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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처럼 떠나다

금정산 범어사(金井山 梵魚寺).부산 광역시 동래 본문

☆~ 절집.절터/부산광역시

금정산 범어사(金井山 梵魚寺).부산 광역시 동래

푸른새벽* 2008. 5. 12. 18:02

 




 




 

 




 



 

 




 




 




 




 




 




 







 

 

금정산 범어사(金井山 梵魚寺)


금정산에는 부산에서 가장 오랜 역사를 가진 절집 범어사가 있다
『범어사 사적』에는 의상대사가 범어사를 창건한 이야기가 이렇게 적혀 있다
요약을 하면 다음과 같다
신라 흥덕왕 10년(835) 동쪽 해안에 왜구가 10만 병선을 거느리고 나타나 위협하였다
그때 왕의 꿈에 신인(神人)이 나타나"의상대사로 하여금 금정산에 가 기도토록 하면 왜구가 물러날 것이다" 라는 전언을 하는 고로
그대로 했더니 과연 왜구가 물러났으며 이를 기리기 위해 범어사를 창건하였다는 것이다
그러나 702년에 입적한 의상대사가 130여 년이나 뒤인 835년에 다시 나타나 절을 지을 수 있을까?
비록 앞뒤가 맞지 않는 얘기지만 어떤 방식으로든 범어사가 의상대사와 인연이 있는 것만은 틀림없을 듯하다
간략하지만 『삼국유사』에도
"금정산 범어사는 의상대사가 창건한 신라의 화엄십찰(華嚴十刹)의 하나"라는 기록이 있기 때문이다


이런 기록들로 미루어본다면

범어사는 의상대사가 당나라에서 귀국한 뒤인 문무왕 18년(678)에 창건돼 흥덕왕 10년(835)에 더 크게 지어진 것이라는 추정이 가능하다
이후 범어사의 역사로 전하는 것은 범어사가 임진왜란을 맞아 잿더미가 돼버린다는 것이다
그리고 다시 일어선 것이 선조 35년(1692).
그런데 얼마 지나지 않아 불타버리는 까닭에 광해군 5년(1613)에 또다시 세웠다고 한다
지금 만나는 범어사는 이 이후로 다시 고쳐짓기를 되풀이하면서 오늘에 이른 모습이다


창건 유래에서도 얼핏 짐작되지만 범어사는 창건 이후로도 부산으로 침입해온 왜구를 진압하는데 큰 역할을 해왔다
임진왜란 때는 서산대사가 범어사를 사령부로 삼아 승병활동을 하였다
또,일제강점기에 범어사에서 공부하던 학생들이 만해 한용운과 함께 '범어사 학림의거'라는 독립만세운동을 했던 일은 꽤 유명하다
전국에서 쓸 태극기를 모두 이곳에서 만들었다는 이야기도 전한다


범어사 당간지주가 있는 곳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에 범어사 일주문이 있다
범어사 내 여러 건물 가운데 가장 유명한 건물이다
여느 일주문과는 달리 생김새부터 독특하다
우선 어른 둘이 팔을 벌려 마주잡아야 할 만큼 굵은 돌기둥 넷이 일직선상에 나란히 서고 그 위에 다시 짧은 나무기둥을 얹었다
그 위에 창방과 평방 그리고 공포를 짜올린 뒤 맞배지붕을 덮은 간략한 모습이다
전통 건물에서는 흔히 주춧돌이 낮고 그 위에 놓이는 나무기둥이 길었던 것에 비해
주춧돌이 길어지고 나무기둥이 짧아진 것이라 하면 그 기이한 형태의 발상을 이해 못 할 것도 없지만
그렇더라도 범어사 일주문의 기둥은 매우 독창적이다
또한 길어진 주춧돌 위에 짧은 나무기둥을 얹었을 뿐 둘을 연결하기 위한 별다른 장치를 한 것도 아닌데
그러고도 무너지지 않은 채 오랜 세월 의젓함을 잃지 않은 것을 생각하면 여간 대견한 건축술이 아닐 수 없다


