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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동 병산서원(屛山書院).경북 안동 본문

☆~ 풍경소리/경 북

안동 병산서원(屛山書院).경북 안동

푸른새벽* 2011. 8. 16. 13:33

 

 

 

 

 

 

 

 

 

 

 

 

 

 

 

 

 

 

 

 

 

 

 

 

 

 

 

 

 

 

 

병산서원(屛山書院)


사적 제260호 
경북 안동시 풍천면 병산리 30 


안동에서 하회마을과 함께 꼭 찾아야 할 곳이 바로 병산서원이다.낙동강의 물돌이가 크게 S자를 그리며 하회를 감싸안아 흐르는데,그 물길이 감싸는 중심지에 있는 화산 자락의 양쪽 끝에 하회마을과 병산서원이 각각 자리 하고 있다.병산서원으로 가려면 하회 가는 길에서부터 왼쪽으로 갈라진 샛길로 들어서야 한다.왼쪽으로는 넓게 펼쳐진 풍산 들 한자락이 보이고 오른쪽으로는 산굽이를 끼고 돌면서 차 한 대가 겨우 다닐 만한 좁은 길이 구불구불 이어진다.느티나무가 의젓하게 버텨선 효자마을 입구를 거쳐 몇 굽이를 돌아가면 너른 시야가 펼쳐지면서,낙동강변의 모래사장이 멀리 바라보이는 위치에 병산서원이 자리하고 있다.


풍천면 병산리에 자리한 병산서원은 서애 류성룡과 그 아들 류진을 배향한 서원이다.모태는 풍악서당(豊岳書堂)으로 고려 때부터 안동부 풍산현에 있었는데,공민왕이 홍건적의 난을 피하여 이 고장에 왔을 때 면학하는 유생들을 가상히 여겨 내려준 토지 8백 두락을 받기도 했다.조선조인 1572년에 류성룡이 지금의 장소로 옮겼다.임진왜란 때 병화로 불에 탔으나 광해군 2년(1610)에 류성룡의 제자인 우복 정경세를 중심으로 한 사림에서 서애의 업적과 학덕을 추모하여 사묘인 존덕사를 짓고 향사하면서 서원이 되었다.'병산서원(屛山書院)'이라는 사액을 받은 것은 철종 14년(1863)의 일이며 1868년에 대원군이 대대적으로 서원을 정리할 때 폐철되지 않고 남은 47곳 가운데 하나이다.


현재 사적 제260호로 지정되어 있는 병산서원의 사적지 면적은 6825평에 이른다.건물과 건물을 둘러싼 담장과 그 주위를 통틀어 그러하다.그러나 병산서원이 시야로 누리는 땅과 강과 하늘이 어찌 6천평에 한정되랴.보이는 모든 풍광을 병산서원은 다 끌어안고 있으니 그것이 우리가 이곳을 찾는 까닭의 하나이다.


병산서원은 서원 설립의 역사에서 보면,초창기인 16세기 초반도아니고 남설기인 18세기 이후도 아닌 17세기 초반에 지어졌다.서원이라는 사설교육제도가 어느 정도 자리잡은 이후에 건립된 것이다.그래서인지 병산서원의 배치나 구성은 더할 것도 없고 덜할 것도 없는 서원의 전형을 보여준다.서원의 기본 배치는 성균관 문묘나 고을의 향교들처럼 남북 일직선상에 외삼문.누각.강당.내삼문.사당을 놓고,강당 앞쪽으로는 좌우에 동.서재와 서재를 놓으며,강당 뒤쪽에 전사청과 장판각을 두었다.그리고 외곽에는 이 모두를 감싸는 낮은 돌담을 두르고,사당공간에도 특별히 담을 둘러 출입을 엄히 통제하였다.병산서원은 이 기본 배치를 충실히 살리면서 살짝 축을 비껴 사당을 두었는데,전체적인 조화로움은 잃지 않고 있다.여기에 다른 군더더기가 없으니 엄격하면서도 권위적이지 않은 공간의 맛을 한껏 느낄 수 있다.


병산서원을 정면으로 바라보며 걸어가면 마주하는 문이 복례문(復禮門)이다.솟을대무인 복례문의 이름은 '克己復禮'에서 따온 듯한데,세속된 몸을 극복하고 예를 갖추라는 뜻을 지니고 있다.문 안으로 들어서면 삼문 안쪽은 물건을 둘 수 있게 되어 있는데,서쪽 칸의 가마는 향사 때 제수를 운반하는 의례용 가마이다.


복례문을 들어서면 정면 7칸으로 길게 선 만대루 아래로 강당인 입교당이 보인다.만대루 아래는 급경사로 계단이 설치되어 있으니 누 아래로 고개를 숙이고 지나가게 함으로써 마음과 몸을 다시 한번 추스리게하는 역할도 한다.


만대루 아래를 지나 마당에 들어서면 정면에 강당인 입교당(立敎堂)이 있다.이 집은 '입교',곧 '가르침을 바로 세운다'는 그 이름에 걸맞는 강당으로 서원에서 가장 핵심이 되는 건물이다.가운데는 마루이고 양쪽에 온돌을 들인 정면 5칸 측면 2칸의 아담한 건물이다.동쪽 방은 원장이 기거하던 명성재(明誠齋)이고,서쪽의 조금 더 큰 2칸짜리 방은 유사들이 기거하던 경의재(敬義齋)이며,마루는 원생들에게 강학을 하던 공간이다.입교당 양쪽으로는 유생들이 기거하던 기숙사 건물인 동재와 서재가 있다.동.서재도 각각 가운데 마루를 두고 양쪽에 온돌을 들였다.이 건물들은 남향하지 않고 동향 또는 서향을 하고 있는데 이는 강당을 향하도록 한 것이니,서원이 지녀야 할 엄격성을 고려한 배치이다.


