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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 달성 도동서원(達城 道東書院).대구광역시 본문

☆~ 풍경소리/대구광역시

대구 달성 도동서원(達城 道東書院).대구광역시

푸른새벽* 2017. 5. 5. 11:28































































































































































대구 달성 도동서원(達城 道東書院)


한훤당 김굉필(寒暄堂 金宏弼,1454~1504).조선조 유학사를 더듬다보면 반드시 만나게 되는 인물이다.그는 고려 말의 정몽주에게서 비롯되어 길재.김숙자.김종직에게 차례로 전해진 유학의 도통을 이어받은 조선조 사림파의 적자(嫡子)라고 일컬어진다.서울 정릉동(지금의 정동)에서 태어났으나 증조부가 현풍 곽씨에 장가들어 서흥 김씨의 세거지가 된 현풍에서 성장하였다.청소년기의 그는 매우 호방하여 놀기를 좋아하고 남의 눈치에 거리낌이 없었다고 한다.그러나 18세 때 이루어진 박씨 부인과의 혼인은 그의 인생의 전환점이었다.결혼과 동시에 합천군 야로의 처가 근처에 한훤당이라는 서재를 짓고 학문에 열중하게 된다.동시에 세거지 현풍,처가인 야로 그리고 처외가인 성주의 가천 등지를 오가며 그곳의 사류들과 교유하며 견문을 넓혔다.


무엇보다 김종직과의 만남은 그의 일생을 결정지은 운명적인 사건이었다.그가 20세 되던 1474년 봄,김종직은 가까운 고을 함양의 군수로 있었다.이때 그는 김종직을 찾아 그의 문하에서 『소학』을 배우기 시작해서 마침내 김종직의 수제자로 성장함으로써 조선조 유학의 적통을 잇는 영광을 누리게 되지만,단지 그의 제자라는 이유만으로 끝내 죽임을 당하게 된다.26세에 생원시에 합격한 뒤에도 줄곧 학문에만 정진하던 그는 나이 마흔에야 경상감사 이극균의 추천으로 비로소 벼슬길에 나섰다.그뒤 사헌부 감찰,형조좌랑 등을 지냈으나 연산군 4년(1498) 김종직의 「조의제문」이 빌미가 되어 무오사화가 일어나자 김종직의 문도로서 붕당을 만들었다는 죄목으로 '장(杖) 80대'와 '원방부처'(遠方付處)의 형을 받고 평안도 희천으로 유배되어 5년간의 짧은 관직생활은 끝장이 났고,끝내는 연산군 10년(1504) 일어난 갑자사화 때 '무오당인'(戊午黨人)이라는 명목으로 이배(移配)된 귀양지 순천에서 50세의 나이로 사약을 받고 일생을 마감해야 했다.


김굉필은 억울하게 죽임을 당한 까닭에 중종반정으로 연산군이 쫒겨나고 중종이 즉위하자 곧 복권되었다.중종은 신진사림들을 중용하여 자신의 정치세력으로 삼았고,그 선두에 조광조가 있었다.조광조는 김굉필으 ㅣ직계제자였다.당연히 김굉필의 명예는 회복되어 죽은 지 3년 뒤인 중종 2년(1507)에 사면되면서 도승지에 추증되었고,그뒤로도 성균관 유생들의 문묘종사(文廟從祀) 건의가 계속되어 선조 8년(1575)에는 영의정에 증직되면서 문경(文敬)이라는 시호를 하사받았으며,다시 광해군 2년(1610)에는 대간(臺諫)과 성균관 및 각 도 유생들의 지속적인 상소에 의하여 동방오현의 한 사람으로 문묘에 배향되는 영예가 주어졌다.


