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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흥 보림사 철조비로자나불좌상(長興 寶林寺 鐵造毘盧遮那佛坐像).전남 장흥 본문

☆~ 풍경소리/전 남

장흥 보림사 철조비로자나불좌상(長興 寶林寺 鐵造毘盧遮那佛坐像).전남 장흥

푸른새벽* 2018. 12. 24. 13:13








장흥 보림사 철조비로자나불좌상(長興 寶林寺 鐵造毘盧遮那佛坐像)


국보  제117호  
전남 장흥군 유치면 봉덕리 45 보림사 


국보 제117호. 높이 273㎝. 지금은 광배(光背)와 대좌를 모두 잃어버리고 불신만 남아 있을 뿐이다. 이 불상은 왼쪽 어깨 부분에 8행의 불상 조상기가 음각되어 있다. 명문에는 858년(헌안왕 2) 7월 17일에 당시 무주(武州)와 장사(長沙: 지금의 장흥)의 부관(副官)으로 있던 김수종(金遂宗)이 발원하여 이 불상을 주성하였다고 한다. 그리고 보조선사탑비(普照禪師塔碑)에는 859년 부수(副守) 김언경(金彦卿)이 사재를 들여 2,500근의 노사나불(盧舍那佛)을 주성하였다고 한다. 위의 두 기록을 종합해보면, 이 불상은 858년에 착수되어 859년에 완성되었음을 알 수 있다.


현재의 머리 부분은 나발(螺髮) 등을 덧붙인 것이어서 그런지 몸집에 비하여 크게 보인다. 머리와 불신의 비율이 대구 동화사 비로암 석조비로자나불좌상(大邱桐華寺毘盧庵石造毘盧遮那佛坐像, 보물 제244호)과 비슷한 것이며, 당시의 불상 비례를 반영하고 있다. 육계(肉?)가 비교적 큼직하며 얼굴은 달걀형으로 비만하다. 편편한 콧잔등, 가늘고 긴 눈, 사다리꼴의 두드러진 인중, 작은 입 등은 상당히 추상화된 경향을 나타낸다.

당당한 자세와 가슴의 표현, 팽창된 체구 등 건장한 불신을 표현하면서도 한편으로는 지권인(智拳印)을 한 상체가 약간 움츠러들어 위축된 듯한 느낌을 준다. 즉 당당하게 보이면서도 전체적으로는 긴장감과 탄력성이 줄어들었다. 이와 같은 특징은 옷주름 선에서도 잘 나타난다. 통견(通肩)의 법의는 양어깨를 감싸며, 가슴 앞에서 V자형으로 모아지고 다시 두 팔에 걸쳐 무릎으로 흘러내리고 있다. 평행의문선(平行衣文線)의 옷주름은 유려한 곡선을 이루면서도 힘없이 늘어져 탄력이 없이 표현되었다.

이와 같이 다소 해이해진 형태와 선의 특징은 도식적이고 기하학적인 특징의 묘사와 더불어 9세기 후기 불상 양식의 선구적인 면을 보여준다. 이러한 양식이 더 발전하여 철원 도피안사 철조비로자나불좌상(鐵原到彼岸寺鐵造毘盧遮那佛坐像, 국보 제63호)이나 봉화 축서사 석조비로자나불좌상(奉化鷲棲寺石造毘盧遮那佛坐像, 보물 제995호)과 같은 9세기 후기 조각 양식으로 정착되었다.


이 불상은 조성 연대가 확실한 불상으로, 당시 유사한 지권인의 비로자나불상의 계보를 확인할 수 있는 기본 자료가 되는 통일신라 말기의 대표적인 철불좌상이라 할 수 있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자료*


 


장흥 보림사 철조비로자나불좌상(長興 寶林寺 鐵造毘盧遮那佛坐像)


국보  제117호  
전남 장흥군 유치면 봉덕리 45 보림사 


전라남도 장흥군 유치면 보림사의 대적광전에 모셔진 철로 만든 불상으로, 현재 대좌(臺座)와 광배(光背)를 잃고 불신(佛身)만 남아 있는 상태이다. 불상의 왼팔 뒷면에 신라 헌안왕 2년(858) 무주장사(지금의 광주와 장흥)의 부관이었던 김수종이 시주하여 불상을 만들었다는 내용의 글이 적혀 있어서 정확한 조성연대를 알 수 있는 작품이다.


머리에는 작은 소라 모양의 머리칼을 붙여 놓았으며, 달걀형의 얼굴에는 약간 살이 올라 있다. 오똑한 콧날, 굳게 다문 입 등에서 약간의 위엄을 느낄 수 있으나 전체적으로 다소 추상화된 모습이다.


통일신라 전성기(8세기)의 불상에 비해 긴장감과 탄력성이 줄어들었고, 양 어깨에 걸쳐 입은 옷은 가슴 앞에서 U자형으로 모아지며, 다시 두 팔에 걸쳐 무릎으로 흘러내리고 있다. 옷주름은 부드러운 곡선을 이루고 있지만 탄력을 잃은 모습이다. 이런 형태의 표현은 신라 불상에서 보여주던 이상적인 조형감각이 후퇴하고 도식화되어가는 과정을 보여주고 있는 것으로, 9세기 후반 불상 양식의 대표적 특징이라고 할 수 있다. 손은 왼손의 검지를 오른손으로 감싸고 있는 모습으로 비로자나불이 취하는 일반적인 손모양이다.


이 작품은 만든 연대가 확실하여 당시 유사한 비로자나불상의 계보를 확인하는데 중요한 자료가 되며, 신라말부터 고려초에 걸쳐 유행한 철로 만든 불상의 첫번째 예라는 점에서 그 가치가 크다. 
*문화재청자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