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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천 조계산 송광사(曹溪山 松廣寺).전남 순천 본문

☆~ 절집.절터/전 남

순천 조계산 송광사(曹溪山 松廣寺).전남 순천

푸른새벽* 2006. 8. 4. 22:32

 



 







 




 




 

 




 




 


 




 




 

 







 

 







 




 

 




 







 

 




 

조계산 송광사(曹溪山 松廣寺)

 

전남 순천시 송광면 신평리 12


조계산의 서쪽 기슭에 자리잡은 송광사(松廣寺)는 절집의 '큰집'이라 할 만하다.무엇보다 송광사를  '큰집'답게 하는 것은 송광사가 지니고 있는 우리 불교계의 가장 큰 종단인 조계종의 근본 도량이자 승보사찰 이라는 명예이다.


승보사찰은 불교 교단을 이루는 세 가지 요소인 불(不).법(法).승(僧) 가운데 승,곧 훌륭한 스님이 많이 배출된 사찰을 말한다.송광사는 보조국사 지눌(普照國師 知訥.1158~1210)을 비롯하여 조선 초기 고봉국사까지 열여섯 분의 국사(國師)를 배출하였다.국사는 나라가 인정하는 최고의 승직으로 시대를 대표하는 승려를 일컫는데 그런 국사가 한 절에서 열여섯 분이나 배출되었으니 세세손손 절의 자긍심이 될 만하지 않겠는가.


본래 송광사는 신라 말 혜린선사에 의해 창건된 길상사(吉祥寺)라는 자그마한 절이었다.이 길상사가 큰절로서 규모를 갖추고 새 불교사상의 중심지로 이름을 얻은 때는 보조국사가 절의 면모를 일신하고 정혜결사(定慧結社)의 중심지로 삼은 고려 명종 27년(1197)부터 희종 원년(1205)에 이르는 시기이다.


정혜결사란 고려 후기 불교계가 밖으로는 정치와 지나치게 밀착하여 순수성을 잃어버리고 안으로는 교(敎)와 선(禪)의 대립으로 혼탁해지자
보조국사를 중심으로 기존 불교계를 반성하고자 펼친 수행운동을 말한다.보조국사 이후 참선과 지혜를 함께 닦는 정혜쌍수(定慧雙修)라는 수행기풍은 조선 오백년을 거쳐 오늘날까지 우리 불교의 사상적 기둥을 이루고 있다.


보조국사는 정혜결사의 중심지로 삼은 이 절의 이름을 정혜사(定慧社)로 바꾸고자 했지만 가까운 곳에 이미 같은 이름을 가진 사찰이 있어 수선사(修禪社)로 바꾸었다.수선사라는 이름은 '깨달음(悟)'은 혜(慧)이고 닦음(修)은 정(定)이므로 정혜(定慧)를 아우르는 것이 선(禪)이 된다'는 뜻을 드러내며, 정혜결사의 의지를 담고 있다.즉위 전부터 보조국사를 매우 존경한 희종이 길상사의 이름을 수선사로 고치도록 친히 글을 써주었다고도 전한다.이후 조선 초기에 이르면 수선사라는 절 이름은 송광사라고 바뀐다.송광사라는 이름은 조선 초기 소나무가 많아 '솔뫼'라고도 불리던 송광산의 이름에서 따왔는데 절 이름의 실마리를 제공했던 송광산은 도리어 조계산으로 바뀌었다.


송광사라는 이름에는 다음과 같은 재미있는 이야기가 전한다.송광의 송(松)을 파자(破字)하면 '十八公'이고 광(廣)은 불법을 널리 펼친다는 뜻이니 어른 열여덟 분이 배출될 것이라는 뜻을 담고 있다고 한다.이름 풀이대로라면 16국사 이후 국사에 해당할 만한 큰스님 두 분이 더 배출되지 않을까 싶다.16국사의 영전을 모셨던 국사전의 내벽이 18칸인 것도 그런 상상을 현실감 있게 만든다.


송광사는 보조국사 이후 2대 국사인 진각국사와 조선 왕조가 성립된 직후의 16대 고봉국사에 의해 각각 크게 중창되었으나 정유재란으로 절이 크게 불타고 승려들이 쫓겨나는 수난을 겪었다.이후 인적이 끊겨 폐사 지경에 이르렀는데 임진왜란 전후에 서산대사와 쌍벽을 이룰 만큼 법명이 높았던 부휴대사(浮休大師.1543~1615)가 들어와 송광사의 명맥을 다시 이었다.이후 송광사는 헌종 8년(1842)에 큰 불을 만났으며 그 이듬해부터 철종 7년(1856)까지 다시 크게 중창되었다.현대에 들어와서는 한국전쟁을 거치면서 크게 파손되었다가 조금씩 복구 중창되었으며 근래에는 대웅보전을 새로 짓는 등 대규모 불사가 있었다.


현재 송광사는 건물 50여 동의 사찰로서 작지 않은 규모이지만,이미 고려 명종 때부터 건물 80여 동을 갖춘 대가람이었고,한국전쟁 이전만 해도 그 규모가 유지되고 있었다고 한다.이처럼 건물이 많았기에 송광사에는,비가 오는 날에도 비를 맞지 않고 자유롭게 경내를 오갈 수 있었다는 이야기가 전해온다.


이처럼 송광사는 사격(寺格)이나 규모면에서 우리 불교계에 뚜렷한 족적을 남기고 있다.
*한국문화유산답사회 지음 '답사여행의 길잡이'중에서*

 

*2006년 8월 3일에 가 본 송광사는

스님들이 하안거 중이라 닫아 놓은 곳이 많았다

 

고즈넉하고 아름다운 대나무 숲길도 보지 못했고

너무도 뜨거운 날씨 탓에

가까운 곳의 암자에 있는 쌍향수도 보지 못하고 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