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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제 모악산 금산사(金堤 母岳山 金山寺).전북 김제 본문

☆~ 절집.절터/전 북

김제 모악산 금산사(金堤 母岳山 金山寺).전북 김제

푸른새벽* 2014. 11. 13. 16:14

 

 

 

 

 

 

 

 

 

 

 

 

 

 

 

 

 

 

 

 

 

 

 

 

 

 

 

 

 

 

 

 

 

 

 

 

 

 

 

 

 

 

 

 

 

 

 

 

 

 

 

 

 

 

 

 

 

 

 

 

 

 

 

 

 

 

 

 

 

 

 

 

 

 

 

 

 

 

 

 

 

 

 

 

 

 

 

 

 

 

 

 

 

 

 

 

 

 

 

 

 

 

 

 

 

 

 

 

 

 

 

 

 

 

 

 

 

 

 

 

 

 

 

 

 

 

 

 

 

 

 

김제 모악산 금산사(金堤 母岳山 金山寺)


모악산 남쪽 자락에 자리 잡은 금산사는 호남 미륵신아의 도량이다.드넓은 경내에 국보 제62호로 지정된 미륵전을 비롯하여 노주,석련대,오층석탑,혜덕왕사 진응탑비,당간지주,석종,육각다층석탑,석등 등 많은 보물과 문화재를 간직하고 있으며,대적광전,대장전,명부전,낳나전,일주문,금강문,보제루 등의 건물과 심원암,용천암,청련암 등 부속 암자를 거느린 거찰이다.


모악산과 금산사라는 이름은 큰 산을 뜻하는 고어 엄뫼,큼뫼에서 비롯했다고 한다.한자가 들어오면서 엄뫼는 어머니의 뫼라는 뜻의 모악으로,또 큼은 금(金)으로,뫼는 산(山)으로 적게 되었다는 것이다.온통 평야인 이 지역에서,옛날부터 이 산의 존재가 외경의 대상이 되어왔음을 추측할 수 있다.


금산사는 백제 법왕 원년(599)에 임금의 복을 비는 사찰로 처음 지어졌다.창건 당시에는 소규모 사찰이었으나 신라 혜공왕 2년(766)에 진표율사에 의해 중창되면서 대가람의 면모를 갖추었다.이때 진표율사는 미륵장륙상을 조성하여 미륵전에 모셨고,금당 남쪽 벽에는 미륵보살이 도솔천에서 내려와 자가에게 계법을 주던 모습을 그렸다고 한다.그 이래로 금산사는 미륵신앙,즉 신라 오교의 하나인 법상종의 근본도량으로서 이 지역 불교 문화의 중심지가 되었다.따라서 금산사에는 대웅전이 없고 미륵전에 있는 미륵불이 주불이며 석가불은 대장전에 따로 모셔져 있다.


한편,스스로 미륵임을 자처했던 후백제 왕 견훤이 이 절을 자기의 복을 비는 원찰로 삼고 중수했다는 설도 있다.견훤은 말년에 넷째 아들인 금강에게 왕위를 물려주려다가 맏아들인 신검을 비롯해 양검,용검 등 아들들에게 붙잡혀 금산사에 유폐되기도 했다.신검은 아버지를 금산사에 유폐하고 금강을 죽인 후 왕위에 올랐다.석 달 동안 유폐 생활을 하던 견훤은 감시자들에게 술을 먹이고 금성(지금의 나주)으로 도망 쳐 왕건에게 투항하고 자기 아들을 쳐 줄 것을 청했다.왕건이 마침내 그의 아들들을 쳐 후삼국을 통일한 지 며칠 만에,견훤은 착잡한 번민과 울화에 싸여 등창이 나서 논산시 여산에 있던 황산사에서 죽었다.


