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괴산 화양서원(槐山 華陽書院).충북 괴산 본문

☆~ 풍경소리/충 북

괴산 화양서원(槐山 華陽書院).충북 괴산

푸른새벽* 2018. 1. 3. 20:57

































































































































괴산 화양서원(槐山 華陽書院)


충북 괴산군 청천면 화양동길 188


속리산국립공원 화양동 지구인 충청북도 괴산군 청천면 화양리의 화양동 계곡은 경치가 빼어난 명승지로 꼽힌다.《택리지》의 저자 이중환李重煥은 화양동 계곡의 경관을 금강산 만폭동과 비교하면서 삼남지방에서 제일가는 명승이라고 하였다.이와 같은 명승지를 더욱 유명하게 만든 것은 일생을 주자학 연구에 몰두한 거유巨儒 우암尤菴 송시열宋時烈((1607~1689)이 만년에 이곳에 거처를 정하고서 학문을 닦고 가르치다가,사후에는 그의 학문과 덕행을 기리는 화양서원이 건립되었기 때문이다.


깨끗한 반석과 수정같이 맑은 계곡수,기암절벽과 울창한 숲이 한 폭의 진경산수화 같은 절경을 이루고 있는 화양동 계곡에서도 특히 경치가 아름다운 아홉 군데를 일러 '화양구곡'이라 일컫는데,이는 송시열의 제자 권상하(權尙夏, 1641~ 1721)가 주자의 〈무이구곡〉을 본떠서 화양구곡이라 이름 지은 것이다.구곡은 계곡의 하류에서 시작하여 거슬러 올라가면서 명소마다 경천벽擎天碧.운영담雲影潭.읍궁암泣弓岩.금사담金沙潭.첨성대瞻星臺.능운대凌雲臺.와룡암臥龍巖.학소대鶴巢臺.파곶巴串이란 이름이 붙여져 있다.


우암 송시열이 이곳 화양동에 거처를 정한 것은 1666년(현종 7)이었다.화양구곡 중 제2곡인 운영담  근처에 '화양계당華陽溪堂' 이란 이름의 5칸 초당을 짓고서 거처로 정하였는데, 우암은 다시 제4곡인 금사담 위 바위에 독서당인 암서제巖書薺를 짓고 기거하였다.이 화양계당과 암서제가 화양서원과 만동묘萬東廟의 기반이 되었다.


우암 송시열은 당파에 따라 칭송과 비판이 극명하게 갈리는 유학자이다.그러나  송시열은 《조선왕조실록》에 3000번 이상이나 이름이 거론되는 정치인이고,유학자이자 경세가였다.


송시열은 외가가 있는 충청도 옥천군 구룡촌에서 태어났으며,8세 때부터 일족인 송이창宋爾昌(1561~1627)밑에서 수학하였다.이때 그보다 한 살 위인 송이창의 아들 동춘당同春堂 송준길宋浚吉 (1606~1672)과 함께 공부하였다.그리고 24세 되던  해에 사계沙溪 김장생金長生의 문하에 들어가 본격적인 학문을 닦기 시작하였다.그러나 다음 해 김장생이 세상을 떠나자,우암은 다시 김장생의 아들인 신독재愼獨齋 김집金集(1574~1656)을 스승으로 모셨으며,1633년(인조 11)생원시에 장원으로 뽑혔다.우암은 이때부터 학문적인 명성을 얻어,29세 때 봉림대군(훗날의 효종)의 사부가 되었다.그러나 이듬해 병자호란이 일어나 소현세자와 봉림대군이 청나라에 인질로 잡혀가자 낙향하여 학업에만 몰두하였다.


송시열은 효종이 즉위하자 출사하여 사헌집의에 올랐으나,당시 집권당인 서인 중에서도 청서파淸西派에 속했던 그는 공서파攻西派 김자점金自點이 영의정이 되자 사직하고 낙향하였다.광해군을 폐위시키고 인조반정을 성취시키는 데 적극적으로 가담하여  공을 세운 일파를 공서파라 한 데 대하여 소극적인 태도를 취한 일파를 청서파라  하였는데,이듬해 김자점이 파직되자 우암은 다시 출사하였으나 그가 지은 〈장릉지문長陵誌文〉에 청나라 연호를 쓰지 않았다고 김자점이 청나라에 밀고함에 따라 이번에도 사직하고 낙향하였다.


