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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동 쌍계사진감선사대공탑비雙磎寺眞鑑禪師大空塔碑.경남 하동 본문

☆~ 풍경소리/경 남

하동 쌍계사진감선사대공탑비雙磎寺眞鑑禪師大空塔碑.경남 하동

푸른새벽* 2009. 3. 30. 14:40

 

 

 

 

 

 

 

 

 

 

 

 

 

 

 

 

 

 

 

 

 

 

 

 

 

 

 

 

 

 

 

 

 

 

 

 

 

 

 

 

 

 

 

 

 

 

 

 

 

 

 

 

 

 

 

 

 

 

 

 

 

 

 

 

 

 

 

 

 

 

 

 

 

 

 

 

 

 

 쌍계사진감선사부도비(雙磎寺眞鑑禪師大空塔碑)

 

신라 말의  명승 진감선사는 전주 금마(지금의 익산)사람으로 속성이 최씨이다.어머니 고씨가 "제가 어머니의 아들이 되기를 원합니다"라고 말한 뒤 사라진 스님 꿈을 꾼 뒤에 태어났다고 한다.그는 태어나면서 울지도 않았다는데 사람들은 '일찍부터 소리 없고 말없는 깊은 도의 싹을 타고 났다'고들 하였다

 

20세에 이르기까지 부모를 오랫동안 봉양할 뜻이 간절하였으나 상을 당하자 "길러준 부모 은혜는 힘으로 갚았으나 오묘한 도리는 어찌 마음으로 구하지 아니하랴.박과 오이가 덩굴에 매인 것처럼 내 어찌 젊은 나이에 한 구석에 박혀 있으리오" 하고는 애장왕 5년(804)에 세공사歲貢使 의 배에 의탁하여 당나라로 가 신감대사神鑑大師를 만나 계를 받았다

 

흥덕왕 5년(830)에 귀국하여 지리산 화개에 이르러 일찍이 삼법화상이 일구었던 옥천사를 중창하여 대가람을 이루었으며문성왕 12년(850) 77세를 일기로 입적하기까지 쌍계사에 머물렀다

 

그가 입적한 뒤 진성여왕 1년(887)에는 부도비,곧 대공탑비大空塔碑, 국보 제47호가 세워졌는데,현재 귀부.이수.비신이 완전히 남아 있으며 전체 높이가 3.63m에 달한다

 

신라 말기에 나타나는 부도비의 양식에 따라 귀부의 머리는 용머리로 만들어졌으며 생김이 부자연스럽고 목도 짧다.등에는 큼직한 육각 귀갑문을 둘렀고,네 발은 작은 편이다.등 중앙에 있는 비신받침은 높지 않고 측면에 구름무늬가 조각되었으며 윗면에는 비신을 받치는 굄이 조각되었다.비신은 검은 대리석이다

 

이수는 산山 모양으로 운룡문이 힘차게 조각되어 있으며 앞면 가운데에 제액이 있어 '해동고진감선사비海東故眞鑑禪師碑'라는 전서체 글씨가 쓰여 있다.이수 꼭대기는 앙화 위에 보주를 얹어 마무리하였다

 

비문은 고운 최치원이 글을 짓고 쓴 것으로 우리 나라 4대 금석문 가운데 으뜸으로 꼽히며 최치원의 사산비명四山碑銘 가운데 하나이다.모두 2417자의 해서체 글씨가 2cm정도의 크기로 한자 한자 짜임새 있게 새겨져 있는데 자字의 운과 율에도 고저장단이 화려하게 어우러져 신품神品이라 할 만큼 훌륭하다는 평을 받고 있다

 

현재 비신의 손상이 커서 보조 철틀로 겨우 모양이 유지되고 있으며 글씨의 마멸도 심해 육안으로 내용을 알 수 없을 지경이나 다행이 영조 1년(1725)에 전문을 목판에 옮겨 새긴 것이 보관돼 있다

 

