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익산고도리석불입상(益山古都里石佛立像).전북 익산 본문

☆~ 풍경소리/전 북

익산고도리석불입상(益山古都里石佛立像).전북 익산

푸른새벽* 2014. 3. 28. 13:17

 

 

 

 

 

 

 

 

 

 

 

 

 

 

 

 

 

 

 

 

 

 

 

 

 

 

익산 동고도리 석불(益山 東古都里石佛)


보물 제46호
전북 익산시 금마면 동고도리 400-2 


금마에서 왕궁리 오층석탑 쪽으로 가다 보면 길 왼쪽으로는 야트막한 언덕이 이어지고 오른편으로는 논이 펼쳐진다.그 논 가운데 길다란 석불 두 기가 서 있다.


높이 4.24m의 두 석불은 옥룡천을 사이에 두고 약 200m 정도 떨어진 거리에서 마주보고 서 있다.이 둘은 각각 남자와 여자인데,평소에는 만나지 못하다가 섣달 해일(亥日) 자시(子時)에 옥룡천이 얼어붙으면 서로 만나 안고 회포를 풀다가 닭이 울면 각자의 자리로 돌아간다고 하는 전설이 전해진다.지금은 옥룡천 위에 노란 페인트 칠이 된 시멘트 다리가 걸쳐져 있다.넘어져 있던 것을 조선 철종 9년(1858)에 익산 군수로 부임해온 최종석이 현재의 위치에 일으켜 세웠다고 한다.그 때 씌어진 「석불중건기」 비석이 찻길 가까운 쪽에 선 석불 옆에 있다.「석불중건기」에 적힌 내용은 이렇다.


"금마는 익산의 구읍자리로 동.서.북의 삼면이 다 산으로 가로막혀 있는데,유독 남쪽만은 터져 있어 물이 다 흘러나가 허허하게 생겼기에 읍 수문의 허를 막기 위해 세워진 것이라 한다.또 일설에는 금마의 주산인 금마산의 형상이 마치 말의 모양과 같다고 하여 말에는 마부가 있어야 하므로 마부로서 인석(人石)을 세웠다고 한다."


불상이라 불리고는 있지만 긴 기둥 같은 몸체에 네모난 얼굴,가는 눈,짧은 코, 옅은 웃음기를 담은 작은 입 등이 간략하게 표현된 모습은 매우 소박하면서도 친근하여 오히려 장승과 같은 인상을 풍긴다.봄,여름,가을,겨울,사시로 변해가는 들판과 그곳에서 일하는 사람들의 삶속에 어울리는 끈질긴 지킴이처럼 소박해서 더욱 믿음직하다.양감 없는 사다리꼴기둥 모양의 돌에 얼굴과 손,옷주름과 대좌를 매우 간략하게 표현했는데,몸통보다 큰 네모진 관을 쓰고 긴 소매 두루마기를 입고 있다.발치에는 판석이 하나씩 놓여 있는데 한 판석에는 알자리가 둥글게 파여 있다.


고려 시대에는 이렇게 신체의 표현이 절제된 거대한 석상이 많이 조성되었다.이 역시 그러한 작품 중의 하나로 고려 말엽에 조성되었을 것으로 여겨진다.
보물 제46호로 지정되어 있다.
*한국문화유산답사회 지음 '답사여행의 길잡이'중에서*

 

 

익산고도리석불입상(益山古都里石佛立像)

약 200m의 거리를 사이에 두고 마주 서 있는 2구의 석상으로, 사다리꼴 모양의 돌기둥에 얼굴, 손, 대좌 등이 표현되어 있다.


이 불상에 얽힌 전설에 의하면 음력 12월에 두 불상이 만나 1년 동안의 회포를 풀고 새벽닭 우는 소리를 듣고 제자리로 돌아가는 남녀상이라고 한다.


머리에는 4각형의 높은 관(冠) 위에 다시 4각형의 갓을 쓰고 있다. 4각형의 얼굴에는 가는 눈, 짧은 코, 작은 입이 간신히 표현되어 있는데, 토속적인 수호신의 표정이다. 목은 무척 짧게 표현되어서 어깨와 얼굴이 거의 붙어 있는 셈이다. 몸은 사다리꼴의 돌기둥으로 굴곡이 없으며, 팔은 표현되지 않고 손이 간신히 배에 나타내었다. 도포자락 같은 옷은 특별한 무늬없이 몇 줄의 선으로 표현하였다. 대좌(臺座)와 불상을 같은 돌에 새겼는데, 앞면을 약간 깍아 대좌같은 모양을 만들고 있다.


사다리꼴의 돌기둥 같은 신체나 비사실적인 조각수법이 마치 분묘(墳墓)의 석인상(石人像)과 비슷하다. 고려시대에 이르면 신체표현이 지극히 절제된 거대한 석상이 많이 만들어지는데 이 불상 역시 그러한 작품 중의 하나로 보인다. 
*문화재청자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