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리 메뉴

바람처럼 떠나다

창덕궁 낙선재상량문 현판(昌德宮樂善齋上樑文懸板).국립고궁박물관 본문

☆~ 바람소리/박물관

창덕궁 낙선재상량문 현판(昌德宮樂善齋上樑文懸板).국립고궁박물관

푸른새벽* 2017. 2. 25. 17:09



















창덕궁 낙선재상량문 현판(昌德宮樂善齋上樑文懸板)


낙선재는 헌종이 한창 왕권강화를 시도하던 시기인 1847년(헌종 13)에 건립되었다. 이 건물은 조선시대에는 창경궁 영역에 속해 있었는데, 지금은 창덕궁에서 관리를 맡고 있어 창덕궁으로 입장해야 볼 수 있다. 단청을 칠하지 않아 사대부가의 건물과 유사해 보이는 낙선재. 헌종의 문집인 <원헌고>에 수록된 낙선재 상량문에는 낙선재의 이름의 유래와 함께, 단청을 칠하지 않은 이유가 잘 나타나 있다.

 

...듣건대, 순임금은 선을 보면 기뻐하여 황하가 쏟아지는 듯하였다. ... 붉은 흙을 바르지 않음은 규모가 과도하지 않게하기 위함이고, 화려한 서까래를 놓지 않음은 소박함을 앞세우는 뜻을 보인 것이다.
-원헌고 권16, 낙선재 상량문-

 

위의 기록을 통해서, 낙선재란 이름은 중국의 태평성대를 이루었던 순 임금의 고사에서 유래했으며, '선(善)을 즐거워한다'는 뜻을 담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리고 헌종이 화려함을 쫓지 않고 소박함을 내세우고자 한 의도에서 이곳의 단청을 칠하지 않았음을 파악할 수 있다.

 

헌종은 정조를 이어받고자 하는 의지를 담아 낙선재를 세웠다. 이것은 낙선재의 입지를 통해서도 잘 드러난다. 정조는 즉위 직후 개혁의 공간으로 규장각을 건립하였는데, 이때, 규장각의 2층은 수많은 책과 선왕의 어진을 보관하는 주합루 였다. 정조는 1782년(정조 6) 세자의 공간으로 중회당을 건립하며, 바로 연접하는 곳에 주합루를 모방한 소주합루(헌종대 승화루로 개칭)를 세워주었다. 헌종은 낙선재를 바로 이 소주합루에 기대어 그 옆쪽에 건립하였다.

 

덕이 적고 어리석은 나의 계술을 돌아보고, 아버지의 일을 이어받아 밝혀 도모하고, 건극(임금이 표준을 세우면 사방이 바루어져 세상이 평안해진다는 뜻)을 널리 베풀어 주겠다. ... 동벽에는 온갖 진귀한 서책들 빛나고, 서청에는 묵은 나무 휘날려 창이 영롱하다. 잘 꾸며진 서적은 유양의 장서보다 많고 아름다운 비단 두루마리는 성상이 을야(乙夜)에 볼 자료로다.
-원헌고 권16, 낙선재 상량문-

 

헌종은 낙선재를 건립하여 선조의 뜻을 이어받고자 했고, 실제로 낙선재 영역인 승화루에 많은 서책을 보관했다. <승화루서목>을 보면, 책이 총 3,742책이며 서화가 총 665점에 이른다. 이처럼 헌종은 승화루 옆에 낙선재를 건립하고 흥서하기 전까지 낙선재를 주요 활동 공간으로 이용함으로써, 규장각을 건립한 정조를 본받아 정치 개혁의 의지를 보이고자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