눈여겨보면,주춧돌은 지상에서 1.45m 정도 높이까지 배흘림이 되도록 깎아 냈으며
그 위에 세운 나무기둥의 짧은 길이는 화려한 다포로 짜인 무거운 지붕을 안정적으로 받치기 위해 배려된 것임을 눈치챌 수 있다
각 기둥을 이루는 칸은 일정하고,공포는 기둥과 기둥 사이에 하나씩만을 추가하여 화려함 속에서도 안정되고 단정한 느낌을 풍긴다
지붕은 겹처마 맞배지붕이며,옆에는 창방과 평방의 뺄목을 가리기 위한 풍판을 달았다


일주문이 처음 건립된 것으 광해군 6년(1614)이며,숙종 44년(1718)에 돌기둥으로 개조한 뒤 정조 5년(1781)에 다시 세웠다고 한다
그러니까 현재 일주문의 돌기둥은 1718년에 세워진 그대로인 셈이다
어칸에 '曺溪門(조계문)'이란 편액이,그리고 좌우에 '金井山 梵魚寺'와 '禪刹大本山'이란 편액을 두어서
일주문의 이름과 사찰의 이름 및 성격을 밝히고 있다
의상대사가 창건할 당시에는 화엄사찰로 출발했지만,지금은 선종사찰이 되었음을 알 수 있다


그렇더라도 범어사는 화엄사찰에서 공통적으로 드러나는 가람배치의 기본 정신을 여전히 간직하고 있다
일주문에서부터 일직선상으로 천왕문과 불이문.보제루.대웅전이 일정한 간격을 두고 계단으로 높이를 높여가고 있는데
이는 화엄십찰 가운데 큰절인 해인사.화엄사.부석사도 마찬가지로 나타나는 가람의 방식이다
현실세계에 사는 사람들은 일주문에서부터 일직선상으로 수많은 계단을 거쳐야

불국의 주인인 석가모니불을 모신 세계에 다다를 수 있는 것이다


일주문에서부터 천왕문과 불이문이 일직선상에 놓였다고 하지만,
실제로는 일주문一천왕문一불이문이 만드는 진입축은 각 구간이 약간씩 꺾여 있다
이렇게 함으로써 부처님의 세계로 가는 더욱 깊어지는 효과가 생겨난다
일주문에서 천왕문,불이문,보제루로 오르면서 각각의 문 앞에서 뒤를 돌아보면 그 효과가 훨씬 강하게 느껴진다
그러고 보니 천왕문에서부터 보제루에 이르기까지는 양옆에 낮은 담이 쌓여 있다
이 담이 없었더라면 이렇듯 고요함과 동시에 부처님의 세계로 몰입하는 듯 집중감을 가질 수 있었을까
게다가 일주문一천왕문一불이문一을 거쳐 보제루에 이르는 공간은 진입할수록 경사가 가파르고 계단이 많아진다
상승감이 강조되는 것이다
결코 길지 않은 범어사의 진입 공간에서 시간이 지체되는 이유이다


천왕문은 정면 3칸 측면 2칸의 맞배지붕집이며,정면 어칸은 통로가 되게 꾸며졌다
내부에는 사천왕상을 모시고 있다
불이문은 정면 2칸 측면 1칸의 맞배지붕집으로,세 칸 모두 문을 달았다
기둥 위 공포와 공포 사이를 장식한 화반이 눈길을 끈다


불이문을 통과하면 하단 구역은 여기서 마무리되고,정면으로 보제루가 가로막고 나선다
가파른 경사 위에 높직한 계단을 올라 닿게 되는데 이름으로는 누각이어야 마땅하지만
실제로는 정면 5칸 측면 3칸의 매우 큰 팔작지붕집이다
보제루를 통과하는 게 아니라 옆으로 돌아들어야 경내로 들어가게 된다
보제루와 오른쪽의 종루 사이로 보제루를 돌아들면 하단 구역에서 수직 상승해 이동해오던 분위기와 달리 너른 마당이 공간감 있게 확대된다
중단 구역이면서 대웅전 앞마당이 되는 셈이다
대웅전은 이 마당에 보제루와 서로 같은 눈높이에서 마주보는 것이 아니라 다시 높직한 축대 위에 올라서서 경내를 굽어보는 모습이다
이 마당을 중심으로 중단 구역이 펼쳐지는데 대웅전을 바라본 상태에서 왼쪽이 심검당,오른쪽이 차례로 미륵전과 비로전이다
이 건물들 뒤쪽으로도 많은 건물이 있는데,일반인에게는 공개되지 않는 선원 구역이다


