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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릉선교장(江陵 船橋莊).강원 강릉 본문

☆~ 풍경소리/강 원

강릉선교장(江陵 船橋莊).강원 강릉

푸른새벽* 2018. 6. 19. 13:37






































































































































































































강릉선교장(江陵 船橋莊)


중요민속자료 제5호
강원 강릉시 운정동 431 


경포대에서 대관령 쪽으로 향하면 노송 수백 그루가 우거진 골짜기에 있고 그 사이로 날아갈 듯 추녀를 살짝 드러내고 있는 살림집이 있다.강원도내의 개인 주택으로서는 가장 넓은 집인 선교장은 조선 시대 상류 계급이었던 전주 이씨 일가의 호화 주택이다.당시 이씨 일가는 '만석꾼' 이라는 소리를 들을 정도로 대지주였는데,평야가 적은 이곳에서 '만석꾼'이란 너른 남도의 그것과는 엄청나게 다른 부(富)였을 것이다.


경포호가 지금보다 훨씬 넓었을 때는 배를 타고 건너 다닌다 하여 '배다리마을(船橋里)이라고 불렀는데 선교장(船橋莊)이란 이름은 바로 거기서 유래한다.


전주 이씨 일가가 이 집으로 이사 온 것은 효령대군의 11세손인 이내번 때였다.이내번은 처음에 경포대 주변의 저동에서 살았는데,
족제비 떼를 쫓다가 우연히 뒤쪽에 그리 높지 않은 산줄기(시루봉)가 평온하게 둘러져 있고 앞으로는 얕은 내가 흐르는 천하의 명당을 발견하고는 곧 새집을 짓고 이사했다고 한다.그 뒤로 가세가 크게 번창하면서 여러 대에 걸쳐 많은 집들이 지어졌다.지금도 그 후손이 살고 있다.


총건평 318평에 달하며,긴 행랑에 둘러싸여 있는 안채,사랑채,동별당,가묘 등이 정연하게 남아 있고 문 밖에 활래정까지 있어 정원까지 갖춘 완벽한 짜임새을 보여 주고 있다.


선교장의 특징을 살펴보면,우선 전체적으로는 일반 사대부집과 달리 일정한 법식에 구애받지 않고 자유스러우면서도 유기적으로 연결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긴 행랑채 가운데에 사랑으로 통하는 솟을대문과 안채로 통하는 평대문을 나란히 두었다.


선교장의 또 다른 특징은 추운 지방의 폐쇄성과 따뜻한 지방의 개방성이 공존하고 있다는 점이다.우리 나라의 살림집은 대개 자연적인 특성이 있다.곧 춥고 눈이 많이 오는 산골짜기 집과 따뜻하고 넓은 들판에 자리 잡은 남쪽 집의 성질이 판이하게 다른 것이다.선교장 사랑채의 높은 마루와 넓은 마당은 아주 시원한 느낌을 주며,안채의 낮은 마루와 아늑한 분위기는 사랑채와 대조를 이룬다.


한편 상류 계급의 호화로운 주택인 선교장 주변에 하층 계급의 초가 들이 모여 있어 조선 시대의 엄격했던 계급 사회상을 짐작하게 한다.본채인 선교장으로 들어서기 전,행랑채 바깥 마당에 있는 수십 평의 연못에는 온갖 정자의 멋을 살려 만든 호화로운 활래정(活來亭)이 세워져 있는 데 반해,그 주변에는 초라하기 이를 데 없는 노비의 집들이 다닥다닥 붙어 있다.


연못을 지나 본채 쪽으로 들어가면 엄격하고 단정한 구조미를 보이는 바깥 행랑이 길게 늘어서 있고 행랑채 중간에 솟을 대문이 있다.
옆으로 길게 수평선이 강조된 선교장 건물은 주변의 높이 솟은 수십 그루의 노송과 잘 어울리고 있다.


'선교유거(仙僑幽居)'라는 현판이 붙어 있는 솟을대문을 들어서면 동쪽으로 안채,왼편으로는 '열화당(悅話堂)'이라고 부르는 사랑채가 우선 눈에 띈다.열화당은 이내번의 후손으로 '안빈낙도'를 철저한 신조로 삼았던 오은처사 이후가 순조 15년(1815)에 지은 건물로 선교장의 여러 건물 가운데 가장 대표적이다.


열화당은 도연명의 「귀거래사」에서 유래한 이름으로,"세상과 더불어 나를 잊자. 다시 벼슬을 어찌 구할 것인가.친척들과 정다운 이야기를 즐겨 듣고,거문고와 책을 즐기며 우수를 쓸어 버리리라"는 시구처럼 형제,친척들이 모여 즐겁게 이야기하는 장소로 쓰였다.


열화당은 돌계단 7,8개를 딛고 올라설 정도로 높직하게 보기에도 여간 시원하지 않다.처마가 높아서 전면에 별도의 차양을 달았는데,
개화기 때 서양 문물의 영향을 받은 부가물로 장식 효과도 크게 염두에 둔 장치이다.


