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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도 남도석성(南挑石城).전남 진도 본문

☆~ 풍경소리/전 남

진도 남도석성(南挑石城).전남 진도

푸른새벽* 2009. 8. 30. 14:35

 

 

 

 

 

 

 

 

 

 

 

 

 

 

 

 

 

 

 

 

 

 

 

 

 
남도석성(南挑石城)


사적 제127호
전남 진도군 임회면 남동리


진도에서 제주도 방면으로 이어지는 항로의 기점이 되는 임회면 남동리에 있는 석축 성으로, 본래는 둘레가 1,233척으로 성벽의 높이가 8척에 우물과 샘이 하나씩 있는 조선 시대 전라 우수영 관하의 수군의 진영이었다. 고려 원종 ?? 배중손(裵仲孫)이 삼별초를 이끌고 진도로 남하하여 대몽항쟁의 근거지로 삼으면서 쌓은 성이라고 전한다. 그러나 진도군에는 백제 시대에 이미 3개의 고을이 있었는데, 그 중에 진도군에 속한 것이 도산현(徒山縣:지금의 가흥(嘉興)과 매구리현(買九里縣:지금의 임회(臨淮)으로, 매구리현의 중심이 구도포(九桃浦)가 아니었나 생각된다. 이러한 고을들이 통일 신라를 거쳐 고려 시대까지 이어지고 있는 것으로 보면, 삼국 시대에 이미 축성되었을 가능성이 크다.


13세기초부터 창궐하기 시작한 왜구가 연해 지방을 노략질함으로써, 1350년(고려 충정왕2)에는 진도의 관부(官府)와 백성들이 세종 초까지 내륙지방으로 피하여 살다가 귀향하였다.남도포(南桃浦)에 만호영(萬戶榮)이 처음 생긴 것은 1438년(세종 20) 정월의 일로, 이로 미루어 보면 현존하는 성은 그 뒤에 쌓은 것으로 생각된다. 특히 남도포성은 동쪽에 있는 금갑보(金甲堡)와 더불어 명량(鳴梁)으로 돌아가는 바닷길의 요새에 위치하는데, 남해안에서 서해안으로 북상하는 위치에 해당된다. 그러므로 1555년(명종(明宗)10) 5월 서해안으로 약탈하려고 북상하던 왜적들에게 남도포와 금갑보가 분탕질 당한 경우도 있고, 또 이곳의 만호들에 의하여 격퇴되기도 하였다.


이러한 지형적 특수성으로 말미암아 1683(숙종肅宗9) 6월에는 육군의 진관체제(鎭管體制)와 같은 수군진관(水軍鎭管)의 첨사진(僉使鎭)을 현재 전라남도의 위도(蝟島)와 가리포(加里浦)에 두었는데, 남도포(南桃浦)는 가리포첨사에 딸린 수군만호의 근거지가 되었다. 1765년(영조(英祖)41)경에는 둘레 1,040척, 높이 12척, 치첩(雉堞)이 43개나 있었던 성이었다고 하나, 현재는 성지(城址)의 일부가 민가에 붙어 있고,

성문과 옹성 등이 조선 시대 수군 진영의 전형적인 진보(鎭堡) 성으로서의 특징을 간직하고 있다.
*문화재청자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