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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처럼 떠나다

원주 법천사지(原州法泉寺址).강원 원주 본문

☆~ 절집.절터/강 원

원주 법천사지(原州法泉寺址).강원 원주

푸른새벽* 2023. 10. 20. 22:15

 

 

 

 

 

 

 

 

 

 

 

 

 

 

 

 

 

 

 

 

 

 

 

 

 

 

원주 법천사지(原州法泉寺址) 

문막에서 599번 지방도로를 따라 약 17.5km쯤 가면 부론면 법천리가 자리잡고 있다.충주에서 내려온 남한강 줄기가 부론면 앞으로 흐르는데,그 남한강 무이 섬강과 합쳐져 여주로 흘러든다.

진리(法)가 샘물처럼 솟는다는 법천사(法泉寺).지금은 너른 절터에 마을이 들어서 있는데,마을입구에서부터 한 두채 폐가(廢家)된 농가가 있어 심란하다.폐가와 폐사의 운명이 같은 무게로 스산하게 다가오는 것이다.

폐가를 지나 마을로 들어서면 넓은 밭을 지나 저만치서 당당하게 우뚝 서 있는 당간지주가 시야에 들어온다.일단 당간지주를 뒤에 두고 왼쪽으로 꺾어 들어 야산 기슭으로 오르면 화려하기 이를 데 없는 지광국사 탑비가 힘차게 우뚝 서 있고,조각난 석물들이 옹기종기 모여 있다. 저 아래 당간지주와 마주보이는 곳이다.

현재 너른 밭을 중심에 두고 외곽으로 자리잡고 있는 마을 전체가 절터였다고 한다.마을 이름이 옛 법천사에서 유래됐을 만큼 거찰이었을 것이나 발굴조사가 안 돼 절의 규모는 짐작조차 할 수 없다.다만 당간지주가 서 있는 위차나 부도전(탑전리)으로 추정되는 건물터가 북쪽 산기슭에 있는 것으로 보아 매우 너른 절터였으리라 짐작해볼 뿐이다.

법천사는 통일신라 성덕왕 24년(725)에 창건되어 법고사(法皐寺)로 불리던 절이었다.지광국사(984~1067)가 출가하고 열반에 든 이 절이 언제 법천사로 절 이름이 바뀌었는지는 기록에 없다.다만 큰 그릇임에 확실했던 수몽(水夢,지광국사의 어릴 적 속명)이 법고사에 주석하던 관웅대사(觀雄大師)를 찾아왔을 때까지는 법고사였다.

당대의 정신적 지주였던 고승 지광국사가 이곳에 머문 흔적은 그리 많지 않다.관웅대사를 찾아와 수학하던 수몽은 곧 해린(海鱗)이라느 법호르 받고 관웅대사를 따라 개성 해안사(海安寺)로 떠났으며,해안사에서 스님이 된다.

용흥사 관단(官壇)에서 구족계를 받은 지광국사는 나이 21세 때 대선(大選)에 급제하면서 크게 주목받기 시작,대덕(大德)이 되어 27세 때 법천사로 돌아온다. 이후 목정.현종.덕종.정종.문종으로이어지는 다섯 왕을 거치는 사이 지광국사는 무려 열두 차례에 걸쳐 법호와 법계를 추증받으며 부처님에 버금가는 예우를 받는다.

지광국사는 숭교사(崇敎寺)와 현화사(玄化寺)주지로 머물기를 수년,하지만 법천사로 돌아와 머물렀다는 흔적이 없다.아마도 전통적인 승가의 예대로 처음 출가했던 절이라 자주 내왕이 있지 않았을까 여거진다.이때 법천사는 당대 최고의 절로 확장되며 대찰의 면모를 갖추었을 것이다.

조선 초기 유방선이 이곳에 머물면서 유교의 강학(講學)을 하였는데 이때 배운 제자가 한명회.강효문.서거정.권람 등이었다.그 뒤 법천사의 역사는 전해지지 않고,다만 임진왜란 때 전소된 뒤 중창하지 못해 폐사가 되었다고 한다.

고려 사회에서 가장 존경받고 신뢰받던 지광국사의 화려했던 자취는 다만 이곳 폐사터에 남아 있는 빼어난 솜씨의 탑비와 국립중앙박물관 뜰에 놓여 있는 사리탑이 말해줄 뿐이다.

현재 절터에서 볼 수 있는 것은 힘찬 당간지주 한 쌍과,북쪽 산기슭에 놓여 있는 지광국사 탑비,그 주변에 깨어진 채 모아져 있는 부처 머리와 광배,연화문 대석,용머리,어디에 쓰였는지 모를 특출한 석조물들이다.절터에 흩어져 있던 것을 이곳에 모아놓은 것이다.또한 마을 집집의 담장이나 축대에서 절터에 쓰였을 석재들을 발견할 수 있고,밭에는 기와조각이나 도자기 파편들이 널려 있음을 볼 수 있다.

옛날에는 법천사에서 퍼져나간 향나무가 마을에 그득했다는데,지금은 찾아볼 수 없다.2001년에 시작된 법천사지 발굴조사는 2010년까지 게속될 예정이라고 한다.
*한국문화유산답사회 지음 '답사여행의 길잡이'중에서*

 

  
원주 법천사지(原州法泉寺址) 

사적 제466호 
강원 원주시 부론면 법천리 629 외  

『고려사』, 『신증동국여지승람』, 『동문선』 등 문헌에 전하는 법천사(法泉寺)는 신라말에 산지 가람으로 세워져 고려시대에 이르러 대대적으로 중창된 사찰이다. 특히 화엄종과 더불어 고려시대 양대 종단이었던 법상종의 고승 정현이 주지로 있어 법상종 사찰로 번성하였으며, 국사(國師)였던 지광국사 해린이 왕실의 비호하에 법천사로 은퇴하면서 크게 융성하였다가 조선 임진왜란 때 전소되었다. 

법천사에는 우리나라 묘탑 가운데 최대의 걸작으로 평가되는 지광국사현묘탑(智光國師玄妙塔, 국보 제101호)과 탑비(塔碑, 국보 제59호)가 문종에 의해 세워졌는데, 그 중 탑은 일제에 의해 경복궁으로 옮겨져 있으며, 법천사지에는 탑비를 비롯하여 지광국사현묘탑지와 부도전지, 당간지주 등이 남아 있다.         (현재는 원주 법천사지유적관에 해체 전시중이다)

2001년부터 2004년에 걸쳐 실시한 4차례의 시·발굴조사 결과 통일신라시대부터 조선시대에 이르는 다양한 시기의 건물지 19동과 우물지 3개소, 석축 및 담장유구, 계단지를 비롯하여 금동불입상, 연화대석, 각종 기와류 및 자기류 등의 유물이 확인되어 우리나라 불교사 연구에 귀중한 유적으로 평가된다. 
*문화재청자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