미륵전은 창건 당시에는 2층의 건물로,주불전으로 모셔질 만큼 중요한 불전이었다고 한다
정면 3칸 측면 2칸의 맞배지붕집인 현재의 건물은 18890년에 건립되었다
내부에는 목조미륵불상을 모시고 있다
미륵전과 나란히 서 있는 비로전은 정면 3칸 측면 3칸의 맞배지붕집으로 내부에는 비로자나삼존불상을 모시고 있다
창건 당시 미륵전 서쪽에 3칸 건물로 건립되었다고 하며,숙종 9년(1683)과 경종 원년(1721)에 다시 지었다는 기록이 있다
실제로는 1721년 이후로도 몇 차례의 중건이 있었을 터이다
종루는 원래 심검당 옆에 있던 것을 일제강점기 초기에 지금의 자리에 옮겨 세운 것이라 한다


한편 중단 영역의 마당에는 미륵전 앞쪽에 삼층석탑이,심검당 앞쪽에 석등이 놓여 있다
삼층석탑은 높지 않은 상하 이층의 기단 그리고 그 위에 역시 그만그만한 탑신 3층을 올려 4m 정도로 쌓은 작은 규모의 석탑이다
상하 기단에 버팀기둥이나 귀기둥을 장식하지 않은 채 안상을 조각한 것이 매우 이채롭다
안상은 하층기단에는 각 면에 세 개씩,상층기단에는 각 면에 큼지막하게 하나씩을 조각했다
탑신부의 몸돌은 이렇다 할 특징이 없이 귀기둥으로 장식된 평범한 모습이다
2,3층 몸돌이 1층 몸돌에 비해 급격히 줄어들고 있어 균형감이 깨져 있다
평평하고 얇은 지붕돌은 경쾌하나,지붕돌 받침은 4단이다
얼핏 기단이 3층인가 하는 오해가 생길 만큼 상하 기단을 받치고 있는 높직한 석단은 일제강점기에 탑을 보수하면서 설치한 것이라고 한다
상륜부에는 노반이 남아 있는데 뒤집어져 있는 상태이고 그 위에 보주가 놓여 있다
현재 보물 제250호로 지정돼 있다


석등은 본래 미륵전 앞에 있던 것인데,일제강점기에 종루가 심검당 옆에서 지금의 자리로 옮겨질 때 현 위치로 옮겨졌다
삼층석탑과 같이 9세기 무렵에 건립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앙련과 복련으로 장식된 하대석과 상대석 사이에 팔각 간주석이 끼이고 그 위에 화사석과 지붕돌을 얹고 있는 전형적인 팔각석등이다
하대석 아랫부분으 흙에 덮여 있어 알 수 없으나 본래 지대석이 없었다고 한다
팔각으로 된 화사석은 서로 마주보는 네 면에 화창을 내었는데 화창 가장자리에는 창을 달았던 듯 10개의 작은 구멍이 나 있다
화사석과 지붕돌에 비해 기둥 부분이 약해 보인다


삼층석탑과 석등 사이로 넓고 높직하여 권위적으로 느껴지는 계단을 오르면 이제 범어사의 중심건물인 대웅전이 있는 상단 영역이다
종축을 따라 수직적인 느낌이 강조되었던 하단 구역,
종축의 연장선상에 있지만 마당 주위를 법당들이 에워싸고 있어 공간감이 느껴지던 중단 구역에 비해
상단 구역은 갑작스러울 만치 횡적으로 변모하는 드라마를 펼친다
대웅전을 바라보고 오른쪽에서부터 일로향각.관음전.대웅전.지장전.산령각.팔상독성나한삼전 등이
일직선은 아니지만 상단 영역에 一자형으로 늘어서 있다


이 가운데 단연 돋보이는 건물은 대웅전이다
지금의 건물은 광해군 6년(1614)에 건립되고 숙종 39년(1713)에 중건되었다
정면 3칸 측면 3칸의 장방형 건물에 다포식으로 공포를 올려 놓고 팔작지붕이 아닌 맞배지붕을 얹고 있다
돌기둥 같은 주위의 높직한 주춧돌 위에 나무기둥을 올린 앞면 귀기둥의 모습이 일주문의 기둥을 세웠던 방식과 같은 맥락이다
그러고 보니,보제루 역시 양쪽 귀기둥이 대웅전이나 일주문과 다르지 않다