진감선사의 일대기와 업적 등이 적혀 있는데,다음은 비문 가운데 쌍계사를 중창하는 대목이다

 

"드디어 기이한 지경을 두루 선택하여 남령南嶺의 산기슭을 얻으니 높고 시원함이 제일이었다.사찰을 창건하는 데 뒤로는 노을 진 언덕을 의지하고 앞으로는 구름이 이는 시내를 굽어보니 안계眼界를 맑게 하는 것은 강 건너 먼 산이요 귀를 서늘하게 하는 것은 돌 구멍에서 솟는 여울이다.더욱이 봄에 피는 시내의 꽃과 여름에 그늘지는 길 옆의 솔이며 구렁을 비추는 가을의 달과 봉우리를 덮는 겨울의 눈들이 사시 변하고 만상萬像이 빛을 번갈으며 백 가지 울림 소리가 어울려 읖조리고수천개의 바위들이 다투어 빼어났다.일찍이 서토西土(중국을 일컬음)에 놀던 자가 와서는 모두 보고 깜짝 놀라 이르기를 '혜원惠遠의 동림사東林寺(경치가 뛰어났던 중국의 절)를 바다 건너 옮겨 왔구나 .연화세계는 범인의 상상으로 비겨 볼 바 아니로되 항아리 속에 별천지가 있다더니 (한나라 비장방費長房이라는 사람이 신선을 따라 항아리 속에 들어갓더니 그 속에 금옥누각의 별천지가 있었다는 고사에서 인용) 정말인가 한다' 했다. 대竹로 홈을 만들어 시냇물을 끌어다가 축대에 돌아가며 사방으로 물을 대고 비로소 이름하여 옥천玉泉이라고 현판을 붙였다"

*한국문화유산답사회 지음 '답사여행의 길잡이'중에서*

 

쌍계사진감선사대공탑비(雙磎寺眞鑑禪師大空塔碑)


국보 제47호
경남 하동군 화개면 운수리 207 쌍계사


통일신라 후기의 유명한 승려인 진감선사의 탑비이다.


진감선사(774∼850)는 불교 음악인 범패를 도입하여 널리 대중화시킨 인물로,애장왕 5년(804)에 당나라에 유학하여 승려가 되었으며,흥덕왕 5년(830)에 귀국하여 높은 도덕과 법력으로 당시 왕들의 우러름을 받다가 77세의 나이로 이 곳 쌍계사에서 입적하였다.


비는 몸돌에 손상을 입긴 하였으나,아래로는 거북받침돌을, 위로는 머릿돌을 고루 갖추고 있는 모습이다.통일신라 후기의 탑비양식에 따라 거북받침돌은 머리가 용머리로 꾸며져 있으며,등에는 6각의 무늬가 가득 채워져 있다.등 중앙에는 비몸돌을 끼우도록 만든 비좌(碑座)가 큼지막하게 자리하고 있는데,옆의 4면마다 구름무늬가 새겨져 있다.직사각형의 몸돌은 여러 군데가 갈라져 있는 등 많이 손상된 상태이다.머릿돌에는 구슬을 두고 다투는 용의 모습이 힘차게 표현되어 있고,앞면 중앙에는 ‘해동고진감선사비’라는 비의 명칭이 새겨져 있다.꼭대기에는 솟은 연꽃무늬위로 구슬모양의 머리장식이 놓여 있다.


진성여왕 원년(887)에 세워진 것으로,그가 도를 닦던 옥천사를 ‘쌍계사’로 이름을 고친 후에 이 비를 세웠다 한다.당시의 대표적인 문인이었던 최치원이 비문을 짓고 글씨를 쓴 것으로 유명한데,특히 붓의 자연스런 흐름을 살려 생동감 있게 표현한 글씨는 최치원의 명성을 다시금 되새기게 할 만큼 뛰어나다.거의 온전한 모습을 간직하고 있으나,탑 전체가 많이 갈라지고 깨어져 있어 소중히 보존해야함을 절실히 느끼게 하는 귀중한 유물이다.
*문화재청자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