌이 되어온 것을 파헤쳐서 빨랫돌로 사용하려고 집으로 운반하여 물로 씻어보니 글자가 새겨져 있어 행정기관에 신고하여 학계에서 현지 조사한 바 귀중한 문화재적 가치가 있다고 판단되어 국보로 지정되었다.


이 비에는 신라의 실성왕과 내물왕 두 왕이 진이마촌의 절거리에게 재산 취득을 인정하는 교를 내렸는데 계미년 9월25일에 지증왕등 각부의 대표 7명이 함께 논의하여 두 왕의 조치를 다시 한번 확인한 다음 별교를 통해 절거리가 죽은 후에는 아우 아사노사신지는 재물분배에 대해 문제를 일으키지 말 것이며, 만약 이를 어길 경우 중죄에 처할 것임을 결정하였고, 이 명령은 중앙기관의 전사인 7명과 지방관서의 촌주 2명이 일을 마치고 이 사실을 기록한다는 내용을 담고 있는데 계미란 간기와 지증왕 등 각 칭호를 삼국사기나 삼국유사의 관련 기록과 연관지어 볼때 지증왕 4년(503)에 건립된 것으로 보인다.


이 비는 국가에서 새운 비로 당시 신라의 정치, 경제, 사회, 문화의 여러문제를 다루고 있고, 왕명을 다룬 초기 율령체제의 형태를 보여주고 있는 현존 최고의 신라고비이다. 고르지 못한 네모꼴의 자연석 앞, 뒤, 위 3면에 글자를 새겼으며, 매행별 글자수와 크기가 일정하지 않지만 대략 앞면은 12행 152자, 뒷면 7행 59자, 윗면 5행 20자로 총 231자가 새겨져 있다. 신라 지증왕 4년(503)에 만든 것으로 추정되는 현존 최고의 신라비로 신라초기 율령체제를 알 수 있게 하며, 국보 제242호 울진 봉평신라비(524년)와 더불어 신라사 연구에 귀중한 자료로 평가되고 있다. (현존 비각건립은 1993년 6월 착공하여 8월에 완공하였다.)
*대한민국구석구석자료*



영일냉수리신라비(浦項 迎日冷水里新羅碑)


국보 제264호 
경북 포항시 북구 신광면 토성리 342-1 신광면사무소 


지금까지 남아있는 신라비 가운데 가장 오래된 것으로, 1989년 마을주민이 밭갈이를 하던 중 발견하였으며, 재산분배를 확인하는 증명서의 성격을 지니고 있다.


형태는 네모난 자연석으로 밑부분이 넓고 위가 줄어드는 모습이며, 앞면과 뒷면, 그리고 윗면의 3면에 글자를 새겼다. 비문은 거의 닳지 않아 눈으로 읽을 수 있을 정도로 보존상태가 좋다. 글자는 총 231자이고 서체는 해서체로 보이나, 예서체의 기풍이 많이 남아 있어 비문의 형태와 글씨체면에서 중원고구려비(국보 제205호), 울진봉평신라비(국보 제242호)와 매우 비슷하다.


비문은 절거리(節居利)라는 인물의 재산소유와 유산상속문제를 결정한 사실을 기록해 놓은 것으로, 공문서의 성격을 띠고 있다. 각 부의 여러 귀족들이 참여하여 재산권 분쟁을 처리하고 있는데, 이는 왕권을 강화하기 이전에 미약했던 신라왕권의 한계를 알려주고 있다. 또한 소를 잡아 하늘의 뜻을 묻고 제천의식을 행하던 당시 풍속제도의 실상이 잘 담겨져 있다.


내용중 ‘계미(癸未)’라는 간지(干支)와 ‘지증왕’등의 칭호가 나오고 있어 신라 지증왕 4년(503)에 건립된 것으로 보인다. 국가에서 세운 비로서 신라의 왕명을 다룬 초기 율령체제의 형태를 보여주어 당시 사회를 이해하는데 귀중한 자료가 된다. 그리고 신라역사 연구와 금석학 연구에도 중요한 유물이다. 
*문화재청자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