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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처럼 떠나다

대구 남평문씨세거지(南平文氏本里世居地).대구광역시 본문

☆~ 풍경소리/대구광역시

대구 남평문씨세거지(南平文氏本里世居地).대구광역시

푸른새벽* 2017. 5. 1. 21:09











































































































































































































대구 남평문씨세거지(南平文氏本里世居地)


대구 달성군 화원읍 본리리. 같은 집안 아홉 대소가만으로 한 마을을 이룬 인흥마을 남평 문씨 세거지.


동네 안쪽으로 들어서면 반듯반듯한 흙돌담길이 가로세로 몇 줄씩 뻗어 있다.듣기로는 여기에 터를 잡은 마을사람들의 조상이 정전법(井田法)에서 땅을 나누듯 우물 정(井)자 모양으로 기을 내고 집을 지어서 그렇다고 하는데 실제 모습이 꼭 들어맞는 것은 아니다.동네가 별로 크지 않은데다 길이 곧다보니 유현한 풍정을 바랄 수도 없고 골목 끝에서 매번 되짚어 나와야 하는 수고로움(?)도 따르지만 이 흙돌담길은 차례차례 살펴보는 게 좋다.집에 사람이 살 때,더구나 세심한 보살핌의 손길이 베풀어질 때 '사람 사는 집'의 윤기가 담장을 넘어 골목에까지 반짝임을 실감할 수 있다.


잔자갈이 곱게 깔려 자그락거리는 소리를 들으며 골목으로 들어서면 제일 먼저 눈에 드는 것이 높은 담장이다.민가의 담치고는 상당히 높아 낮아야 2m 안팎,높으면 3m 정도에 이르는데 필시 무슨 까닭이 있어 이리 담을 높게 쌓았겠지만 안에 사는 사람들은 좀 갑갑하지 싶다.골목골목을 두른 담장은 무너진 구석은 물론 흙 한줌,돌 하나 빠지거나 흘러내린 곳이 없다.담장 아래는 길게 자란 잡풀 한 포기 쉽게 눈에 띄지 않는다.작은 자갈들도 아마 빗물이 튀어 담장을 조금씩 파먹지 않도록 깔았으리라.그렇다고 이 골목길이 맨송맨송한 것은 아니다.마구 번져가는 담쟁이덩굴을 걷어내어 담을 보호하면서도 군데군데 뻗는대로 두어 운치를 살렸고,때로는 옥잠화.원추리.분꽃.금잔화 따위를 담 밑에 심어 멋을 부렸다.집집마다 매화나무.살구나무.오얏나무가 담장 너머까지 가지를 내밀어 열매가 떨어질 무렵이면 골목 안 자갈밭에 떨어진 살구나 매실,혹은 자두를 주워 그 시큰함을 맛볼 수도 있다.능소화는 떨어진 모습이 강렬하고 인상적인 꽃이다.시들지도 않은 생생한 주홍빛 꽃송이를 뚝뚝 땅 위에 떨군다.그렇게 떨어진 능소화가 어느 집 대문 앞을 밝히거나 줄기에 매달려 담 위를 기어가는 것도 이 골목 안이다.비록 일상생활이 이루어지는 공간이라 집안까지 살펴볼 수 없어 아쉽기는 하지만 골목만 차분차분 누비고 다녀도 마을의 풍치를 가늠하기엔 부족함이 없다.산 너머 연기나면 불 날 줄 알고 담장 위로 뿔 지나가면 소 가는 줄 짐작한다지 않는가.


골목길에서 미처 볼 수 없었던 인흥마을의 건축적 특색은 마을을 대표하는 건물 수봉정사(壽峯精舍)와 광거당(廣居堂)을 통해 미루어 볼 수 있다.


마을 첫머리에 견고하게 솟아 만만치 않은 솟을대문을 비껴 안으로 발을 들여놓으면 탄탄하고 무게 있는 건물에 적이 압도되어 가벼운 긴장감이 인다.수봉정사다.정면 6칸 측면 2칸의 일자형 겹처마 팔작지붕 건물로 이마에는 '壽峯精舍'라 쓴 위창 오세창(葦滄 吳世昌)의 전서체 편액이 걸렸다.수봉정사는 우리 전통건축이 얼마나 튼튼하고 정교하게 지어질 수 있는가를 본보기처럼 보여주는 건물이다.위가 잘린 원추형 정평주초 위에 놓인 가죽나무 두리기둥은 지름이 30cm는 너끈하여 지붕의 무게를 충분히 견디며 시각적 안정감을 준다.대들보 역시 민가의 그것치고는 대단히 육중하다.기둥머리의 주두,단면이 둥근 글도리,도리에 받쳐진 서까래,그 위로 덧대어진 덧서까래,기 모든 부재들이 굵직굵직하고 큼직하여 기둥이나 들보와 어울리며 집 전체를 대범하게 만든다.마루에 올라 걸어보면 살살 삐걱대는 소리가 아니라 깊은 울림이 있다.그렇다고 정교함이 뒤지는 것도 아니다.오히려 여느 건물에 비해 치밀함이 두드러진다.부재와 부재가 맞물리는 부분에는 거의 틈이 없고,기둥.들보.서까래 등은 트거나 갈라진 것이 그다지 눈에 띄지 않는다.마루 또한 처음 짜맞춘 모습 그대로여서 여모중방.장귀틀.동귀틀.마루널에 트집이 없음은 물론 널과 널 사이도 벌어진 곳을 찾기 어렵다.대개 조금씩은 사이가 뜨고 비틀리기 쉬운 문짝도 틀림없기는 마찬가지여서 앞.뒤.옆으로 달린 여러 개의 문짝이 하나같이 문 얼굴과 어긋남이 없다.어쩌면 이렇게 수많은 목재들이 제대로 아귀가 맞아 돌아가고 트집이 없는지 볼수록 놀랍다.다듬은돌 바른층쌓기한 반듯한 기단,그 위로 정렬한 듯 나란한 두리기둥,세살문으로 통일되어 좌우로 길게 펼쳐지는 훤칠한 문짝들이 서로 상승하며 빚어내는 정연한 아름다움도 쉽사리 얻어지는 것은 아니다.


