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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동봉정사대웅전(安東鳳停寺大雄殿).경북 안동 본문

☆~ 풍경소리/경 북

안동봉정사대웅전(安東鳳停寺大雄殿).경북 안동

푸른새벽* 2011. 8. 18. 20:55

 

 

 

 

 

 

 

 

 

 

 

 

 

 

 

 

 

안동봉정사대웅전(安東鳳停寺大雄殿)


국보 제311호  


봉정사 대웅전은 현재 봉정사의 주불전이다.이 대웅전은 조선 초기에 지어진 건물로 여겨지고 있다.그러나 1363년에 극락전을 중수할 때 새로 대웅전을 지어 봉정사의 구획을 이렇게 다시 잡지 않았나 하고 보기도 한다.만약 그렇다면 이 대웅전은 고려 말 건물이자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다포계 건물이 된다.1625년과 1809년에 대대적인 중수를 거쳐 오늘에 이르고 있다.보물 제55호이다.


대웅전은 정면 3칸 측면 3칸으로 팔작지붕을 인 다포식 건물이다.다포식이므로 기둥 위와 기둥 사이에도 공포가 있다.따라서 네 면에 다 공포가 있다.이런 공포는 지붕의 무게를 분산시켜 기둥에 전달하여 하중을 견디게 하기도 하지만,나무들이 얽힌 모습 자체만으로도 아름다운 조화를 보여준다.안정된 비례와 웅건한 구조인 대웅전은 건물의 짜임새만으로 보자면 극락전보다도 건축적 완성도가 높다.


대웅전을 바라볼 때 특이한 점은 앞이 툭 트인 일반적인 법당 건물들과는 달리,건물 앞쪽에 마치 조선시대 사대부집의 사랑채에나 있을 법한 난간이 둘러 있다는 것이다.그 난간은 건물 앞쪽에 설치된 툇마루의 난간이다.마당에서 바로 건물로 드는 것이 아니라 일단 툇마루로 올랐다가 건물 안으로 들어가게 된다.그래서인지 마당에서 대웅전 기단을 오를 때에는 정면으로 오르기보다는 옆으로 돌아서 가도록 계단이 설치돼 있다.툇마루를 밟는 느낌은 매우 상쾌하다.


건물은 전체적으로 단청이 퇴락해서 극락전보다 더 고풍스런 분위기를 풍긴다.벗겨진 단청 아래 나뭇결이 드러나는 맛도 그런 대로 좋다.안에는 극락전과 마찬가지로 후불벽을 치고 가운데에 석가모니불,양쪽에 관세음보살과 대세지보살을 모시고 있다.건물의 벽체가 아니라 건물 가운데에 이처럼 따로 벽을 마련하는 것은 조선 전기 건물에서나 볼 수 있다.얼마 전 이 후불벽에 걸려 있던 탱화를 보수하려고 걷어 냈을 때 그 밑에서 벽화가 발견되어 떠들썩한 적이 있었다.가로 4m가 넘는 이 거대한 벽화는 석가불이 영취산에서 관무량수경을 설법하는 장면을 그린 것으로 여겨진다.테두리의 연화.당초문이나 꽃비가 내리는 표현,고려시대의 변상도와 유사한 구도 등으로 보아 이 벽화는 고려시대의 변상도와 상당한 관련성을 지니고 있어 보인다.이 벽화가 훼손되어 1712년에 탱화를 새로 마련하였다는 기록 등으로 미루어,이 벽화는 대웅전이 건축되었던 때에 그려진 것으로 여겨지고 있다.그렇다면 이 벽화는 조선 초기 벽화로 유일하게 남아 있던 전남 강진 무위사의 극락보전 아미타삼존불도보다 더 앞서는 조선 초기 벽화로 인정될 수 있다.불상을 받치고 있는 수미단에는 모란꽃이 화려하게 조각되어 있는데,모란꽃이 불교 장식문양으로 등장한 것은 고려 말의 일이라고 한다.천장을 바라보면 다포계 건물이 천장이 대개 그렇듯이 판자를 대어 우물 정(井)자를 이룬 우물 천장을 하고 있다.우물 정자 하나하나마다 그 안에 화려한 꽃문양이 그려져 있다.그런데 대웅전 천장은 여기에 한 가지를 더해 부처님 자리 위쪽 부분을 깊이 파고 작은 공포들로 굽을 돌려 파올렸다.이는 궁궐의 정전인 서울 경복궁의 근정전이나 창덕궁의 인정전 천장의 한가운데를 파올린 것과 같은 방법으로,보개천장 또는 닫집이라고 한다.닫집은 부처나 왕과 같은 귀한 이의 자리를 상징하는 상징물이다.이 닫집의 천장 판에는 쌍룡이 그려져 있는데,그려진 용의 발톱은 다섯 개다.


극락전 앞에 우화루가 있었듯이 대웅전 앞에도 중문 격인 진여문(眞如門)이 있었으나 역시 지금은 철거되고 없다.그 진여문 현판이 공민왕의 친필이었다고도 한다.
*한국문화유산답사회 지음 '답사여행의 길잡이'중에서*

 


안동봉정사대웅전(安東鳳停寺大雄殿)

국보 제311호  
경북 안동시 서후면 태장리 901 봉정사 


봉정사 중심 법당인 대웅전에는 석가모니불상을 중심으로 문수보살, 보현보살을 좌우로 모시고 있다. 1962년 해체·수리 때 발견한 기록으로 미루어 조선 전기 건물로 추정한다.


규모는 앞면 3칸·옆면 3칸이며 팔작지붕이다. 지붕 처마를 받치기 위해 장식하여 만든 공포가 기둥 위뿐만 아니라 기둥 사이에도 있는 다포 양식인데, 밖으로 뻗친 재료의 꾸밈없는 모양이 고려말·조선초 건축양식을 잘 갖추고 있고 앞쪽에 툇마루를 설치한 것이 특이하다.


건물 안쪽에는 단청이 잘 남아 있어 이 시대 문양을 연구하는데 중요한 자료가 되고 있으며, 건실하고 힘찬 짜임새를 잘 갖추고 있어 조선 전기 건축양식의 특징을 잘 보여주고 있다. 
*문화재청자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