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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주성(洪州城).충남 홍성 본문

☆~ 풍경소리/충 남

홍주성(洪州城).충남 홍성

푸른새벽* 2015. 11. 11. 11:59

 

 

 

 

 

 

 

 

 

 

 

 

 

 

 

 

 

 

 

 

 

 

 

 

 

 

 

 

 

 

 

 

 

 

 

 

 

 

 

 

 

 

 

 

 

 

 

 

 

 

 

 

 

 

 

홍주성(洪州城)


홍성에 진입하여 길 한 가운데에 당당하게 버텨 선 홍주성의 동문인 조양문과 맞부딪치면 이 고장이 자기 역사를 꿋꿋하게 지켜 내고 있구나 하는 생각을 하게 된다.조양문을 바라보아 왼쪽으로 난 길을 따라 쭉 들어가면 홍성군청이 있고 군청문 옆에 홍주목의 정문이었던 홍주아문이 역시 자태도 당당하게 서 있다.그 둘을 잠깐 놔 두고 홍주성을 먼저 한바퀴 둘러보면 홍성읍이 한눈에 들어와 대강 머릿속에 그려진다.


사적 제231호로 지정되어 있는 홍주성을 보기에 가장 좋은 곳은 홍주아문 왼편으로 난 길을 따라 올라간 곳이다.돌을 잘 다듬어 얌전하게 쌓아올린 4m높이의 석축이 둘러 있다.현재 남은 길이는 810m 정도인데 이것도 일제강점기에 일본사람들이 서문과 북문을 철폐하고 성곽을 허무는 것을 읍민들이 강경하게 반대하여 이만큼이나마 남은 것이다.원래 성곽 길이는 1,772m였다고 하니 그 모습이 온전히 남아 있었다면 해미읍성,낙안읍성과 함께 손꼽히는 읍성유적이 되었을 터라 안타깝기 그지없다.


홍주성은 백제가 멸망했을 때에 부흥군의 중요 거점이었던 주류성으로 추정되기도 하지만 처음 성을 쌓은 것이 언제인지는 알려진 바가 없다.조선 초기인 문종 1년(1451)에 지방행정구역을 개편하고 각 읍성을 새로운 법칙에 따라 고쳐 지을 때에 새로 수축한 모습이 아직까지 남아 있는 것이다.그러므로 조선 초기의 축성규칙에 따른 모습을 충실히 보여 주어 역사적으로나 학술적으로 그 가치가 높다.


축성 당시에는 적대(敵臺)가 24곳,문이 4곳,성내에 우물이 2곳 있었으며 둘레에는 해지를 파지 않았다고 한다.여러 번 수리를 했으나 1870년에 목사 한응필이 동문인 조양문(朝陽門)과 서문인 경의문(景義門),북문인 망화문(望華門)과 관영(官營)을 지었다.다른 성들과는 달리 남문은 문루가 없는 점이 특이하다.북문에서는 역대 목사들이 사형수를 처형하였으며 1894년 갑오농민전쟁 때에는 잡혀온 농민군 수백 명이 처형되기도 했다.또 홍주성이 풍수지리설에서 말하는 '천둥이 땅에 떨어지는 형세'이어서인지 조선 선조 때 이몽학이 반란을 일으키는 등 싸움을 많이 치른 셈이다.


그래도 이 성의 역사는 주로 일본의 침략과 관련되어 있다.고려 때 부터 해서 16차례에 걸쳐 왜구의 침공이 있었다는 기록이 있고,1905년에 을사보호조약이 체결되자 그에 반대하여 의병을 일으킨 민세영.이종식 들이 그 이듬해에 화포 6문과 ㅂ여사 1,100명을 이끌고 와서 홍주성에 주둔해 있던 일본군을 덕산으로 밀어 낸 적도 있다.


그러나 앞에 말했듯이 일부만 남고 일본인의 손으로 헐리고 말았다.근래에 들어서는 1978년에 홍성 지역을 강타한 큰 지진을 만나 석축이 일부 허물어지기도 했으나 3년에 걸쳐 복원했다.홍성읍의 남산을 둘러 싸고 있어 '남산공원'의 일부이기도 한 홍주성은 홍성 사람들의 도심 공원 노릇을 톡톡히 하고 있다.성곽 초입에는 한용운의 시 「알 수 없어요」 를 박두진의 글씨로 새겨 놓은 시비가 있고 1949년에 세운 김좌진 장군비도 있다.
*한국문화유산답사회 엮음 '답사여행의 길잡이'중에서*

 


홍주성(洪州城)                                       


사적 제231호
충남 홍성군 홍성읍 오관리 200-2


충남 홍성군에 있는 성으로, 길이 약 1,772m의 성벽 중 약 800m의 돌로 쌓은 성벽의 일부분이 남아있다. 처음 지어진 연대는 확실히 알 수 없으며, 『세종실록지리지』에 홍주성의 둘레와 여름과 겨울에도 마르지 않는 샘이 하나 있다는 기록만 있을 뿐이다.


왜구의 침입이 예상되는 고을의 읍성을 새로운 격식에 맞추어 쌓게 되었던 조선 세종 때에 처음 쌓기 시작하여 문종 1년(1451)에 새로 고쳐 쌓았다. 당시 성의 규모는 둘레가 4,856척(약 1.5㎞), 높이는 11척(약 3.3m)이며 문은 4개가 있었고, 여장·적대 등의 여러 시설이 설치되었으며 안에는 우물 2개가 있었다고 한다.
 

동문인 조양문은 현재까지 남아있고 1975년 복원한 것이다. 아문은 조양문의 문루를 설치할 때 함께 세운 것이며 ‘홍주아문’이란 글씨는 흥선대원군이 직접 썼으나 현재 남아있지 않다. 우리나라 아문 중에서 가장 크고 특이한 형태를 지니며 조선시대 관아의 구조와 형태를 살필 수 있는 자료가 된다. 1905년 을사조약 체결에 반대하여 의병을 일으킨 민종식 등이 이 성에 주둔하고 있던 일본군을 공격하여 덕산으로 격퇴시킨 일이 있다.


이 곳은 삼국시대부터 조선시대에 이르기까지 읍성으로 이어졌으며, 조선 초기 새로운 형식에 의해 쌓은 성이 남아있다는 점에서 가치가 있다. 
*문화재청자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