입교당과 동재 사이로 빠져나가면 정면에 길고 높은 계단이 마주한다.사당인 존덕사(尊德祀)로 오르는 길이다.사당은 문과 담으로 엄격히 구분되어 있는데,단청이 칠해져 있는 문은 아무 장식이 없는 다른 건물들과 대조를 이룬다.삼문으로 된 신문(神門)은 평소에는 닫혀 있다가 음력 4월과 10월의 첫째 정일(丁日)의 향사 때에만 열린다.존덕사 동쪽에는 제수를 마련할 때 사용하는 전사청(典祀廳)이 있고,서쪽에는 각종 서책과 목판을 보관하는 장판각(藏板閣)이 있다.전사청이나 장판각은 모두 정면 3칸 측면 1칸의 단촐한 집들이다.


지금까지 올라가면서 건물을 보았다면 이제는 건물에 앉아서 직접 이곳에서 기거하며 공부하던 사람의 눈으로 살펴보자.병산서원의 건물들은 겉에서 보면 매우 무심히 지어진 듯 보이지만 실은 기거하는 사람의 눈이나 마음을 곳곳에 담고 있다.먼저 존덕사의 신문 앞 계단 위쪽에서 내려다보면건물 지붕들 너머로멀리 강이 보인다.가장 중요한 공간인 강당마루에서는 만대루가 길게 펼쳐진 지붕 위쪽으로 위엄이 서려 있는 병산과 하늘이 보인다.강물은 만대루 누각의 기둥 사이로 찰랑거린다.


정면 7칸 측면 2칸으로 길게 이어진 만대루(晩對樓)는 두보의 시 한귀절인 "翠屛宜晩對"에서 따온 것이다.만대루를 오르자면 통나무를 깎아 걸친 나묵계단이 먼저 눈에 띈다.신을 벗은 발에 닿는 나무의 감촉이 부드럽기 그지없다.만대루에 오르면 머리 위로 휘어진 굵은 통나무 대들보가 물결치듯 걸쳐 있다.역시 자연스러움을 최대한으로 살려 편안함을 주고 있다.


만대루에 앉아 바라보는 승경은 그야말로 시간과 공간을 까맣게 잊게 할 만큼 사람을 취하게 한다.휘돌아가는 낙동강을 사이에 두고 맞은편에 위치한 병산(屛山)은,『영가지』의 지도에 '청천절벽(晴川絶壁)'이라는 이름으로 올라있다.그토록 맑은 물에 우뚝 솟은 절벽이라는 뜻일게다.


가까이로 눈을 돌려 아래를 내려다보면 서원의 앞쪽에 자그마한 연못이 있다.복례문에 이어진 담장 구석에는 1칸 짜리 뒷간이 있는데 서원의 뒷간이어선지 깔끔하다.


서원 마당 곳곳에는 배롱나무가 심어져 있다.특히 복례문에 들어서서 만대루로 오르는 계단 앞의 화단과 사당 계단 양옆,장판각 주위에 많다.장판각 앞쪽에 서 있는 두 그루의 은행나무는,공자가 은행을 심고 제자들을 가르쳤다는 얘기에서부터 선비의 정신으로 여겨져오던 나무이니 서원과 잘 어울린다.병산서원에 그 밖에 별다른 조경시설이 없는 것은,주변의 풍광 자체가 뛰어나서 보기만 해도 자연을 가득 누릴 수 있기 때문일 것이다.자연 한가운데 들어감으로써,가두거나 소유하지 않고 자연을 누리는 우리나라 사람들의 자연관이 잘 드러나 있다.
*한국문화유산답사회 지음 '답사여행의 길잡이'중에서*


 
병산서원(屛山書院)

사적 제260호 
경북 안동시 풍천면 병산리 30 


서애 유성룡의 학문과 업적을 기리기 위한 곳으로, 안동에서 서남쪽으로 낙동강 상류가 굽이치는 곳에 화산(花山)을 등지고 자리하고 있다. 유성룡은 도학·글씨·문장·덕행으로 이름을 날렸을 뿐만 아니라, 임진왜란 때에도 성곽 수축·화기제작을 비롯하여 군비확충에 힘써 많은 공을 세운 인물이다.


원래 풍악서당으로 풍산 유씨의 교육기관 이었는데, 유성룡이 선조 5년(1572)에 이곳으로 옮겼다. 그 후 광해군 6년(1614)에 존덕사를 세워 그의 위패를 모시고, 1629년에 그의 셋째 아들 유진의 위패를 추가로 모셨다. 철종 14년(1863)에는 임금으로부터 ‘병산’이라는 이름을 받아 서원이 되었다. 서원내 건물로는 위패를 모신 존덕사와 강당인 입교당, 유물을 보관하는 장판각, 기숙사였던 동·서재, 신문, 전사청, 만대루, 고직사가 있다.


병산서원은 선현배향과 지방교육을 담당해 많은 학자를 배출한 곳으로, 1868년 대원군의 서원철폐령 때에도 남아 있었던 47개의 서원 중 하나이며, 한국 건축사에 있어서도 중요한 유적이다. 
*문화재청자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