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익산연동리석불좌상(益山蓮洞里石佛坐像).전북 익산 본문

☆~ 풍경소리/전 북

익산연동리석불좌상(益山蓮洞里石佛坐像).전북 익산

푸른새벽* 2014. 3. 18. 11:45

 

 

 

 

 

 

 

 

 

 

 

 

 

 


익산연동리석불좌상(益山蓮洞里石佛坐像)


보물 제45호
전북 익산시 삼기면 연동리


이 불상은 머리만 없어졌을 뿐 불신(佛身), 대좌(臺座), 광배(光背)까지 고스란히 남아 있는 백제의 작품이다. 지금의 머리는 요즘 새로 만든 것이며, 불상의 현 신체 높이는 156㎝이다.


당당한 어깨, 균형잡힌 몸매, 넓은 하체 등에서 서툰 듯 하면서도 탄력적이고 우아한 면을 보여주고 있다. 양 어깨를 감싸고 있는 옷자락은 길게 내려져서 사각형의 대좌를 덮고 있는데, 앞자락은 U자형, 좌우로는 Ω형의 주름이 대칭으로 2단씩 표현되어 있다. 왼손은 엄지와 가운데 손가락을 구부려 가슴에 대고 오른손은 세번째와 네번째 손가락을 구부려 다리에 올려놓은 특이한 손모양을 하고 있다.


광배의 중앙에는 둥근 머리광배가 볼록 나와있고 그 안에 16개의 연꽃무늬가 새겨져 있으며, 바깥에는 방사선으로 퍼진 특징이 있다.
몸광배도 볼록하게 나와있고 바깥부분에는 불꽃무늬를 배경으로 7구의 작은 부처가 새겨져 있다.


이 석불상은 대좌의 모습과 광배에 새겨진 무늬를 볼 때 장중하면서도 세련된 특징을 보여주는 600년경의 희귀한 백제시대 불상으로 그 의의가 높다.
*문화재청자료*


익산연동리석불좌상(益山蓮洞里石佛坐像)

미륵사터에서 함열 쪽으로 조금 가다 만나는 마을이 삼기면 연동리다.이 마을 삼거리에는 보물 제45호로 지정된 백제 시대 석불좌상을 모신 석불사가 있고 근처에는 태봉사 삼존석불을 모신 태봉사가 있다.


옆에 붙은 초등학교의 이름이 아예 석불초등학교인 것을 보면 이 인근 사람들에게 석불의 명성이 오래 전부터 깊이 자리잡아 왔음을 알 수 있다.석불사는 석불에 기대어 근래에 지어진 듯,그라인더로 반들반들하게 광을 낸 비석과 수각 등 각종 석물이 좁은 뜰 안에 어수선하다.유서 깊은 석불을 모신 곳으로서는 퍽 안쓰러운 느낌을 갖게 한다.


대웅전으로 들어가 석불을 올려다보노라면,오랜 세월 동안 사람들의 소원을 참 많이도 들어주었을 듯한 듬직한 기 분을 갖게 된다.그 느낌은 두툼한 어깨와 턱,버티고 앉은 묵직한 몸집에서도 오고 정교한 불꽃무늬 안에 돌아가며 일곱 구의 화불이 조각된 거대한 광배에서도 온다.이러한 광배는 삼국 시대 금동삼존불의 광배와 유사한 것으로,이 불상의 제작 연대는 7세기 초로 추정된다.


석불의 머리 바로 뒤 광배 중앙에는 세 겹의동그라미 속에 16잎의 연꽃무늬를 조각하여 두광을 표현하고 있다.역시 백제의 화당이나 전에서도 흔히 볼 수 있는 연꽃잎의 모습인다.불상의 몸 높이는 1.56m이고 광배 높이는 3.26m이다.오른손은 배 앞 무릎 위에,왼손은 가슴에 대고 중지와 무명지를 구부린 특이한 손모양을 하고 있다.몸에 달라붙은 얇은 법의가 몸에 조각되어 있는데,옷자락이 무릎 아래에까지 늘어진 상현좌를 이루고 있고 가슴 아랫부분에는 띠 매듭이 표현되어 있다.무릎 아래에는 연화좌대가 있으나 근래에 만들어진 엉성한 수미단으로 가려져 있다.


머리는 어울리지 않게 좀 우멍한 인상인데 원래의 것이 아니고 새로 만들어 붙인 것이다.임진왜란 때 이곳에 진격해온 왜장이,안개가 짙어서 나아갈 수가 없자 이 석불의 조화라고 생각하여 머리를 잘라 밭에 버렸다는 전설이 있다. 머리 부분이 본래의 것이 아니고 군데군데 마멸되어 원형을 잃긴 했지만,태안 마애삼존불이나 서산 마애삼존불에 이어 나타난 백제의 단독 석불로서 큰 가치를 지닌다.
*한국문화유산답사회 지음 '답사여행의 길잡이'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