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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처럼 떠나다

부여 만수산 무량사(扶餘 無量寺).충남 부여 본문

☆~ 절집.절터/충 남

부여 만수산 무량사(扶餘 無量寺).충남 부여

푸른새벽* 2017. 1. 30. 19:48


























































































































































































































부여 만수산 무량사(扶餘 無量寺)


'무량(無量)'이라,셀수 없다는 말이다.목숨을 셀 수 없고,지혜를 셀 수 없는 곳은 바로 극락이니 극락정토를 지향하는 곳이 바로 무량사이다.무량사로 들어가는 길을 따라 걸으면 졸졸 흘러내리는 개울물 소리가 귓속과 마음속에 낀 세속의 먼지를 말끔히 씻어 내며 그대로 극락세계로 인도하는 듯하다.어느덧 숲속에 아늑히 자리잡은 절집에 이르고.


무량사는 행정구역으로는 부여군 외산면 만수리에 있지만 무량사가 자리잡고 있는 만수산은 보령시 미산면과 부여군 외산면에 걸쳐 있다.따라서 부여에서도 갈 수 있고 홍성과 청양에서도 갈 수 있다.


만수산(575m) 기슭에 자리잡은 무량사는 9세기 때 사람인 범일(梵日)국사가 창건했고 신라 말 고승 무염(無染)대사가 머물렀다고 하나 현재의 모습으로 보아 고려 시대에 크게 중창된 듯하다.절 마당 가운데에 있는 오층석탑과 석등이 그때에 모셔진 것이다.그러다가 임진왜란을 맞아 크게 불탔는지 17세기 초에 대대적인 중창 불사가 있었다.주전인 극락전과 그 안에 모셔진 아미타삼존불상은 17세기 전반의 모습을 잘 보여 주고 있다.


조선 인조 때에는 술 잘 마시는 선승 진묵(震默)대사가 무량수불에 점안(點眼)을 하고 나서 기분이 좋아 나무열매로 술을 빚어 마시고 호방한 시심을 펼쳤다는 말도 전한다.


절집에 들어가기 전에 문 앞에서 문지기인 양 의젓하게 버텨 서 있는 당간지주를 먼저 만나게 된다.통일신라 시대의 정형화된 모습을 그대로 따르고 있는 고려시대의 것으로 본다.


일주문과 천왕문을 지나면 주요 공간인 극락전 영역에 이른다.그 한가운데에 장중하면서도 단아한 고려 시대 석탑이 자리하고,아울러 아담한 석등도 있다.한가운데 듬직하게 앉은 2층 전각인 극락전이 있으며 그밖에 석탑 옆쪽으로 500 나한을 모신 영산전과,명부전도 있다.


범종각에는 1636년에 조성한 조선 중기의 범종이 자리잡고 있다.높이 1.11m로 단아한 이 범종에는 고대 인도글자인 범자(梵字)가 있고 유곽 사이에 삼존불이,유곽 아래에는 패(牌)가 새겨지고 아래에는 당초문이 있어서,매우 화려한 조선 시대의 종 모습을 잘 보여 준다.


극락전에서 왼쪽 뒤쪽으로 계류 하나를 지나면 숨은 듯이 있는 산신각에 이르게 된다.이 산신각에는 특이하게도 매월당 김시습의 영정이 모셔져 있었으나 지금 그의 영정은 극락전 옆쪽 새로지은 전각에 있다.무량사 부도밭에는 그의 부도도 있다.
*한국문화유산답사회 지음 '답사여행의 길잡이'중에서*




만수산 무량사(扶餘 無量寺)


충남 부여군  외산면 만수리 116


무량사 창건에 대한 기록은 5종의 자료가 있으나 각각 차이가 있어 초창시기와 창건주, 창건연기를 명확하게 밝히기는 어렵다.  먼저 극락전 내에 보관되어 있는 『무량사중수기(無量寺重修記)』는 1915년에 제작된 현판이다. 여기에는 「新羅獻康朝-梵日國師 初入是山開創建事」라 하여 범일국사가 신라 헌강왕대에 창건했다고 적고 있다. 두 번째는 1931년에 작성된 『무량사내극락전중수기(無量寺內極樂殿重修記)』로 신라시대 범일국사가 창건하였다고 기록하고 있다. 세 번째는 1932년에 작성된 『부여군외산면만수산무량사중수기(夫餘郡外山面萬壽山無量寺重修記)』로 여기에는 신라 문성왕대에 범일국사에 의해 창건되었다고 하였다. 그리고 네 번째 자료는 1953년에 기록된 『무량사중수함(無量寺重修函)』의 ?무량사중수취지서(無量寺重修趣旨書)?에는 신라 흥덕왕 5년에 범일국사가 왕명을 받아 창건하였다고 하였다. 다섯 번째 자료인 1961년에 작성된 『무량사약지(無量寺略誌)』에는 신라 30대 문무왕대 범일국사가 창건하고 무량사라 하였다고 하였다.

 
이들 기록에 언급된 내용을 보면 창건년대는 다르나 모두 범일국사를 창건주로 꼽고 있는 공통점을 가지고 있다. 여기서 관건은 창건년대인데 여러 설에 적힌 창건년대를 정리하면, 문무왕대(661~681), 흥덕왕대(826~836), 문성왕대(839~857), 헌강왕대(875~886)가 되는데, 이 사이에는 무려 130년이란 햇수가 차이가 난다. 또한 앞서 언급하였듯이 5종의 기록은 공통적으로 창건주로 범일국사를 지목하고 있다는데 관심을 둘만하다. 그런데 범일국사는 810년에 태어나 태화 연간(827~835)에 입당(入唐)하여 847년 귀국하였다고 하므로 그의 활동시기는 주로 847년 이후로 보는 것이 타당하다. 또한  『조당집(祖堂集)』에서는 그가 귀국 후 40여 년 동안 굴산사(?山寺)를 중심으로 한 강원도 지역에만 머물렀다 전하고 있어, 범일국사가 개창했다는 설과 9세기 중반에 개창되었다는 설은 그대로 믿기에 어려움이 있음을 알 수 있다.

 
사찰에 현존하는 당간지주와 석등을 비롯한 석조물의 조성시기도 9세기 중반으로 올려 볼 수 있는 것이 없어 무량사 창건은 9세기 중반보다 더 뒤로 생각된다. 현재의 자료만으로는 무량사 창건연대를 명확히 단정하기 곤란하나 적어도 고려 초기에는 무량사가 건립되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한국전통사찰정보자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