그는 조광조.김안국.성세창.이장곤 같은 쟁쟁한 인물들을 제자로 배출할 정도로 생전부터 후학들의 존경을 받았고,사후에는 동방오현의 한 사람으로 사림의 추앙을 한몸에 모았다.그러나 정작 그의 학문과 사상을 이해하는 것은 쉽지가 않다.두 번의 사화를 겪으면서 그의 저술이 거의 모두 불태워졌기 때문이다.다만 문장 중심,정치 중심으로 아직 철학적인 단계에 이르지 못한 그때까지의 유학이 실천 중심,도학 중심의 이학적(理學的)인 성리학의 단계로 나아가는 물꼬를 튼 인물이라는 것이 그에 대한 전통적인 평가이다.
 


도동서원은 바로 환훤당 김굉필을 향사하는 서원이다.원래 1568년 현풍현 비슬산 기슭에 세워져 쌍계서원(雙溪書院)이라 했으나 임진왜란으로 불타버려 지금의 자리로 옮겨 건립했다.1604년 사당을 먼저 지어 위패를 봉안하고 이듬해 강당 등 서원 일곽을 완공했다. 이때의 건립을 주도했던 인물이 한훤당의 외증손이자 뛰어난 예학자 한강 정구와 퇴계 이황이었다.1607년 도동서원(道東書院)이라고 사액되었는데'성리학의 도가 동쪽으로 왔다'는 자부심 넘치는 의미가 그 이름에 담겨 있다.1865년 흥선대원군의 서원 철폐 때에도 훼철되지 않은 47개 서원 가운데 하나로 병산서원.도산서원.옥산서원.소수서원과 더불어 5대 서원으로 꼽힌다.서원 건축이 가져야 할 모든 건축적 규범을 완벽히 갖추고 있는 조선 중기를 대표하는 서원으로 평가된다.


현풍에서 도동리로 넘어가는 고개 다람재에는 도동서원을 한눈에 조감할 수 있다.오른편으로는 멀리 잦아드는 산줄기 사이로 꼬리를 감추며 낙동강이 유장하게 흐르고,왼편으로는 다복솔 들어찬 대니산이 몸을 낮추며 강으로 다가드는 산자락,고가 두어 채가 보이는 강마을을 곁에 두고 낙동강을 바라보며 동북향한 서원건물이 정연하다.


다람재를 내려서면 서원 건립을 기념하여 한강이 심었다는 은행나무가 늙은 가지를 잔뜩 드리운 서원의 앞마당에 이른다.앞을 바라보면 나직나직 막돌허튼층쌓기한 4단의 석축이 가지런하다.도동서원에는 이런 석축이 유난히 많아 사당에 이르기까지 무려 18개의 석단이 폭과 높이를 바꿔가며 전개된다.경사진 터를 적절히 나누어 넓은 곳에는 건물을 앉히고 좁고 가파른 곳에는 뜰을 가꾸었는데,쌓아올린 기법이 동일하여 통일성을 유지하면서도 높고 낮게,넓고 좁게 변화를 주어 율동감을 만들어낸다.직선이 만들어내는 율동감이다.


네번째 석축 위에 나래를 편 이층누각이 서원의 정문인 수월루(水月樓)이다.수월루는 애초 이곳에 서원이 들어설 때는 없었던 건물로 1855년 창건되었다."서원의 제도를 갖추려면 누각이 있어야 한다"는 생각과 "서원을 출입하기에 가파르고 답답하다"는 이유에서였다.지은 지 얼마 안된 1888년 불타버려 오랫동안 터만 남았다가 1973년 복원되었다.다른 건물의 담박함에 비하면 지나치게 기교적이고 부재들이나 구조도 빈약하여 오히려 도동서원의 품격에 흠이 된다.누각 아래가 문이지만 늘 닫혀 있어 지금은 관리사로 쓰이는 전사청(典祀廳)을 통해 드나들어야 한다.