고려 시대로 들어와,문종 33년(1079)에 주지로 부임한 혜덕왕사가 다시 절을 중수하여 88당 711칸의 어마어마한 거찰을 만들고 금산사 역사상 최고의 전성기를 이루었다.혜덕왕사는 원래의 절을 사찰 전체를 관장하는 대사구(大寺區)로 하고,대사구 남쪽에 경전 강의및 수련법회를 하는 광교원구(廣敎院區),그리고 동북쪽에 원로 대덕들이 주석하는 봉천원구(奉天院區)를 신설하여 그 두 곳이 대사구와 맞먹는 사원 규모를 이루도록 하였다.이렇게 기능에 따라 사찰을 삼분한 혜덕왕사는 경전 연구,실천 수행,중생 교화,사찰 경영등 합리적인 체계를 확립하여 금산사를 운영했다.지금 금산사 자리는 대사구 자리이며 다른 두 곳은 터만이 남아 있고 봉천원구(奉天院區)는 부도전이 되었다.


혜덕왕사 당시의 당우(堂宇)들은 선조 31년(1598) 정유재란 때 금강문 하나를 빼놓고는 모조리 불타고 말았다.이것은 서산대사,사명대사와 함께 임진왜란 때 구국 3화상의 한 분인 뇌묵당 처영대사가 금산사를 중심으로 승병을 일으켜 활동한 것에 대한 왜군들의 보복 때문이었다.일부 석조물을 제외하고,지금 남아 있는 건물들은 대체로 선조 34년(1601)에 수문대사가 금산사 재건을 시작하여 인조 13년(1635)에 완성한 후 부분적인 중수를 거치면서 오늘에 이른 것들이다.


최근 들어 대적광전을 복원하고,입구에서 보제루를 지나 대적광전과 연결되는 일직선상에 새로 금강문과 사천왕문을 만드는 등 여러 가지 불사가 이루어졌다.옛 금강문은 현재는 문으로 사용하지 않고 가람수호신당으로만 사용한다.


예전 금산사 대적광전은 정유재란 후 수문대사가 절을 복구할 때 지은 정면 7칸 측면 4칸 건물로,보물 제476호로 지정되어 있었지만 1987년 12월에 화재로 사라져버렸다.대적광전은 우리 나라가 불교를 수용한 이래 숭앙해온 모든 불보살들을 대담하게 종합하여 다섯 여래(아미타불,석가모니불,비로자나불,노사나불,약사불)와 여섯 보살(대세지보살,관음보살,문수보살,보현보살,일광보살,월광보살),그리고 500나한을 한 곳에 모아 모신 건물이었다.우리 나라에서 가장 옆으로 긴 법당 건물로서,3층 건물인 미륵전과 함께 길이와 높이의 좋은 대비를 이루던 이 건물이 우리 시대의 미욱함 때문에 잿더미로 변한 일은 두고두고 안타깝다.


삼국 말기 백제에서 크게 일어난 이래,현세에서 행복하지 못해 새 세상을 갈구하는 사람들이 신앙으로서 여러 대를 거쳐 지금까지도 이어져오는 미륵신앙,호남 지역에서 그 미륵신앙의 본산이 되고 있는 금산사를 들어가보자.
*한국문화유산답사회 지음 '답사여행의 길잡이'중에서*

 

 

김제금산사일원(金堤金山寺일원)


사적 제496호 
전북 김제시 금산면 금산리 39 일원 


백제시대에 창건한 사찰로 전해지고 있는 김제 금산사는 통일신라시대 진표율사의 중창불사 이후 1400여년의 역사를 가지고 있는 미륵신앙의 본산으로 법맥을 이어오고 있으며, 후백제 견훤의 유배지로도 알려진 사찰이다.


고려시대에는 혜덕왕사가 법상종 관련 불서의 간행 및 유포에 힘쓰는 한편 금산사를 중창하였으며, 임진왜란 당시에는 호국사찰로서의 역할을 다하였다.


국보 제62호인 미륵전을 비롯하여 고려시대 석조문화재 및 조선후기의 목조건축 등 11개의 국가지정문화재가 보존되어 있는 호국사찰로 역사적·문화사적 의의 등 학술적인 측면에서 중요한 가치를 지니고 있다. 
*문화재청자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