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춘천칠층석탑(春川七層石塔).강원 춘천 본문

☆~ 풍경소리/강 원

춘천칠층석탑(春川七層石塔).강원 춘천

푸른새벽* 2019. 8. 15. 20:30
































































춘천칠층석탑(春川七層石塔)


보물 제77호 
강원 춘천시 소양로2가 162-2 


높이 5.5m. 현재 원래의 모습을 갖추고 원래의 위치로 추정되는 소양로 한복판에 서 있다. 주변에 민가에 들어서 있어 어느 절에 속하였는지는 알 수 없으며, 6·25 전쟁 때 심하게 손상되었다. 아랫부분이 파묻힌 채 1층 받침돌만 나타나 있어 받침 부분의 구조가 1층인지 2층인지는 확실히 알 수 없다.


석탑은 여러 부재를 화강암으로 만들었다. 받침돌의 면석(面石)은 4장의 널돌로 구성하였고, 면석 위의 덮개돌은 1장의 널돌로 덮었지만 파손이 심하고 많이 닳아서 세부의 모습을 알 수 없다. 받침돌의 덮개돌 위에는 몸돌을 직접 놓지 않고 1장의 널돌을 굄돌로 놓은 뒤에 몸돌을 받치도록 하였다. 이 굄돌은 연꽃을 위로 새긴 앙련대(仰蓮臺)로, 연꽃의 꽃잎은 모퉁이에 이를수록 비스듬히 새겨 고려시대에 나타난 연꽃무늬 배열의 특징을 보이고 있다. 특히 굄돌을 따로 끼운 것은 이전 시기 석탑의 덮개돌 윗면에 둔 몸돌 굄대를 대신한 것으로, 이와 같은 연꽃무늬의 굄돌을 끼운 것이 고려시대 석탑의 특이한 모습 가운데 하나이다.


탑신부(塔身部)는 여느 일반적인 석탑과 같이 몸돌과 지붕돌로 구성되었다. 1층 몸돌만 하나의 돌로 만들었고, 그 외의 지붕돌과 그 위의 몸돌은 특이하게 하나의 돌로 만들었다. 1층 몸돌은 매우 높은 편으로, 각 면에는 좌우에 모서리 기둥을 얕게 새겼다. 2층 이상의 몸돌은 1층 몸돌에 비해 높이가 거의 1/5 정도로 낮아졌지만, 모서리 기둥이 가지런하고 너비도 알맞은 체감률을 보여 우아한 기품을 보인다.


각 층의 지붕돌은 처마와 처마가 맞닿은 전각(轉角) 부분이 많이 손상되었지만, 나머지 부분은 원형을 간직하고 있다. 대체로 윗면은 평박(平薄)한 편으로 몸돌 굄이 있고, 아랫면은 제법 높지만 둔중(鈍重)하지는 않다. 곧 낙수면의 경사는 완만하고 추녀는 높이 올려져 전각의 반전은 경쾌해보인다. 추녀에는 낙수홈이 오목새김되었고, 아랫면의 받침은 1층~3층은 6단이지만 4층 이상은 5단이다. 6단의 지붕돌 받침은 다른 석탑에서는 볼 수 없는 이 석탑만의 특징이다. 상륜부(相輪部)는 현재 하나도 남아 있지 않다.


이 석탑은 받침돌이 넓고 큰 데에 반해, 몸돌과 지붕돌은 낮고 작은 편이다. 다만, 1층 몸돌을 높게 하여 비례의 불균형을 보충하면서 오히려 안정감을 준다. 건립 시기는 지상에 드러난 받침 부분의 구성 방식이나 굄돌에 조각된 앙련과 삽입 방식 등 세부 수법으로 보아 고려 중기로 추정된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자료*


 
춘천칠층석탑(春川七層石塔)


보물 제77호 
강원 춘천시 소양로2가 162-2 


춘천 시가지 중심에 자리잡고 있는 탑이다.


조선 인조 때 이곳의 현감이었던 유정립이 인조반정으로 파직당하고 낙향하여 이 탑 부근에 집을 세우려고 터를 닦다가 ‘충원사(忠圓寺)’라는 글이 새겨진 그릇을 발견하였는데, 그 후부터 충원사 내에 속하였던 것이 아닐까 추측된다. 한국전쟁 때 심한 손상을 입어 보존 상태가 좋지 않은 데다 기단의 일부가 지하에 파묻혀 있었는데, 지난 2000년에 시행된 전면적인 보수공사로 기단부의 제 모습을 찾게 되었다. 이 석탑은 아랫부분을 발굴 조사한 결과 2층기단 위에 7층의 탑신이 놓여진 것으로 확인되었다.


탑의 받침대 역할을 하는 윗층 기단도 탑몸돌에 비하여 제법 넓어 안정감이 있으며, 맨윗돌에는 연꽃무늬를 새긴 널판돌을 놓아 1층 탑몸돌을 괴고 있다. 7층에 이르는 탑신(塔身)은 위로 올라가면서 그 크기가 적당히 줄고 있는데, 기단이 넓은 것에 비해 몸돌이 작아 주목되지만 7층이나 되는 높이가 비례의 불균형을 보충하여 오히려 안정감을 준다. 느린 경사가 흐르는 지붕돌은 밑면의 받침이 1∼3층까지가 6단이고 4층 이상은 5단을 이루고 있으며, 네 귀퉁이가 살짝 들려있어 경쾌하다.


전체적인 모습으로 보아 고려 중기 즈음에 만들어진 것으로 보인다. 꼭대기의 머리장식이 모두 없어진 상태여서 아쉬움을 주고 있고, 지붕돌의 네 귀퉁이가 거의 파손된 상태이다. 
*문화재청자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