우암이 다시 출사한 것은 1658년(효종 9)이다.효종의 부름을 받고 이조판서에 오른 우암은 효종과 은밀하게 독대하여 북벌의 의지를 다졌다.효종은 대군 시절  8년 동안 청나라에 볼모로 끌려갔던 병자호란의 치욕을 갚고자 하는 원한이 깊었고,우암은 춘추대의의 확립,즉 임진왜란 때 나라를 구해준 명나라가 오랑캐의 나라에게 망한 치욕을 씻겠다는 차원에서 효종과 뜻을 함께하였던 것이다.


우암은 효종의 절대적인 신임 속에서 북벌 준비를 하였으나,김자점 일파가 이를 청나라에 밀고하고 또 다음 해 효종이 갑자기 승하함으로써 북벌 계획은 수포로 돌아갔다.뿐만 아니라 효종의 상喪에 인조의 계비인 자의대비 조씨의 복상服喪 문제로 제1차 예송禮訟에 휘말리게 되었다.이때 서인의 지도자로 활약하던 우암은 삼년복을 입어야 한다며 삼년설三年說을 주장하는 남인 측의 주장과는 달리 기년복을 입어야 한다는 기년설朞年說을  주장하여 채택케 하였으나 이 논쟁은 장기화되었으며,그는 다시 낙향하기에 이르렀다.


이후 우암은 1668년(현종9) 우의정이 되었으나 좌의정 허적許積과의 불화로 사직했다가 1671년에 다시 우의정이 되고 이듬해 좌의정에 오르지만,1674년(현종 15) 효종의 비인 인선대비가 승하하자 다시 자의대비의 복상 문제가 논의되면서 제2차 예송이 벌어졌다.이때는 대공복大功服을 입어야 한다는 서인의 주장이 대립하였는데,현종은 남인 측의 기년설 주장을 받아들임으로써 서인이 실각하고,우암은 제1차 예송 때 기년설을 채택케 한 죄로 덕원.웅천.장기.거제.청풍 등지로 유배되었다.


님이 혜오시매 나는 전혀 믿었더니
날 사랑하던 정을 뒤손대 옮기신고
처음에 뮈시던 것이면 이대도록 설우랴


당쟁의 소용돌이 속에서 유배를 떠난 우암이 유배지에서 연군戀君의 정을 읊은 시조이다.'임께서 나를 헤아려 주시오매 나는 전혀 믿었더니/ 나를 사랑하던  정을  누구에게 옮기셨는가 / 처음부터 미워하시던 것이면 이토록 서러울까' 라고 놀한  이 시조는 작자와 작품의 배경을 모르면 사랑하다 버림받은 한 여인의 서러운 노래로 읽힐 수도 있으나,우암이 임금을 그리워하는 충성심에서 나온 시조이다.'나를 사랑하던 정을 누구에게 옮기셨는가'라고 임금에게 묻는 원망투의 솔직한 표현에서 소박한 인간미가 느껴진다.


우암이 유배에서 풀려난 것은 1680년(숙종 60의 경신대출척으로 남인이 실각하고 서인이 재집권한 뒤였다.그는 영중추부사가 되고,1683년에는 치사한 뒤 봉조하奉朝賀가 되어 화양동에 은거하였다.그러나 1689년(숙종 15)의 기사환국己巳換局으로 우암은 관직이 삭탈되고 제주도에 위리안치되었다.숙종이 원자(훗날의 경종)를 정호定號하자 이를 시기상조라 하여 반대하는 상소를 올렸기 때문이었다.우암은 국문을 받기 위하여 유배지 제주도에서 상경하던 도중 정읍에서 사약을 받고 83세를 일기로 생을 마감하였다.제자인 명제 明齊 윤증尹拯(1629~1714)과의 갈등으로 노론과 소론으로 분당되자 노론의 영수가 되어 당을 이끌었으나 서인과 남인,또는 서인 중에서도 노론과 소론 등의 치열한 당쟁의 한복판에 섰던 우암은 끝내 당쟁에 의해 사사된 것이다.