수월루 안쪽은 사방이 담장으로 막힌 좁고 가파른 공간이다.강학공간으로 들어서는 진입영역으로,가운데 좁장한 계단이 가볍게 휘어지며 환주문까지 이어진다.환주문(喚主門 )- '주인을 부르는 문'이라는 뜻이 되겠는데 그 주인은 내 마음의 주인일 수도 있겠고 문 안에 있는 주인일 수도 있으리라.이 환주문이 아마 도동서원에서 가장 귀엽고 매력적인 건물이리라.갓 쓴 유생이라면 반드시 고개를 숙여야만 들어설 수 있는 작은 크기에 절병통이 얹힌 사모지붕을 이고 있는 모습을 예쁘다거나 귀엽다는 말밖에 다른 말로는 형용할 수가 없다.문턱이 있어야 할 자리엔 꽃봉오리를 새긴 돌을 박아 잠시 잠시 머물기를 유도하는 재치도 부려 놓았다.


환주문의 안쪽이 강당인 중정당(中正堂)과 기숙사인 동재.서재로 이루어진 강학공간으로 서원의 중심영역이다.높직한 기단 위에 중정당이 중정(中正)하고 그 앞 양쪽으로 동재인 거인재(居仁齋)와 서재인 거의재(居義齋)가 공손하다.환주문에서 중정당에 이르는 마당 가운데로는 납작하게 다듬은 돌을 깔아 사람 하나 지날 만한 돌길을 내었다.그 끝에는 낮은 축대를 횡으로 쌓아 중정당 들어선 지대와 동서 양재가 앉은 지대를 구별하였다.돌길과 만나는 축대 중앙에는 돌거북의 머리가 돌출되어 있는데,양쪽의 송곳니가 비죽이 나온 길게 찢어진 입을 앙다물고 이맛살을 찌푸리며 인상을 쓴 모습이 제법 사나워 보인다.중정당의 동쪽에는 판목을 보관하는 장판각이 있고 서쪽으로는 담장을 경하여 전사청이 자리잡았다.


계단의 디딤돌을 일곱 단으로 쌓을 만큼 높은 기단 위에 세워진 중정당은 정면 5칸 측면 2칸의 맞배지붕 건물이다.평면구성은 간단하여 가운데 세 칸은 대청이며 그 좌우로 한 칸 반짜리 온돌방을 들이고 나머지 반 칸에 마루를 깔아 대청과 연결시켰다.덤벙주초에 굵직한 민흘림 두리기둥을 세우고 그 위에 주심포를 짜 올렸으며 창방의 중간마다 화반을 받쳤다.지붕 끝은 겹처마로 정리하고 양 측면 박공에는 풍판을 달았다.주심포식 건물로 기단이 높은 탓인지 크기보다 웅건해 보인다.마치 흔들림 없는 도학자가 의젓하고 당당하게 버티고 앉은 듯하다.1605년 완공되었으며 서원을 감싸는 담장과 더불어 보물 제350호로 지정되어 있다.


중정당에서 무엇보다 흥미와 애착이 가는 부분은 기단이다.정면은 길이가 17m 정도,높이가 140cm 남짓 되며 측면은 대지의 상승과 비례하여 점차 낮아진다.다듬은 돌을 쌓아올라가다가 앞으로 약간 내민 판석을 가지런히 깔아 갑석을 삼고,그 위에 다시 1단의 갑석을 들여 깔아 마무리하였다.정면 중앙에는 양쪽으로 나누어 계단을 내었다.갑석 바로 아래에는 네 마리 용이 물고기와 여의주를 문 머리만을 내밀고 있는가 하면 다람쥐를 닮은 작은 짐승이 꽃송이를 옆에 두고 오르고 내리는 모습이 조각된 돌이 박혀 있기도 하다.측면에는 같은 수법으로 기단 위에서 다시 마루와 엇비슷한 높이까지 돌을 쌓아올리고 쪽마루를 깔듯이 판석을 덮어 '돌쪽마루'를 만들기도 하였다.