이만한 집이 이룩되려면 여러 가지가 맞아떨어져야 하리라.먼저 대목의 솜씨와 눈썰미,예전 이름 있는 대목들은 나무의 성질을 파악하여 '나무가 무엇이 되고 싶은지'를 알고 있었다.예를 들면 기둥과 같은 수직부재는 뿌리 쪽을 밑으로 세우고,들보 같은 수평부재는 뿌리 쪽을 밖으로 눕혔다.집주인을 망하게 하려고 작정하기 전에는 '기둥을 거꾸로 세우지 않는다'는 말도 대목들의 정확한 눈썰미를 전제로 생겨난 속설이다.심지어 산의 북쪽 사면에서 자란 나무는 북쪽 벽에,남사면의 나무는 남쪽에 세울 줄 알아야 올바른 대목이라고 했다.수봉정사를 지은 대목의 수준은 이 정도를 넘어섰으리라.집을 보면 대목의 나무를 다루는 솜씨가 얼마나 능숙하고 노련한지.그 눈썰미가 얼마나 날카롭고 엄정한지가 한눈에 드러난다.


다음이 건축주의 여유와 안목,대목의 솜씨를 뒷받침할 만한 경제적 여유는 필요조건이지 충분조건은 아니다.서두르지 않고 일이 되어가는 것을 느긋하게 지켜보는 심적 여유와 전체를 조감하는 안목이 더 중요하다.


그리고 빠뜨릴 수 없는 점이 시대적 조건이 아닌가 한다.알다시피 조선조는 신분제사회였기 때문에 주택에도 신분에 따른 차별과 제한이 세세하게 가해졌다.이를테면 세종 때 시행된 가사규제(家舍制限)에서는 대군(大君) 60칸,군(君)과 공주 50칸,2품 이상 40칸,3품 이하 30칸,서민 10칸을 넘지 못하도록 신분에 따라 집의 규모를 제한했다.그밖에도 서민주택의 기둥은 4치,양반주택이라도 7치를 넘을 수 없다든지,서민주택에는 굴도리를 쓸 수 없으며 솟을대문을 낼 수 없고,민가에서는 초석을 제외하곤 다듬은 돌을 사용할 수 없으며 단청을 할 수 없고 두리기둥을 세울 수 없다든지 하여 그 제한은 복잡하고 까다로웠다.그대로 관철되지는 않았지만 골격은 유지되던 이러한 규제는 1894년 갑오개혁에 의해 사실상 무너졌다.양반가옥의 상징 같던 솟을대문을 너도나도 세우는 바람에 정작 양반집에서는 창피하다 하여 솟을대문을 헐고 평대문을 다는 일이 벌어진 것이 그뒤의 일이었다.수봉정사는 이렇게 집에까지 일일이 제한을 가하던 조선 왕조가 아예 멸망하고도 꽤 세월이 흐른 1930년대에 세워졌다.때문에 건축 외적인 제한 없이 도편수와 건축주의 의도대로 자유로이 집을 지을 수 있었으리라는 짐작이다.좋은 집을 지을 수 있는 전통과 안목은 이어지고 그것을 방해하는 제한은 사라진 시기에나 있을 수 있는 집이 수봉정사가 아닐까 싶다.


