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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주 거돈사지(居頓寺址).강원 원주 본문

☆~ 절집.절터/강 원

원주 거돈사지(居頓寺址).강원 원주

푸른새벽* 2016. 10. 10. 17:37

















































거돈사지(居頓寺址)


정산리 입구에서 비포장길을 따라 한참 가다보면 작은 내(川)를 곁에 두고 잘 다듬어진 석축의 거돈사(居頓寺) 터가 나오는데,석축보다 먼저 눈에 띄는 게 거대한 느티나무다.거돈사터를 지켜온 천년 수령에 7.2m의 몸둘레를 자랑하고 있다.


거돈사터로 지정된 절터는 약 7500여 평.낮은 야산이 삼면으로 병풍처럼 절터를 감싸안고,내를 낀 앞쪽으로는 시원스레 트였다.나른할만큼 아늑하고 포근한 분위기다.현재 남아 있는 석물은 금당 앞의 삼층석탑과,금당터 위에 놓인 거대한 화강석 불대좌,원공국사 부도비,쓰임새를 알 수 없는 조각난 부재들이 한쪽에 모아져 있다.


거돈사는 신라시대로 창건시기를 잡고 있으나 연혁을 밝힐 만한 문헌 자료가 없다.절터에 남은 기와조각과 토기,석물들의 살핌에서 신라 말기부터 조선 전기까지 존속해 왔던 절로 밝혀지고 있으며,고려 초기에 대찰의 면모를 갖추었던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신라 말기는 구산선문이 개창되어 선종의 번성과 함께 지방불교가 중흥되던 시기였다.화엄종에 기반을 둔 교학불교가 귀족화.체제화되어가자 초기의 중국 유학승들은 서당지장(西堂智藏) 문하에서 수학하고 영향을 받아 귀국해 지방에 선종사찰을 대거 개 설한 것이다.자연 계파간의 산문이 확장되었으니 이것이 구산선문(九山禪門)이다.


그 무렵 왕실의 분쟁과 귀족사회의 혼란은 극에 달했고,따라서 중앙 집권세력이 분열하면서 변방세력이 급격히 팽창해갔다.지방에서 새로운 선불교운동이 일어난 것은 중아귀족에 반기를 든 셈이나,지방호족과는 연하이 순조로웠고 반향이 컸다.선불교는 사회변화와 궤를 같이 했던 것이다.


원주.여주를 지나는 남한강 줄기를 따라 크고 작은 수많은 절둘이 자리잡고 고려 초기를 기점으로 팽창의 절정을 이룬다.고달사.법천사.거돈사.흥법사 등이 모두 당대의 초고 선승들을 모시고 사세를 확장해왔음도 이를 뒷받침해준다.거돈사 역시 그 무렵에 창건되고 발전해왔을 것으로 추측된다.그래서인지 이웃해 있는 절들의 부도비나 석물의 형태.문양 등에서 비숫한 요소가 발견되기도 한다.


천태학승이었던 원공국사(圓空國師,930~1018) 가 이곳 거돈사에서 열반을 맞이한 인연 때문인지,아니면 거돈사가 본래 천태종의 사찰이었는지 확실치 않다.다만 교학과 천태학을 집대성한 대각국사 의천이 고려의 천태종을 창종했을 때 거돈사는 영암사(靈巖寺),지곡사(智谷寺) 등의 5대 교종사찰과 함께 천태종의 기반사원이 되었다.


고려 후기에는 다시 선종도량이 되어 수행승들이 머물렀으며 정각국사 지겸(靜覺國師 志謙,1145~1229) 드이 법맥을 이어왔다고 전한다.


한림대학교박물관에서 1989년부터 1992년까지 네 차례에 걸쳐 발굴한 거돈사터는 전각과 당우의 위치가 파악되었다.절터 남단에 석축을 높이 쌓아 지대를 조성했고, 절 중앙에 금당을 안치하였다.금당 정면 앞으로 아담한 삼층석탑을 배치하였으며,금당 뒤로는 뭄을 내고 긴회랑을 둘렀다.탑을 축으로 정며에 금당을 두었으며,금당을 중심으로 회랑을 두른 가람배치 형식을 취하였다.절터 뒤로는 넓은 공간을 층단 조성하여 강당과 전각(殿閣)들을 건립하였던 석축이 남아 있다.거돈사는 임진왜란 때 소실되었다고 하나 정확한 기록은 없다.그 뒤 폐사가 된 모양이다.사적 제168호이다.
*한국문화유산답사회 지음 '답사여행의 길잡이'중에서*


 
거돈사지(居頓寺址)


사적 제168호
강원 원주시 부론면 정산리 189 


한계산 기슭의 작은 골짜기를 끼고 펼쳐진 곳에 있는 절터이다.


발굴조사 결과 신라 후기인 9세기경에 처음 지어져 고려 초기에 확장·보수되어 조선 전기까지 유지된 것으로 밝혀졌다. 절터에는 중문터, 탑, 금당터, 강당터, 승방터, 회랑 등이 확인되었는데, 금당의 규모는 앞면 5칸·옆면 3칸으로 2층 건물이었을 것으로 보인다.


중문지 북쪽의 3층석탑(보물 제750호)은 처음 세워질 때 만들어진 것으로 생각되는데 신라 석탑의 전형적인 양식을 따르고 있다. 탑의 동쪽에는 원공국사 지조(930∼1018)를 위한 원공국사승묘탑비(보물 제78호)가 있는데, 1025년 최충이 문장을 짓고 김거웅이 글씨를 썼다. 탑비와 함께 원공국사승묘탑(보물 제190호)이라 불리는 부도가 있었는데 현재는 경복궁 뜰 안에 옮겨 놓았다. 거돈사는 고려 초기 불교계의 중심이었던 법안종의 주요 사찰이었지만, 고려 중기 천태종이 유행하면서 천태종 사찰로 흡수되었다.


거돈사는 신라말 고려초의 절터로서 보기 드문 일탑식 가람으로 주목할 만한 곳이다.
*문화재청자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