작은 대청은 누마루 형식을 지니고 있으며,앞툇마루는 상당히 넓다.작은 대청과 대청 사이에 ㄴ자형의 방이 있고,장지문으로 사이를 막으면 방을 셋으로 나눌 수 있도록 만들어졌다여름에 문을 전부 떼어놓으면 사방으로 통풍이 되며 뒷산의 노송과 대청 뒤뜰에 서 있는 수 백년 된 배롱나무가 사랑채와 하나가 된다.


선교장 주인이 살고 있는 안채는 행랑의 동쪽에 있는 평대문으로 들어가는데,부엌,안방,대청,건넌방으로 구성된다.이내번이 터를 잡던 시기(영조)의 건물이라 전해지며,현재 전주 이씨의 후손이 선교장을 관리하며 안채에 살고 있다.


안방은 집안에서 가장 어른이 되는 부인이 거처하는데 안방 뒤켠으로 골방이 딸려 있어 무더운 여름철을 시원하게 날 수 있게 하였다.
또 안방이나 건넌방에는 각각 벽장이 있고 골방에는 다락이 있어 한국 민가의 생활상을 엿볼 수 있게 한다.안방과 건넌방 사이에 대청마루가 있으며,안방 앞에서 건넌방 앞까지를 연결하는 널찍한 툇마루가 있다.건넌방은 큰며느리가 거처하는 방이다.상당히 넓은 부엌이 눈길을 끄는데,이씨 일가가 대가족을 거느렸음을 실질적으로 보여주는 셈이다.동쪽에 동별당이 건립되기 전까지는 ㅁ자형을 이루고 있었다고 한다.


원래 동.서별당이 있었으나 서별당은 현존하지 않고 동별당이 남아 있다.동별당은 안채의 부엌과 연결된 ㄱ자형으로,그 용도는 안채와 연결되어 있다는 데서 찾아볼 수 있다.곧,주인이 가족과 함께 생활할 수 있는,안채에 근접된 거처였다.서별당은 현존하지 않으나 안채와 사랑채 사이 가장 깊숙한 곳에 위치하였으며,서재이면서 서고로 쓰였다고 한다.


일(一)자형으로 길게 늘어서 있는 행랑채는 일제 때만 하더라도 사랑채의 서쪽을 감싸 안는 ㄴ자형이었다고 한다.마구간과 곳간,부엌도 마련돼 있으며,현재 각 행랑은 민속 유물들을 전시하는 전시방으로 이용되고 있다.한편 선교장은 『용비어천가』,『고려사』 같은 귀중본을 비롯한 수천 권의 고문서와 고서화,그리고 고서적을 소장하고 있다.


선교장은 이처럼 이씨 일가의 살림집을 말하지만,그 주인을 모시던 노비들이 살던 초가가 주변에 모여 선교장 촌(村)을 이루고 있으니,선교장 건물만이 아니라 당시의 사회를 이해한다는 측면에서 이를 모두 통틀어 선교장이라 해야 할 듯 싶다.


강원도 중요민속자료 제5호로 지정되어 있는 선교장 주변은 최근 들어 이들 노비집들이 너무 인위적으로 복원되고 있고 게다가 초가 흉내를 낸 음식점마저 들어서고 있어 안타까움을 주고 있다.
*한국문화유산답사회 지음 '답사여행의 길잡이'중에서*


  
강릉선교장(江陵 船橋莊)


중요민속문화재 제5호 
강원 강릉시 운정동 431 


조선시대 사대부의 살림집이다. 전주사람인 이내번이 이곳으로 이주하면서 지은 집으로, ‘선교장(船橋莊)’이라는 이름도 '집터가 뱃머리를 연상케 한다'고 하여 붙였다고 한다. 안채·사랑채·행랑채·별당·정자 등 민가로서는 거의 모자람이 없는 구조를 지니고 있다.


1700년 이전에 건립된 안채는 이내번이 지었으며, 선교장의 건물들 중 가장 서민적인 성격을 띠고 있다. 안채의 오른쪽으로 연결이 되어있는 주인전용의 별당건물인 동별당은 이근우가 1920년에 지은 'ㄱ'자형 건물이다. 열화당은 사랑채로서 순조 15년(1815)에 이후(李厚)가 세웠으며, 도연명의 『귀거래사』 중에서 이름을 따왔다고 한다.


지금은 존재하지 않지만 안채와 열화당 사이에는 서재 겸 서고로 사용되던 서별당이 있었다. 대문 밖 바깥마당의 남쪽으로 위치한 넓은 인공연못에 서 있는 활래정은 열화당을 세운 다음해에 지었다. 돌기둥이 받치고 있는 마루가 연못안쪽으로 들어가 있는 누각형식의 ㄱ자형 건물이다.


전체적으로 이 집은 낮은 산기슭을 배경으로 독립된 건물들을 적당히 배치하고 각 건물의 구조도 소박하게 처리함으로써, 집 밖의 활래정과 함께 자유스럽고 너그러운 분위기를 풍기고 있다. 또한 소장하고 있는 여러 살림살이들은 옛날 강릉지방 사람들의 생활관습을 알아낼 수 있는 좋은 자료가 되고있다. 
*문화재청자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