수봉정사에는 몇 가지 눈여겨 볼 만한 것이 더 있다.대문의 빗장을 거는 빗장둔테는 두 마리 나무거북으로 만들어졌다.목이 상하좌우로 움직여 잠근 빗장이 빠지지 않게 되도록 고안된 이 거북은,짧은 쪽은 30cm가 채 못 되고 긴 쪽은 그 이상이 되는 타원형의 등껍질이 둥글넓적하여 자못 큼직하다.두 겹으로 귀갑문이 음각된 등 한가운데 왼쪽 것은 곤괘(☷),오른쪽 것은 건괘(☰)가 새겨졌다.장수와 음양의 조화를 비는 뜻이 담긴 것은 아닐지.대문에서 몇 걸음 떨어져 석가산(石假山)의 가장 자리에 놓인 바위에도 거북이 한 마리 새겨졌다.몇 개의 음각선으로 몸체는 물론 머리.다리.꼬리까지 표현된 이 거북은 무슨 암각화같이도 보인다.집을 지을 때 냇가에서 주워온 돌로 그때 이미 거북무늬가 새겨져있던 것이라는데 처음부터 여기에 있었던 것처럼 천연스럽다.마당 왼편으로는 담장에 붙여 삭가산을 쌓고 이광원(彛光園)이라 새긴 석주(石柱)를 꽂았다.그리 크지 않은 조산(造山)에 소나무.전나무.회양목.배롱나무.모과나무.향나무.엄나무.대나무 따위가 마음대로 자란다.잔손질을 하지 않아 거친 듯 스산한 모습이 오히려 자연스럽다.오른쪽 화단 귀퉁이에는 밑둥 굵은 매화나무가 집과 함께 늙어간다.


수봉정사의 담장을 끼고 오른쪽으로 빠져나가면 마을 언저리에 광거당이 있다.광거당은 ㄱ자형 건물로 모양만 수봉정사와 다를 뿐 부분부분에 보이는 수법은 흡사하다.한 목수의 솜씨라는데 정교함은 수봉정사에 다소 못 미친다.같은 솜씨라도 공력을 쏟는 정도에 따라 이렇게 차이가 지는가보다.누마루 바깥에 추사의 글씨로 '壽石老苔池館'이란 편액이 걸렸다.'수석과 묵은 이끼와 못이 있는 집'이란 뜻이겠는데,지금은 그 어느 것도 눈에 띄지 않는다.집 또한 추사가 죽고 나서 한참 뒤에 세워졌으니 그의 글씨가 걸린 내력이 궁금해진다.오히려 지붕보다 높이 솟은 굵직한 대나무들이 들어찬 뒤뜰,장대한 회화나무,담장 밖으로 높이 솟은 노송들이 오늘날 광거당의 분위기를 이끈다.대문 안쪽의 헛담에는 깨진 기와조각으로 아로새긴 꽃 한송이가 질박하다.


인흥마을은 고려 때까지만 해도 절이 있던 곳이다.1264년 영일(지금의 포항) 오어사(吾魚寺)에 주석하던 일연스님이 옮겨와 11년이나 머물렀다는 인홍사(仁弘寺)가 바로 그 절이다.스님의 중창이 있은 뒤 나라에서 인흥(仁興)이란 절이름을 하사하였는데,지금의 마을이름은 여기서 유래한다.현재 세거지 어귀의 대추나무밭에는 석탑 부재의 일부가 남아 있을 뿐으로 인흥사는 언제 없어졌는지 알 수 없으며,고려 말 중국으로부터 목화씨를 들여와 '백성을 입힌 공로(衣被生民之功)로 우리에게 기억되는 문익점(文益漸)의 18대손 경호(敬鎬)가 약 150년 전 절터의 대웅전 자리에 종택을 짓고 후손을 위해 터전을 닦아 문씨들이 세거하게 되었다 한다.


수봉정사와 담을 사이에 두고 인수문고(仁壽文庫)가 있다.문중의 서고(書庫)이다.1,059종 만여 권의 고서들이 거의 산질(散帙)없이 완본으로 보관되어 있는데,한 집안에서 소장한 것으로는 질과 양 모두 보기 드물다는 평가다.그 내용은 국학자료보존협회에서 발행한 『한국전적종합목록』 제 5집에 수록되어 있다.일반에게는 공개하지 않는다.
*한국문화유산답사회 지음 '답사여행의 길잡이'중에서*




대구 남평문씨세거지(南平文氏本里世居地 )


대구광역시 민속문화재 제3호
대구 달성군 화원읍 인흥3길 16 (본리리)


문익점의 18대손 문경호가 터를 닦아 남평 문씨 일족이 모여 살던 곳이다. 원래 절이 있던 명당터를 구획하여 집터와 도로를 반듯하게 정리하고 집을 지었다. 지금은 조선 후기의 전통가옥 9채와 정자 2채가 남아 있으며, 도로에 접한 부분에는 나지막한 담을 쌓았다.


이곳의 대표적인 건물로는 수봉정사와 광지당·인수문고를 들 수 있다. 수봉정사는 세거지의 입구에 있는 정자로 정원을 매우 아름답게 꾸민 곳이다. 주로 손님을 맞고 일족의 모임을 열 때 사용하던 큰 규모의 건물이다. 광지당은 문중의 자제들이 학문과 교양을 쌓던 수양장소이다. 또 인수문고는 문중의 서고로, 규장각 도서를 포함한 책 1만여 권을 소장하고 있다. 처음에는 작은 규모였으나 후에 크게 늘려지었고, 도서열람을 위한 건물도 따로 지어놓았다.


주변경관이 아름답고 도로망도 편리하게 정리되어 있는 옛 마을이다.
*문화재청자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