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리 메뉴

바람처럼 떠나다

청허대사진영(淸虛大師 眞影).국립중앙박물관 본문

☆~ 바람소리/박물관

청허대사진영(淸虛大師 眞影).국립중앙박물관

푸른새벽* 2016. 2. 21. 11:43

 

 

 

 

 

 

 

 

 

 

 

 

 

 

 

 

 

 

 

 

 

 

 

 

 

 

 

청허대사진영(淸虛大師 眞影)


조선시대
국립중앙박물관


조선후기의 선승禪僧이자 임진왜란 때 의승장義僧將으로 활약한 청허 휴정(淸虛 休靜(1520~1604)의 진영이다.


청허 휴정은 서산대사(西山大師)로 잘 알려져 있다.청허대사는 등받이가 높은 의자에 앉아 다리를 내린 자세로 용두(龍頭) 장식이 있는 대나무 주장자를 쥐고 있다.


얼굴은 가는 먹선으로 그렸으며 온화하지만 예리한 눈매와 꼭 다문 입술에서 당대 학승이자 선승의 모습을 느낄 수 있다.바닥에 깔린 화문석의 문양은 마치 위에서 아래를 내려다 본 시선으로 그렸다.
*국립중앙박물관자료*

 

 

청허대사(淸虛大師)

 

속명은 최여신(崔汝信). 본관은 완산(完山). 자는 현응(玄應), 호는 청허(淸虛). 묘향산에 오래 머물렀기 때문에 묘향산인(妙香山人) 또는 서산대사(西山大師)로 불린다.


휴정은 법명이다.


아버지는 향관(鄕官)을 지낸 세창(世昌)이며, 어머니는 김씨(金氏)이다. 9세 때 어머니가 죽고 이듬해 봄에 아버지마저 죽자 안주목사 이사증(李思曾)의 양자로 들어가 서울로 옮겼다. 12세 때 성균관에 들어가 3년 동안 글과 무예를 익힌 다음 15세 때 과거를 보았으나 낙방했다.


이후 동료들과 함께 지리산의 화엄동(華嚴洞)·청학동(靑鶴洞)·칠불동(七佛洞) 등을 유람하다가 숭인장로(崇仁長老)의 권유로 불교를 공부하기 시작했다. 5년 동안 〈전등록 傳燈錄〉·〈염송 拈頌〉·〈화엄경〉·〈능엄경 楞嚴經〉·〈반야경〉·〈원각경 圓覺經〉 등의 교리를 탐구하다가 깨달은 바 있어 스스로 시를 짓고 머리를 깎았으며, 1540년(중종 35)에 일선(一禪)에게 구족계를 받았다. 그뒤 부용영관(芙蓉靈觀)으로부터 인정을 받은 후 전국을 떠돌아다니며 공부에만 전념했다. 1549년(명종 4) 승과에 합격했으며, 대선(大選)을 거쳐 선교양종판사(禪敎兩宗判事)에 올랐다.


1556년 선교양종판사직이 승려의 본분이 아니라고 생각하여 이를 버리고 금강산·태백산·오대산·묘향산 등지를 돌아다니며 선수행과 후학지도에 전념했다. 1589년(선조 22) 정여립(鄭汝立)의 모반사건이 일어났을 때 누명을 쓰고 투옥되었다가 선조의 직접 신문에 의해 무죄가 입증되어 석방되었다. 이때 선조와 휴정이 주고받은 시가 그의 문집에 실려 전한다.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선조의 부탁을 받고 전국에 격문을 보내어 의승군(義僧軍)의 궐기를 호소했다.


자신은 순안 법흥사(法興寺)에서 문도 1,500명으로 승군을 조직했으며, 평양탈환작전에 참가하여 공을 세웠다. 선조가 팔도십육종도총섭(八道十六宗都摠攝)에 임명하자, 나이가 많다는 이유를 들어 이를 제자인 유정(惟政)에게 물려주고 묘향산으로 돌아갔다.


선조가 서울로 돌아오자 승군을 이끌고 나가 호위한 후 승군장의 직에서 물러나 다시 묘향산으로 돌아갔다. 이때 선조는 국일도 대선사 선교도총섭 부종수교 보제등계존자(國一都大禪師禪敎都摠攝扶宗樹敎普濟登階尊者)라는 존칭과 함께 정2품 당상관의 작위를 내렸다. 1604년 1월 묘향산 원적암(圓寂庵)에서 앉은 채로 입적했다.


당시 불교는 조선왕조의 계속된 억불정책으로 사회경제적인 토대를 박탈당했으며, 사림의 등장으로 성리학적 질서에 의해 사회체제가 재편되고 불교에 대한 탄압이 강화되면서 국가제도권에서 탈락하여 산간총림으로 겨우 명맥을 유지하고 있었다.


휴정은 이러한 때에 불교교단의 존립과 국가 전체의 안위를 의식하고 이에 대처했다. 그는 선종 가운데서도 임제종의 간화선(看話禪)을 가장 중시했으며, 화두로는 구자무불성(狗子無佛性)을 강조했다. 교학에 대해서는 선 수행에 들어가기 위한 하나의 방편으로만 그 필요성을 인정했다. 이러한 사교입선(捨敎入禪)적 입장에서 그는 종래 선종에서 소의경전(所依經典)으로 중시해온 〈능엄경〉과 〈반야경〉을 비판했다. 또 휴정은 염불을 인정했는데, 이때의 염불은 사후에 서방극락으로 가기 위한 것이 아니라 어디까지나 자기 자신의 내면에서 아미타불을 찾는 자성미타(自性彌陀)의 차원이었다.


즉 염불도 선 수행의 일종이었다. 실천으로서 그가 인정한 경전공부와 선 수행 및 염불은 조선 후기에 불교교단의 공통된 수행방법으로 체계화되었다. 유(儒)·불(佛)·도(道)의 3교는 명칭만 다를 뿐 그 가르침의 근본은 같다는 3교일치를 주장하기도 했으며, 성리학의 도통관(道統觀)에 대비되는 불교의 법통관을 새로 제시하여 임제종의 전통을 강조했다.


그의 제자는 1,000여 명이나 되었는데, 그중에서도 사명유정(四溟惟政)·편양언기(鞭羊彦機)·소요태능(逍遙太能)·정관일선(靜觀一禪)의 4대 제자가 조선 후기의 불교계를 주도하게 되었다. 저서로는 문집인 〈청허당집 淸虛堂集〉을 비롯하여 〈선교석 禪敎釋〉·〈선교결 禪敎訣〉·〈심법요초 心法要抄〉·〈삼가귀감 三家龜鑑〉·〈설선의 說禪儀〉·〈운수단 雲水壇〉 등이 있다. 묘향산 안심사(安心寺)와 금강산 유점사(楡岾寺)에 탑이 세워졌으며, 해남 표충사(表忠祠)와 밀양 표충사 및 묘향산의 수충사(酬忠祠)에 제향되었다.
*다음백과사전자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