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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주 화암사극락전(花巖寺極樂殿).전북 완주 본문

☆~ 풍경소리/전 북

완주 화암사극락전(花巖寺極樂殿).전북 완주

푸른새벽* 2011. 6. 13. 22:14

 

 

 

 

 

 

 

 

 

 

 

 

 

 

 

 

 

 

 

 

 

 

 

 

 

 

 

 

 

 

 

 

완주 화암사극락전(花巖寺極樂殿)


보물 제663호인 화암사 극락전은 정면 3칸 측면3칸의 다포계 맞배지붕 건물이다.절 크기에 어울리는 작은 법당이지만 우리 건축사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매우 큰 전통 건조물이다.


기록들을 종합해볼 때 이 전각은 고려 후기인 1297~1307년 사이에 중창되었으며,성달생에 의해 절이 면모를 새롭게 한 1425년부터 1440년 무렵에 또 한 차례 중창이 있었으리라 추정된다.1981년 문화재관리국(현문화재청)의 주도로 화암사에 대한 실측조사와 보수공사가 이루어진 바 있는데,그때 우화루와 극락전에서 상량문과 묵서명이 각각 발견되었다.이들을 통해서 극락전이 정유재란 때 불탔으며 그것을 전쟁이 끝난 직후인1605년 중건했고,뒤이어 1714년 또다시 중수했음을 알 수 있다.따라서 현재의 모습이 1605년 당시의 모습과 기본적으로는 같다고 보아도 좋겠다.그렇다고 그 이전의 구조나 양식이 지금과 크게 달랐던 것 같지는 않다.보수나 중창이 있을 때마다 앞서의 모습을 충실히 재현 또는 답습하면서 당대의 양식을 부분적으로 가미하는 방식으로 일이 이루어졌음을 각종 기록에서 확인할 수 있기 때문이다.이런 까닭으로 이 작은 건물에는 멀리로는 백제시대부터 고려와 조선시대의 건축양식이 두루 혼재한다고 알려져 있다.


이른바 백제계 양식의 대표적인 예로 하앙구조(下昻構造)를 꼽을 수 있다.하앙이란 기둥 위에 중첩된 공포와 서까래 사이에 끼워진 긴 막대기 모양의 부재를 가리킨다.이 하앙의 끝부분 위에 도리를 걸고 서까래를 얹으면 밖으로 돌출한 하앙의 길이만큼 처마를 길게 뺄 수 있다.실용과 장식에 대단히 유용한 구조재라 하겠다.이를 백제계 양식으로 보는 이유의 하나는 하앙에 의해 만들어진 깊은 처마가 강수량이 많은 평야지대,곧 백제지역에 적합한 기능성을 갖기 때문이다.또 백제의 장인들에 의해 이룩된 일본 호류지(法隆寺)의 금당(金堂)과 오층목탑에 하앙이 유력한 물증으로 남아 있는 까닭이다.


이와 같이 일본은 물론 중국의 전통건축에서도 하앙구조는 흔히 쓰였던 형식이고 그 실례도 적잖이 남아 있다.하지만 우리나라에서는 그동안 그 존재가 학인되지 않았고,단지 목조건축의 모습을 그대로 본떠 만든 백제시대 금동탑(국립부여박물관 소장)정도에서 그런 공포구성을 유추할 수 있을 뿐이었다.이를 빌미로 일본학자들은 하앙구조가 한반도를 거치지 않고 중국에서 일본으로 직수입되었다는 주장을 펴기도 했다.그러다가 1976년 화암사 극락전의 하앙구조가 학계에 보고되었다.국내에서는 영영 볼 수 없으리라 체념하다시피 했었는데 놀랍게도 만인의 눈앞에 하앙을 가진 건물이 자태를 드러낸 것이다.일본 측으로서는 충격이었고,우리에게는 더없이 반가운 발견이었다.심지어는 '해방 이후 건조물 문화재계 최대의 발견'이라는 찬사까지 나왔으며,화암사 극락전은 단숨에 국내외 전문가들의 관심의 표적이 되었다.이후 현재까지 더 이상 비슷한 사례가 보고된 바 없다.지금으로선 이 법당이 하앙을 가진 국내 유일의 건물인 셈이다.


