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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압지출토명활산성비(雁鴨池出土明活山城碑).국립중앙박물관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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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압지출토명활산성비(雁鴨池出土明活山城碑).국립중앙박물관

푸른새벽* 2016. 2. 25. 00:21

 

 

 

 

 

 

 

 

 

 

 

 

 

 

 

안압지출토명활산성비(雁鴨池出土明活山城碑)

 

지정사항없음

국립중앙박물관

 

이 비는 문화재관리국(현 문화재청) 경주고적발굴조사단이 1975년 3월에서 1976년 3월에 걸쳐 안압지(雁鴨池)를 발굴할 때 그 석축(石築)에서 발견되었으며 본 비는 안압지가 조성되면서 그 석축의 호안석(護岸石)으로 이용되었다. 일찍부터 물속에 잠겨 있었고 그 뒤 안압지가 매몰되면서 풍화작용을 거의 받지 않았던 탓에 글자는 원형을 거의 그대로 유지하고 있다. 그러나 안압지 축조시 원비는 몇 동강이 난 듯한데 현재 그 중 일부분만 발견되었다. 동강난 비의 다른 부분도 역시 석축으로 이용되었을 가능성이 높지만 발굴 당시 세밀하게 조사되지 못하여 그 향방은 확인되지 않는다. 화강암으로 된 비편의 크기는 길이가 대략 30cm, 폭 20cm정도이며 자경(字徑)은 2~3cm이다. 현재 남아 있는 비는 원비의 하단(下端) 혹은 좌하단(左下端)으로 추정되며 4행(行) 26자(字)로서 해서체(楷書體)로 쓰여졌다. 글자의 판독은 그렇게 어렵지 않으나 일부만 남아 있어 전체적인 내용을 파악하지 못하는 것이 아쉽다. 

 

발견 이후 비문구조(碑文構造)의 유사성으로 말미암아 한동안 591년(진평왕 13)에 건립된 「남산신성비」의 하나로 간주되어 ‘남산신성비 제7비’로 명명되어 왔다. 그러나 외형이 적어도 지금까지 알려진 「남산신성비」와는 전혀 다를 뿐만 아니라 비문의 구조도 그와는 차이를 보이므로 「남산신성비」의 하나로 보기는 어렵다는 견해가 지배적이다. 특히 ‘간지(干支)’란 관등표기법의 사용으로 보아 「남산신성비」가 아니라는 사실이 분명하게 되었다. 그 까닭으로 안압지 호안석에 이용된 석재의 원산지를 추적한 지질학적 조사를 토대로 이 비를 「명활산성비」로 간주하고 『삼국사기』권4 진흥왕 15년조의 명활산성 개축기사(改築記事)에 근거하여 이때 세워진 것으로 보는 견해가 제기되었다. 그런데 1988년에 명활산성 성벽지에서 진흥왕 12년(551)에 건립된 것으로 추정되는 「명활산성비」가 발견되었는데, 비문의 구조나 형식·내용에 상당한 유사성이 보여 동일한 성격의 비임이 확실하게 되었다. 따라서 이 비의 연대는 551년 무렵으로 추정하여도 무방할 것으로 보인다.
*한국금석문연구소 영상정보시스템자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