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리 메뉴

바람처럼 떠나다

논산 개태사석조삼존불입상(開泰寺石造三尊佛立像).충남 논산 본문

☆~ 풍경소리/충 남

논산 개태사석조삼존불입상(開泰寺石造三尊佛立像).충남 논산

푸른새벽* 2007. 12. 14. 23:35

 

 

 

 

 

 

 

 

 

 

 

 

개태사석조삼존불입상(開泰寺石造三尊佛立像)


개태사 절 문으로 들어서면 왼편 오층석탑 뒤쪽의 대웅전 안에 모셔져 있다


조선 시대에 폐사로 되어 있는 동안
가운데부처님은 뒤로 도랑에 넘어져 나가 허리가 엇끊어져 있고
보살들은 앞으로 엎어져 목이 떨어져 나가 있었다고 하는데 지금도 몸체에 그 잘라졌던 흔적이 보인다
본존의 높이는 4.15m,왼쪽 협시보살상은 3.53m,오른쪽 협시보살상은 3.46m이다
지금은 없어져 버렸지만 광배가 있었을 터이고 그 높이를 추산해 보면 5m가까운 장륙상이었을 듯하다
개태사 창건 당시인 936년에 조성된 것으로 보물 제219호이다


이 부처들은 한눈에도 체구가 매우 건장하다는 느낌을 주는데
어깨보다도 발목 부근이 더 넓어 매우 든든하게 서 있는 모습이다
편편하고 넓은 얼굴이나 가슴께로 들어올린 손이 마치 권투장갑을 낀 것처럼 매우 커서
그런 느낌을 한층 북돋운다
시무외인을 한 손은 후대에 보수로 한층 도식적으로 되었다
왼쪽 협시보살상은 머리 부분이 나중에 보수하여 붙인 것이기도 하지만
삼존불 모두가 표정도 매우 굳어 있어 인자하고 자비한 부처님의 모습을 기대하기는 어렵다
뒤쪽으로 돌아가서 자세히 보면 연꽃대좌나 협시보살의 영락장식 조각들은 매우 화려한데도
이 삼존불이 갑옷과 투구를 갖춰 입은 무사와 같다는 느낌을 주는 것은
그런 인상이 너무나 강하기 때문일 듯하다


이는 아마도 왕건이 개태사를 창건한 동기가
후백제 유민을 달래고 살육한 병사들의 원혼을 위무한다는 표면적인 것보다는 실상은 고려조의 권위와
무엇보다도 힘을 과시하려는 의도가 아니었나 하는 생각을 떨칠 수 없게 하는 모습이라 하겠다


한편으로 표정이 굳고,얼굴형이 삼각형이며 코가 작고 입이 빈약한 점 등,
사실성보다는 도안적 성격이 강한 얼굴은,
친근감이 도는 삼국 시대 불상이나 사실성이 강한 통일신라 전성기의 불상과는 다른,
신라 말 고려 초기 불상의 특징이기도 하다
또 고려 시대에는 지방적 양식을 띤 불상이 많이 조성되었는데
이 개태사 삼존불처럼 몸통이 거의 원통형의 체구를 이루어 괴량감을 주는 것이 많다
*한국문화유산답사회 지음 '답사여행의 길잡이'중에서*

 

개태사지석불입상(開泰寺址石佛立像)


보물 제219호 
충남 논산시 연산면 천호리 108 


개태사는 고려 태조가 후백제와 최후의 결전을 벌인 후 이를 기념하기 위해서 태조 19년(936) 격전지에다 세운 사찰이다. 이 삼존석불

은 그 당시에 만들어진 것으로 추정된다.


중앙의 본존불은 민머리에 얼굴이 둥글지만 평면적이고 귀는 길게 늘어졌다. 어깨와 가슴은 투박하게 만들었으며, 오른손은 가슴에 들

고 왼손은 배에 대어 무엇을 잡은 것처럼 만들었는데 지나치게 둔중하다.


왼쪽의 보살상은 머리 부분이 없어진 것을 복원한 것이다. 본존불보다 조각이 화려하고 섬세한 편으로, 어깨와 가슴이 좀더 부드럽고,

팔찌와 천의(天衣)자락에 장식무늬가 표현되어 있다. 오른쪽의 보살상은 왼쪽의 보살상과 거의 같은 수법으로 얼굴이 역사다리꼴이고,

목에는 두터운 삼도(三道)가 있다.


단정하면서도 통통한 몸집, 큼직한 두 손과 부피감 있는 팔, 다소 두꺼워진 천의와 선으로 새긴 옷주름 등은 통일신라보다 진전된 고

려 초기의 새로운 양식적 특징을 잘 보여주는 것이다. 후삼국 통일을 기념하여 만든 작품이며, 고려 초기 지방 석불상으로는 우수한

작품에 속하고 있어서 그 가치가 높이 평가된다. 
*문화재청자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