기단을 쌓아올린 솜씨는 기교라기보다는 정성 그 자체다.주변에서 나는 돌을 똑같은 크기가 하나도 없게 다듬어 마치 조각보를 깁듯이 하나하나 짜맞추었다.찬찬히 들여다보면 평범하게 네모진 돌보다 여섯 모 이상 각이 진 돌들이 더 많아 보일 정도로 공력을 들였는데,심지어는 12모 진 돌이 있을 정도다.전체의 모습은 커다른 조각보를 길게 펼쳐놓은 듯도 하고 몬드리안의 추상 작품을 돌로 번안한 듯도 하다.그러나 중정당 기단이 가진 색감은 조각봐에도 몬드리안에도 없는 이 기단 고유의 것이다.쑥빛,연한 잿빛,엷은 가짓빛,이런 빛깔들이 농도를 달리하며 만들어내는 은은한 색감과 그 조화는 어떤 화려한 빛깔로도 당하기 어려울 것이다.우리나라 건축물 가운데 이만큼 아름다운 기단을 가진 것도 그리 많지는 않을 것이다.


동재와 서재의 구조와 크기가 같아 서로 대칭을 이루는 정면 3칸 측면 1칸의 맞배지붕 건물이다.한 칸은 마루이고 두 칸은 온돌이다. 재미있는 사실은 자연 방위상으로는 서쪽에 놓인 거인재를 동재라 부르고 동쪽에 있는 거의재를 서재라 일컫는다.서원의 좌향이 북향인 데서 오는 변화로서 자연방위에 관계없이 인간의 인식을 우위에 두는 성리학적 세계관의 작은 표현이라 하겠다.


중정당을 돌아들면 잘 가꾸어진 사대붓집의 후원 같은 경관이 나선다.가파른 경사지를 5단의 얕은 축대를 쌓아 분할하고,그렇게 생겨난 터에 모란을 듬성듬성 심었으며 배롱나무에게도 한 자리를 베풀었다.가운데에는 내삼문으로 오르는 계단을 내었다.거칠긴 하지만 봉황으로 보이는 짐승을 새긴 소맷돌까지 갖춘 계단은 지세에 맞추어 자연스런 곡선을 그린다.


내삼문을 들어서면 사당이다.제향공간으로 서원의 가장 높은 곳에 위치한다.정면 3칸 측면 3칸의 겹처마 맞배지붕 건물이다.정면과 측면의 칸수가 같지만 정면의 칸살이 넓어 평면은 장방형이다.19세기에 지어진 건물로 추정하지만 기단은 서원이 지어지던 때의 것으로 본다.기단은 장방형으로 다듬은 면석을 한 줄로 세우고 그 위를 판석으로 덮었다.정평주초 위에 두리 기둥을 세우고 주심포를 짜 올렸다.정면에는 칸마다 밖여닫이 널문을 달았으며 내부는 통칸으로 틔웠다.자못 근엄해 보이는 건물이다.사당이 되다보니 제향을 받드는 날이 아니면 거의 언제나 공개되지 않아 찾는 이의 출입이 어렵다.


서원에서 행해지는 가장 중요한 예법은 봄 가을의 향사와 매월 두 차례 있는 분향례이다.도동서원에는 이러한 제례를 위한 설비들이 남아 있다.중정당 서쪽 마당에 모를 접은 사각형 돌기둥에 받쳐진 정사각형의 판돌이 하나 놓여 있다.생단(牲壇)이라는 것이다.생(牲)이란 향사 때 제수로 쓰일 소나 돼지.염소와 같은 짐승을 말하며,생단은 제사 전날 제관들이 그 생을 올려놓고 품질이 제수로 적합한지를 검사하는 곳이다.현존하는 생단 가운데 규모는 크지 않으나 비교적 정교하게 가공된 예이다.강당의 대청 앞 기단의 중앙에 놓인 정료대(庭燎臺)는 기 돌기둥과 사각형의 상석으로 이루어졌다.정료대란 상석 위에 솔가지나 기름통을 올려놓고 불을 밝히는 일종의 조명대다.서원의 정료대는 야간에 치르는 제례 때 쓰이며,보통 사당 앞 마당에 설치된다.도동서원처럼 강당 바로 앞에 놓이는 경우는 그리 흔치 않다.사당의 동쪽 담장에는 차(次)라고 하는 정사각형의 구멍이 뚫려 있다.제사에 쓰인 제문을 태워저리는 설비이다.여느 서원에서는 별도의 차를 두지 않고 사당 기단의 한 모퉁이에서 제문을 태워버리지만 도동서원에서는 이렇게 특수한 장치를 마련하였다.담장의 한 부분을 정사각형으로 파내고 담장 바깥과 통하도록 수키와를 끼워 굴뚝의 역할을 하도록 했다.사당 앞에는 화사석이 분실된 석등이 서 있다.절집의 팔각석등과는 달리 사각을 기본으로 했다.정료대와는 조명방법이 달라 등잔이나 호롱불을 넣어 어둠을 밝히던 시설이다.