그러면 어떻게 해서 오직 이 건물만 천 년 세월을 거슬러 백제계 구조법을 지켜 올 수 있었을까? 그것은 앞서 말했다시피 여러 차례에 걸친 중창에도 불구하고 이전 시대의 형식을 고집스럽게 변화시키지 않은 덕분이다.말하자면 이 지역 기능읜 집단의 보수적 전톹이 천년 전의 소중한 유산을 오늘에 대물림한 계기가 된 것이다.그렇다고 지금의 극락전 하앙이 바로 백제시대의 하앙과 일치한다고는 생각되지 않는다.기본은 유지하되 시대에 따른 양식상의 변화조차 없지는 않은 것이다.


하아은 극락전의 앞면과 뒷면에서 볼  수 있는데,앞과 뒤의 그것이 사뭇 다르다.한마디로 앞면은 장식적이로 뒷면은 구조적이다.앞면 공포의 형상은 일반 다포계 건물과 같되 살미첨차의 머리를 경사지게 하여 그 위에 하앙을 받았다.그리고 하앙의 부리 위에는 소로를얹어 외목도리를 걸쳤으며,다시 그 위로 용머리를 조각한 부재가 고개를 내밀고 있다.하앙의 부리를 자세히 보면 용의 발 모습임을 알 수 있는데,끝부분은 화염이 이는 여의주를 발톱으로 움켜쥔 모습을 투각으로 표현하였다.하앙 전체를 한 마리 용으로 형상화한 화려한 기법이다.구조재를 구조재이면서 동시에 장식재로 활용하였다고 하겠다.반면 뒷면의 하앙은 훨씬 원형적이다.위치와 짜임은 앞면과 같지만 도리 위에 용머리도 없고 하앙의 부리 또한 아무런 장식 없이 길게 삼각형 모양을 이루며 날카롭게 잘리고 있다.앞면의 그것보다 구조와 기능에 훨씬 충식한 형태이다.전문가들은 이 뒷면의 하앙 형태를 임진왜란 이전의 양식,앞면의 것을 임진왜란 이후의 양식으로 본다.이렇듯 멀리 백제에 뿌리를 둔 하앙구조가 시대에 따라 변주를 하고 있는 것이다.


앞에서 극락전을 다포계 건축이라고 말했지만,실은 그것이 전형적인 다포계 양식이라고는 말할 수 없다.주심포계의 요소가 강하게 잔존하고 있기 때문이다.예컨대 지붕만 해도 주심포 양식과 짝을 이루는 맞배지붕이며,주심포계와 다포계의 변별점이라 할 주간포(柱間包)역시 정면의 어간(御間)에 두 틀이 놓이고 그밖의 다른 칸에는 한 틀씩 놓여 과도적인 양상을 보인다.주심포 양식 또한 그 연원을 백제시대에 두고 있지만,현존하는 고려 건축물에서 보듯이 그것은 고려시대에 크게 유행한 건축양식이다.여기에 고려 말에 도입되어 각광받던 다포계의 공포양식이 오버랩되어 일종의 절충양식이 이루어지는데,우리는 그 실례를 극락전에서 보는 셈이다.뿐만 아니라 이 전각의 공포에서는 조선시대의 특징도 읽을 수 있다.첨차와 직교하면서 정면으로 뻗친 부재,즉 초제공(初齊工)과 이제공(二齊工)은 끝이 위로 솟은 앙서형(仰舌形)으로,길이가 비교적 짧고 몸통이 두꺼우며 내리뻗은 폼이 사뭇 힘차서 상당히 강건함 기품이 서려 있다.조선 중기 이전으로 시대가 올라가는 형태이다.공포를 받치고 있는 주두는 일반적인 모양이지만 정면 주간포 밑의 주두는 생김새가 연잎을 닮은 흔치 않은 모양새다.옛 백제 지역에서 이따금 볼 수 있는 현상으로,비슷한 예가 부안의 개암사(開巖寺) 대웅보전에 남아 있다.백제시대의 공예적 전통이 조선시대의 장식 취미와 결합한 결과로 해석된다.극락전은 공포 하나에도 이렇게 다양한 시대가 투영되어 함께 숨쉬고 있다.