우암 송시열은 1694년(숙종 20)의 갑술환국甲戌換局으로 서인 정권이 재등장하자 관작이 복구되고 문정文正이란 시호가 내려졌다.그리고 화양서원을 비롯하여 수원의 매곡서원梅谷書院, 정읍의 고암서원考巖書院, 충주의 누암서원樓巖書院, 덕원의 용진서원龍津書院, 공주의 충현서원忠賢書院, 문의의 귀봉서원龜峯書院, 연산의 돈암서원遯巖書院,영동의 초강서원草江書院 등 전국 70여 개 서원에 배향되었고,1756년(영조 32)에는 문묘에 배향되었다.


화양서원은 갑술환국으로 남이 정권이 몰락한 뒤인 1695년에 우암의 문인인 권상하.이수언李秀彦(1636~1697).정호鄭澔(1648~1736) 등이 주축이 되어 화양동 입구의 만경대萬景臺에 건립하였다.그리고 이듬해인 1696년(숙종 22)에 사액을 받았다.


우암을 추모하는 서원을 건립한 권상하는 다시 스승이 유서로써 당부한 만동묘萬東廟 건립을 서둘렀다.우암은 화양구곡 가운데 제5곡인 첨성대 아래 암벽에 임진왜란과 조선을 도와준 명나라의 은혜를 잊지 않기 위하여 '非禮不動'과 '萬折必東'이란 글씨를 새겨놓았다.'非禮不動은  명나라  마지막 황제 의종의 어필이고,'萬折必東'은 선조가 명나라의 도움에 감사하다는 뜻으로 쓴 '再造藩邦 萬折必東'을 새긴 것으로 '萬東廟'라는 이름은 여기서 따온 것이다.


임진왜란 때 조선을 도와준 데 대한 보답으로 명나라의 신종과 의종을 제향하는 만동묘가 건립된 것은 1703년(숙종 29)이다.권상하가 유림을 동원하여 지은 것이다.국가에서는 전답과  노비를 하사하였으며,1704년(숙종 30) 첫 제향을 지냈다.춘추로 행해지던 만동묘의 제향을 화양서원에서 주관하였는데,서원과 만동묘는 상당한 거리가 있었기 때문에 불편한 점이 많아 1709년(숙종 35) 만동묘 아래 오른쪽으로 서원을 이건하였다.우암이 효종의 제삿날 엎드려 통곡하였다는 읍궁암을 앞에 두고 세운 것이다.대부분의 사당이나 서원이 남향이거나 동향  혹은 동남향으로 짓는데,화양서원과 만동묘가  북향하고 있는 것은 명나라를 향한 사대의식 때문이었다.


이 무렵 만동묘와 화양서원은 노론 세력의 구심점이 되었고,노론이 계속 집권함에 따라  국가의 보호 아래 거대한 정치 세력을 형성하기에 이르렀다.그러므로 송시열이 문묘에 배향되자 화양서원의 위세는 하늘을 찌를 듯하였다.권력기관으로  변질된 화양서원을 상징하는 이른바 '화양묵패華陽墨牌'는 누구도  그 통첩을 어길 수 없는 무소불위한 권력의 상징이었다.


묵패란  본디 서원의 공문서에 찍는 검은 도장이지만,화양묵패는 화양서원의 권력을 빌려 이익을 도모하는 무뢰배들이 각 고을의 수령과 양민들을 토색질하는 데 사용한 협박장과 다를 것이 없었다.그들은 제수 비용을 내라는 명목으로 각 고을에 화양묵패를 보내고,향사 때 유생들을 대접한다는 명목으로 양민들의 재산을 거두어들이면서 잘 따르지 않는 자는 서원으로 잡아들여 사형私刑을 가하였다.집권하기 전의 흥선대원군이 이곳 화양서원에 들렀다가 유생들에게 봉변을 당했다는 이야기는 이 서원의 위세가 어느 정도였는지를 짐작케 하는 일화로 널리 알려져 있다.