도동서원의 담장은 중정당과 더불어 보물로 지정되어 있다.드문 일이다.담장은 진흙을 섞어가며 막돌을 몇 줄 쌓아올린 다음 황토 한 겹 암키와 한 줄을 되풀이하다가 지붕을 덮어 마무리했다.그리고 아래위 두 줄로 듬성듬성 수막새를 박아 무늬를 내었다.수월루를 복원할 때 새로 쌓은 담장을 제외하면 도동서원의 담장은 모두 이런 모양이다.돌과 흙과 기와를 골고루 이용한 견고한 축조기법이나 수막새의 장식무늬도 귀하지만,이 담장이 지형에 따라 꺾이고 높낮이가 바뀌며 만들어내는 담장 면의 변화와 담장 지붕이 그리는 스카이라인은 우리 건축에서나 경험할 수 있는 눈맛을 준다.한 가지 흠이라면 새로 복원한 것이라 거기에 세월의 무게가 실리지 않은 것이다.그래도 서원을 오른쪽으로 끼고 돌아 서원의 측면과 후면에서 보면 여러 건물들의 지붕선과 어우러지며 각지게 흘러내리는 담장의 모습은 무척 상쾌하다.


도동서원은 부분과 전체가 성리학적 세계관을 구현하고 있다.그러나 도동서원이 유교적 규범과 예법에만 충실했다면 건축적 평가가 지금처럼 높기는 어려웠을 것이다.비록 뒤늦게 지어지고 건축적으로도 문제가 있지만 자연을 끌어들이는 수월루,수월루가 없었다면 서원의 정문이면서 자못 심각한 의미를 담고 있었을 환주문의 미묘한 크기와 모양,중정당의 기단을 비롯한 요소요소에서 빛나고 있는 석물들,담장의 선과 면들이 만들어내는 절묘한 분위기 - 이런 파격과 유희적 요소들이 있음으로 하여 도동서원은 건축적으로 완성되고 균형잡힌 건축공간으로 남을 수 있었던 것이다.
*한국문화유산답사회 지음 '답사여행의 길잡이'중에서*


 


대구 달성 도동서원(達城 道東書院)


사적  제488호
대구 달성군 구지면 도동리 35번지 도동리 35번지


도동서원은 1605년(선조38) 지방 유림에서 한훤당 김굉필선생을 추모하기 위하여 세운 서원으로 조선중기 전학후묘(前學後廟)의 전형적 배치형식과 강당과 사당의 공포양식 및 담장 구성수법 등에서 건축적 특성을 보여주고 있다.


강당·사당과 이에 딸린 담장은 보물 제350호로 지정되어 있으며, 서원 전면에 위치한 신도비, 은행나무 등을 포함한 서원 전역을 국가지정문화재(사적)으로 지정하여 보존·관리하고있다.


※(도동서원 → 달성 도동서원)으로 명칭변경 되었습니다. (2011.07.28 고시)
*문화재청자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