중단 영역과 대웅전을 연결하는 계단은 본래 한 칸이었으나 후에 증축하여 세 칸을 만들었다
계단 가운데 소맷돌 아랫부분에 一자 눈썹에 귀가 앞으로 쏠려 마치 투구를 쓴 것같이 우스꽝스럽게 생긴 사자가 있어 눈길을 끈다
대웅전의 기단과 계단 역시 창건 당시의 모습 그대로인 듯,고졸하면서도 멋스러운 장식이 세월을 견디고 있다
기단면석 곳곳에 장식된 꽃하며 정면 가운데 소맷돌에 가지 굽은 꽃을 장식한 모습이 통도사 대웅전을 떠올리게 한다


대웅전은 규모가 그리 큰 편은 아니지만 아담하고,기둥 위에 짜올린 공포가 화려하진 않지만 당차 보이는 면이 있다
정면의 창호는 어칸을 넓게 잡아서 사분합 빗살문을,좌우 협칸은 같은 방식의 삼분합문을 단정하게 달았다
측면은 공포 없이 고주를 세워 지붕을 받치고 있으며,풍판으로 마감했다


범어사 대웅보전은 보물 제434호로 지정돼 있다


대웅전 오른쪽의 건물은 관음전이다
정면 5칸 측면 3칸에 주심포식으로 공포를 짜올린 맞배지붕집인데 규모에 비해 장식이 과다한 면이 있다
초창연대는 확인할 수 없으나 광해군 5년(1613)과 경종 원년(1721)에 중건 기록이 있다
그러나 현재의 건물은 1721년 이후 조선 후기에 크게 개조되었을 것으로 여겨진다
추녀와 용 마루를 장식한 망와와 용의 꼬리가 이색적이다


대웅전의 왼쪽 지장전 역시 대웅전과 마찬가지로 다포식으로 공포를 짜올렸으면서도 지붕은 맞배지붕을 택하고 있다
1988년 화재를 당해 소실된 뒤 최근 정면 3칸 측면 3칸 규모로 다시 지어졌다


상단 영역에서 대웅전만큼이나 관심 집중 대상인 법당은 팔상독성나한삼전이다
대웅전에 가까운 쪽부터 나한전.독성전.팔상전,이렇게 세 법당을 한채에 연이어 붙인 것이 매우 독특하다
정면 7칸 측면 3칸이며,좌우 팔상전과 나한전이 3칸,가운데 1칸이 독성전이다


독성전의 앞모습이 아취형인 점도 눈길을 끈다
아취형 문틀 옆에는 남녀 한 쌍의 나뭇조각이 세워져 있다
강화도 전등사 대웅전의 나녀들 같은 전설이 전할 법도 한데 어떤 사연으로 이곳에 조각돼 있는지는 알 수 없다
정작 독성전의 창문은 아취형 문틀 뒤쪽에 한 발짝 물러나 있는데 화려한 꽃창살에 여간 정성을 들인 것이 아니다
창살 장식에 들인 공은 팔상전이나 나한전에도 마찬가지다
각각 좌우 칸은 이분합 빗살문,어칸은 삼분합 빗살문을 달았는데

가운데만은 팔상전이 단아한 꽃교살문을,나한전은 변형된 빗살문으로 모양을 냈다
팔상전에는 목조석가모니삼존불상과 팔상탱화를,독성전에는 나반존자를,나한전에는 소조석가모니삼존불상과 16나한상을 모시고 있다
기록에는 광해군 5년에 나한전을 창건하고 숙종 31년(1705)에 팔상전을 중건했다 하므로
원래 이들 세 건물은 별도로 지어졌던 것임을 짐작할 수 있는데 막상 이 건물이 언제부터 현재의 모습으로 지어졌는지는 확실치 않다
1905년 팔상독성나한삼전을 중건했다는 기록이 있는 것을 보면 그리 오래 전에 지어진 것도 아닐 터이다
높직한 석축 위에 다시 기단을 쌓아올린 건물이기에 범어사에서는 가장 높은 전망대가 되는 셈인데
팔상독성나한삼전 앞에서 경내 법당들의 지붕 선들이 이뤄내는 차분함과 안정감은 가장 범어사다운,범어사만의 모습이 아닐까 싶다
*한국문화유산답사회 지음 '답사여행의 길잡이'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