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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주 흥법사지 진공대사탑비귀부및이수(眞空大師塔碑龜趺및螭首).강원 원주 본문

☆~ 풍경소리/강 원

원주 흥법사지 진공대사탑비귀부및이수(眞空大師塔碑龜趺및螭首).강원 원주

푸른새벽* 2016. 10. 5. 22:16


















흥법사 진공대사탑비귀부및이수(眞空大師塔碑龜趺및螭首)


비신은 일찍이 도괴되어 중간 부분은 없어진 채 깨어진 조각 4개가 국립중앙박물관에 보관되어 있고 절터엔 귀부와 이수만 남아 있다.다행히 비문이 『조선금석문총람』에 실려 있다.귀부와 이수는 비교적 보존상태가 양호한데,활발한 기법으로 깊게 새긴 운룡의 조각솜씨가 독특하다.고려 태조 23년(940) 에 건립한 것으로 귀부 높이 7.5m,이수 높이 9.9m로 매우 웅장하다.


본래 이런 구성은 아니었겠으나 현재 지대석이 없는 상태로,근육질이 엄청난 거북의 발이 지면을 꽉 누르고 있다.입을 약간 벌리고 여의주를 문 용머리는 온갖 힘을 기우려 포효한ㄴ 형상이며,거북등은 육각형의 귀갑문을 겹으로 조각하고 그 안에 연꽃무늬와 卍자를 번갈아 단아하게 장식하였다.그 위에 높다란 비좌를 마련하고 비신을 얹었겠으나 지금은 귀부 위에 바로 이수가 얹혀 있다.


9세기에 들어와 이수는 직사각형 가깝게 변형되고,거북등의 비신받침이 훌쩍 높아지면서,거북머리가 여의주를 문 용머리로 바뀌게 된다.이런 형식은 고려 초까지 유행한 것으로 쌍계사 진감국사대공부탑비(887),보령 성주사터 무염국사 탑비(880~890),그리고 이곳 흥법사터 진공국사탑비 등으로 이어진다.


이수의 정면에는 진공대사(眞空大師)라 쓰인 전액(篆額)이 있다.운룡들이 노니는 모습이 힘차고 화려하긴 하나,복잡하다고 느껴질 만큼 서로의 꼬임이 심해 오히려 절제미가 아쉽다.


비문은 태조가 직접 지었으니 진공대사와의 친분을 가늠케 함은 물론 진공대사가 당시에 끼쳤던 영향력을 짐작할 만하다.태조가 쓴 비문은 문신 최광윤이 당나라 태종의 글씨를 집자해 쓴 것으로 유명하다.따라서 고유의 구성미는 다소 떨어지지만,서체의 아름다움을 추구하며 공력을 쏟으려는 의지를 엿볼 수 있고,신라 말기에 이미 당 태종의 글씨가 전래되어 있었다는 중요한 입증자료가 된다.전체적으로는 당 태종이 좋아했던 왕희지의 서풍이 흐르고 있고,비신 뒷면에는 진공대사가 태종에게 올렸다는 글이 해서로 새겨져 있다.보물 제463호이다.
*한국문화유산답사회 지음 '답사여행의 길잡이'중에서*


 
진공대사탑비귀부및이수(眞空大師塔碑龜趺및螭首)


보물 제463호 
강원 원주시 지정면 안창리 517-2 


흥법사터에 남아 있으며, 통일신라 말에서 고려 초에 활약한 승려인 진공대사(869∼940)를 기리기 위해 세운 비이다. 비문이 새겨진 몸돌은 깨어진 채 경복궁으로 옮겨놓아 이 곳에는 비의 받침돌과 머릿돌만 남아 있다.


진공대사는 장순선사(長純禪師)밑에서 승려가 되었으며, 당나라에서 수도하고 공양왕 때 귀국한 후 왕의 스승이 되었다. 고려 건국 후에도 태조가 그의 설법에 감화하여 스승으로 머물기를 원하였으나, 이를 사양하고 소백산으로 들어가 수도하였다. 태조 23년에 입적하니 태조가 손수 비문을 짓고, 최광윤이 당나라 태종의 글씨를 모아 비를 세웠다.


비를 이고 있었던 돌거북은 거북이라기보다 용에 가까운 머리를 하고 있으며, 입에는 여의주를 물고 네 발로 바닥을 힘차게 딛고 있다. 목은 짧고 등껍질 무늬는 정육각형에 가까운데 그 안에는 만(卍)자 무늬와 연꽃이 새겨져 있다.


머릿돌은 앞면 중앙에 비의 명칭이 새겨져 있고, 그 주위에는 구름 속을 요동치는 용을 조각하였다. 용 두 마리가 서로 무섭게 노려보고 다른 두 마리는 양 귀퉁이에서 옆을 쳐다보고 있다. 뒷면에도 네 마리의 용이 사방을 주시하고 있는데, 웅장한 기운이 넘치면서도 섬세하게 조각되어 당시의 높은 예술수준이 엿보인다.


경복궁에 있는 비의 몸돌은 여러 개의 조각으로 깨져있어 부분적으로 비문을 알아보기가 힘든 상태이나, 대체로 대사의 생애와 업적 등이 기록되어 있다고 한다.
*문화재청자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