관학이 부진함에 따라 명현을 제사하고 청소년을 모아 교육함을 목적으로 세워진 사설 교육기관인 서원은 우리나라 최초의 사액서원인 소수서원을 시작으로 각처에 설치되어 명종 이전에 설립된 서원이 29개소,선조 때는 124개소,숙종 때는 1도에 80~90개소를 헤아리게 되었다.한편 사액서원은 일종의 특권적인 곳이 되어 서원에 딸린 토지에는 세금을 물리지 않았고, 또 양민이 서원의 노비가 되어 군역을 기피하는 곳이 되었다.또한 유생은 향교보다 서원에 들어가 학문을 연마하는 대신 붕당에 가담하여 당쟁에 골몰하고,서원의 권력을 업고 양민을 토색하는 폐단이 많았다.이와 같은 서원의 남설濫設과 누설累設은 나라의 골칫거리가 되어 인조 때는 서원의 설치를 허가제로 하였고,효종 때는 서원을 누설한 자는 처벌하는 규정을 발표하였다.그리고 그 후에도 서원 정비에 노력하였으나 큰 성과를 거두지 못하였다.그러나 1864년(고종 1) 흥선대원군은 집권하자 서원에 대한 모든 특권을 철폐하였고,이듬해에는 만동묘를 철폐하였으며,1871년(고종 8)에는 노론 사림의 강경한 반대에도 불구하고 민폐의 온상이던 화양서원을 철폐하기에 이르렀다.


만동묘는 흥선대원군이 실각한 후인 1874년(고종 11) 재건되어 일제 강점기에도 유생들이 모여 비밀리에 제향을 계속하였으므로 일제 때 조선총독부가 강제로 철거하였다.그리고 만동묘정비는 일본인들이 정으로 쪼아 글자를 알아볼 수 없게 훼손한 후 땅에 묻었으나,1983년 홍수 때 찾아내어 옛자리에 세워놓았다.또한 화양서원 철폐와 함께 서원 묘정비도 땅에 묻혔던 것을 광복 후에 찾아내어 다시 세워놓았다.


조선시대 성리학의 중심지 중 한 곳이었던 화양동 계곡의 우암 송시열의 유적은 1999년에 '괴산 우암 송시열 유적'이란 이름으로 사적 제417호로 지정되었다.그동안 빈 터에 묘정비만 세워져 있던 만동묘 터와 화양서원터에는 복원 사업이 이루어져 2005년 10월경에 마무리 되었다.


만동묘의 외삼문을 들어서면 3계三階와 5계五階가 두 번 중첩되고,다시 천지를 상징하는 아홉 계단을 오르면 내삼문인 성공문星供門에 이르는데,다시 두 계단을 오르면 정면 5칸,측면 2칸의 맞배지붕 사당 건물인 만동묘가 있다.현재 비각이 세워져 있는 만동묘정비는 외삼문을 들어서면 오른쪽에 있다.그리고 외삼문 앞 오른쪽에 위치한 정면 4칸,측면 2칸의 맞배지붕 건물은 전사청이며,전사청 옆의 동향으로 세워져 있는 정면 5칸의 팔작지붕 건물은 풍천재風泉齋이다.또한 중반청 오른쪽으로 담장을 둘러쌓아 별도의 구역을 마련한 곳에는 우암 송시열을 제향하는 사당이 있다.정문인 승삼문承三門을 들어서면 정면 3칸,측면 2칸의 맞배지붕 건물인 사당이 세워져 있는데,서원이 훼철되기 전에는 이곳 사당의 숙종의 어필인 '華陽書院' 편액이 걸려 있었다고 한다.'承三門'은 '우왕禹王과 주공周公과 공자孔子의 세 성인을 계승하고자 한다'는 뜻을 취한 것이다.


현재 만동묘정비는 충청북도 기념물 제25호이고,화양서원 묘정비는 충청북도 기념물 제107호로 지정되어 있으며,우암의 독서당이던 암서재는  충청북도 유형문화재 제175호로 지정되어 있다.그리고 괴산군 청천면 청천리에 위치하고 있는 우암 송시열의 신도비와 묘소는 충청북도 기념물 제10호로 지정되어 있다.신도비는 1779년(정조 3)에 세워졌으며,비문은 정조의 어필로 알려져 있다.


우암 송시열은 율곡 이이,사계 김장생으로 이어지는 기호학파의 적통을 이어받은 당대 최고의 학자였다.비록 성격이 과격하여 많은 정적을 두었으나 뛰어난 학식으로 많은 학자를 길러냈다.우암의 학맥을 기록한 책인 《華陽淵源錄》의 기록에 따르면 그의 제자는 무려 900명에 이르고,그의 제자 가운데는 당상관이상의 벼슬에 오른 이만도 54명이었다고 한다.또한  우암은 방대한 저술을 남겼는데,그 많은 책들은 《宋子大全》 이란 이름으로 전하고 있다.
*이호일 지음 '조선의 서원'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