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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주 흥법사지(興法寺址).강원 원주 본문

☆~ 절집.절터/강 원

원주 흥법사지(興法寺址).강원 원주

푸른새벽* 2016. 10. 5. 22:15
























흥법사지(興法寺址)


앞쪽으론 남한강의 지류이며 섬강의 중류인 강줄기가 완만하게 흐르고 뒤쪽으론 영봉산 자락이 아늑하게 감싸안고 있어 풍치가 시원스런 안창리 흥법사터.절터가 약 만여 평에 이르렀다는 설로 보아 당대에 크게 드날린 거찰이었던 것 같다.창건년대는 불확실하지만 진공대사 부도비와 부도에 의해 통일신라 말기의 사찰로 추정해 볼 수 있고,진공대사가 구산선문 중 봉림산파에 소속된 스님이었으니 선종사찰이었음에 분명하다.


진공대사의 법호는 충담(忠湛,신라 경문왕 9~고려 태조 23년.869~940)이고,속성은 김씨이며,계림의 귀족 출신이다.극심한 혼란에 빠졌던 신라 말기,스님은 일찍이 부모를 여의고 출가하여 장순선사의 제자가 되었으며,다시 분열과 대립이 한창이던 후삼국시대에 세상을 마친다.


스님은 진성여왕 3년(889) 무주(지금의 경기도 광주) 영신사(靈神寺)에서 구족계를 받고 법상부(法相部)를 수학하였으며 율장을 공부했다.그 뒤 대사는 당나라에 유학하면서 새로운 전기를 맞는다.선수행의 깨달음을 전제로 한,수도자에겐 일생일대의 국면대결에 마주서는 계기였다.중국의 운개사(雲蓋寺) 정원(淨圓)대사를 찾아가 법을 묻고,교학을 연구하는 등 선교를 두루 섭렵하다가 918년에 귀국한다.


진공대사가 귀국하자 고려 태조는 곧 왕사로 임명하고 극진한 예우를 다하며 이곳 흥법사를 중건해준다.이때부터 흥법사는 흥법선원이 되고,선수행을 닦기 위해 찾아오는 스님들이 수백 명에 이르렀다.대사가 71세로 입적하니 시호를 진공(眞空)이라 내리고,이곳 영봉산 흥법사에 부도를 세웠다.또 고려 태조가 손수 비문을 짓고 당 태종의 글씨를 모아 새겨 진공대사비를 조성했는데,비는 파손이 심해 자세한 행적을 알아 볼 수가 없다.


조선시대 들어와 폐사가 된 것으로 보이는 그 너른 절터는 발굴의 흔적 하나 없이 모두 밭으로 변했고,지금은 진공대사 부도비의 귀부와 이수,삼층석탑 1기,금당터로 보이는 석물.축대.부재들이 흩어져 있다.절터에서 여러 형태의 와당.작은 말.코끼리.사자 등의 토우들이 상당수 발견되었다고 하는데,결정적인 명문은 발견되지 않았다.


그러나 찬찬히 살펴보면 두 곳의 절 건물터를 발견할 수 있다.한 곳은 길 위쪽으로,영봉산 끝자락을 깔고 앉은 너덧 가구의 마을이 있는데,이들 민가에서 잘 다듬어 쌓은 축대를 발견하게 되는 것이다.이 축대는 물론 민가를 짓기 위해 쌓은 것이 아니라 본래 절 건물터에 민가를 지은 것이다.뿐만 아니라 민가의 기둥을 받치고 있는 방형의 초석들은 모두 흥법사의 가람을 이루었던 초석들일 것이다.민가의 축대 밑이나 밭둑에는 수많은 기와조각과 벽돌조각이 널려 있다.


현재 원주시에서 다듬어놓은 절터는 삼층석탑 주변부터 진공대사 부도비 귀부와 이수가 있는 길 주변까지이니 절의 규모가 많이 축소되어 있다.


진공대사 부도비는 이곳에 귀부와 이수만 남아 있다.깨어진 진공대사부도비와 짝을 이루는 진공대사 부도(보물 제365호)는 현재 국립중앙박물관 뜰에 있다.진공대사 부도는 대표적인 팔각원당형이며 조각기법이 뛰어난데 1931년 총독부박물관에서 서울로 옮겨갔다.흥법사지(興法寺址)는 가원도 문화재자료 제15호로 지정돼 있다.
*한국문화유산답사회 지음 '답사여행의 길잡이'중에서*


 
흥법사지(興法寺址)


문화재자료 제45호(원주시)
강원 원주시 지정면 안창리 517-2외 7필지 


흥법사는 『고려사』에 기록된 내용으로 보아 신라 때 세워진 것을 알 수 있으며, 임진왜란 때 없어진 것으로 추측된다.

이곳에는 염거화상탑, 진공대사부도(보물 제365호), 진공대사탑비가 있었는데, 1931년 일본인들에 의해 강제로 반출되었다가 지금은 국립중앙박물관에서 보관하고 있다. 현재는 흥법사지삼층석탑(보물 제464호), 진공대사탑비귀부및이수(보물 제463호)만이 남아있다. 
*문화재청자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