극락전은 단청도 주목에 값한다.예의 묵서명에 의해 1714년에 단청했음이 밝혀졌다.만일 지금의 단청이 당시의 것이 그대로 전해지는 것이라면 우리가 볼 수 있는 단청 가운데 퍽 시대가 올라가는 데 속한다.세월이 오래 흐르다보니 그 상태는 안팎이 상당히 다르다.안쪽은 비교적 보전 상태가 양호하여 무늬와 채색을 온전히 식별할 수 있음에비해 바깥쪽은 박락(剝落)도 많고 퇴색도 심한 편이다.공교롭게도 오히려 이렇게 낡은 단청이 마음을 편하게 해준다.호남지방 특유의 유순하며 명랑한 색조와 색감이 잘 표현된 단청,전체의 분위기가 중간 색조의 은은한 멋을 풍기면서도 격조 높은 작품이라는 평가가 있다.


특히 두드러지는 부분은 출목과 출목 사이의 빈 공간을 판자로 매운 순각판(巡閣板)에 그려진 비천상들이다.이미 풍화가 심하여 알아보기조차 힘든 것이 많지만,그런대로 윤곽과 색채가 선명한 것들을 보면 천의 자락 나부끼며 하늘을 나는 천녀의 모습이 또렷하다.얼굴은 복스럽고,색조는 부드러우며,필선은 자유분방하다.숙달된 장인의 솜씨가 엿보인다.어쩌면 극락전 단청의 백미가 여기에 있는지 모르겠다.


극락전은 편액 또한 재미있다.'極.樂.殿'- 이렇게 한 글자씩을 작은 판자에 써서 정면 어간 포벽 위에 나누어 붙였다.그 이유를 어떤 이는 "화려한 포작과 하앙의 장식성을 편액이 가리지 않도록 배려한 결과"라고 풀이하고,다른 이는 주심포와 주간포의 첨차 길이가 달라서 생겨난 포벽의 불균형을 가리기 위해서라고 설명하기도 한다.그야 어쨌든 유쾌한 파격이자 예외임에는 변함이 없다.


이제까지 보았듯 화암사 극락전은 긴 시대,너른 폭을 한몸에 지닌 흥미로운 건물이다.우리로 하여금 공부하게 만들고,호기심을 유발하고,아름다움과 재미를 주는,작지만 당찬 건축이다.한마리도 천 년 뒤에 보는 백제 건축의 잔영,단일 건물에 녹아 있는 건축으 시대사이다.
*한국문화유산답사회 지음 '답사여행의 길잡이'중에서*

 

화암사극락전(花巖寺極樂殿)


보물 제663호
전북 완주군 경천면 가천리 1078


극락정토를 상징하는 극락전은 1981년 해체·수리 때 발견한 기록에 따르면, 조선 선조 38년(1605)에 세운 것으로 되어 있다.


앞면 3칸·옆면 3칸 크기에 지붕은 옆면에서 볼 때 사람 인(人)자 모양을 한 맞배지붕으로 꾸며 소박하고 작은 규모를 보이고 있다. 지붕 처마를 받치기 위해 기둥 위부분에 장식하여 짜은 구조가 기둥 위와 기둥 사이에도 있는 다포 양식이다. 건물 안쪽 가운데칸 뒤쪽에는 관세음보살상을 모셨으며, 그 위에 지붕 모형의 닫집을 만들어 용을 조각하였다.


화암사 극락전은 우리나라에 단 하나뿐인 하앙식(下昻式) 구조이다. 하앙식 구조란 바깥에서 처마 무게를 받치는 부재를 하나 더 설치하여 지렛대의 원리로 일반 구조보다 처마를 훨씬 길게 내밀 수 있게 한 구조이다. 중국이나 일본에서는 근세까지도 많이 볼 수 있는 구조이지만 우리나라에서는 유일한 것으로 목조건축 연구에 귀중한 자료가 되고 있다. 
*문화재청자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