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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흥 보림사 보조선사탑비(長興 寶林寺 普照禪師塔碑).전남 장흥 본문

☆~ 풍경소리/전 남

장흥 보림사 보조선사탑비(長興 寶林寺 普照禪師塔碑).전남 장흥

푸른새벽* 2018. 12. 25. 12:02











































장흥 보림사 보조선사탑비(長興 寶林寺 普照禪師塔碑)


보물 제158호
전남 장흥군 유치면 봉덕리 산10-1


전라남도 장흥군 유치면 보림사에 있는 통일신라시대의 탑비.


보물 제158호. 높이 3.46m. 통일신라시대의 고승 보조선사(普照禪師) 지선(智詵)의 탑비로서, 그가 입적한 뒤 4년 만인 884년에 사리탑(보물 제157호)과 함께 조성되었다. 이 비는 비신(碑身)과 귀부(龜趺)·이수(?首)를 모두 갖춘 완전한 형태로 남아 있는데, 이수 중앙에 “가지산보조선사비명(迦智山普照禪師碑銘)”이라는 비제(碑題)가 적혀 있다.


비문은 김영(金穎)이 짓고, 글씨는 김원(金?)과 김언경(金彦卿)이 썼는데, 첫 줄에서 일곱 번째 줄의 ‘선(禪)’자까지는 해서(楷書)로 김원이 썼고 ‘사(師)’자 이하는 행서(行書)로 김언경이 썼다. 이것은 아마도 김원이 중도에 죽었기 때문에 그의 제자였던 김언경이 이어 쓴 것으로 생각된다. 일찍이 청(淸) 말기의 금석연구가 섭창치(葉昌熾)는 이 비에 대하여 그의 저서 『어석(語石)』에서 “일비양인서일칙(一碑兩人書一則)”이라고 평한 바 있다.


비신을 받고 있는 귀부는 얼굴이 용두(龍頭)처럼 변하였으며, 이목구비의 조각이 뚜렷하여 사나운 모습을 보여준다. 등 뒤에는 육각형의 귀갑문(龜甲文)이 등 전체를 덮고 있으며, 등 가운데 구름문과 연꽃을 돌린 비좌(碑座)를 설치하여 비신을 받게 하였다. 이수는 아래에 구름문을 조각하고 비제의 좌우에 대칭적으로 반룡(蟠龍 : 승천하지 않은 용)을 조각하였는데 뛰어난 조각수법을 보이고 있다.


이 비는 9세기 말경의 석비양식의 전형을 보여주는 것으로서 당시 조형수준을 대표하는 뛰어난 작품이라 할 수 있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자료*



  
장흥 보림사 보조선사탑비(長興 寶林寺 普照禪師塔碑)


보물 제158호
전남 장흥군 유치면 봉덕리 산10-1 


보림사에 있는 보조선사 지선의 탑비로, 거북받침돌 위에 비몸을 세우고 머릿돌을 얹은 모습이다.


보조선사(804∼880)는 통일신라시대의 승려로, 어려서 출가하여 불경을 공부하였으며, 흥덕왕 2년(827)에 승려가 지켜야 할 계율을 받았다. 희강왕 2년(837) 중국으로 건너갔으나, 멀리서 구할 필요가 없음을 느끼고, 문성왕 2년(840)에 귀국하여 많은 승려들에게 선(禪)을 가르쳤다. 헌안왕 3년(859) 왕의 청으로 보림사의 주지가 되었으며, 77세의 나이로 입적하였다. 왕은 그의 시호를 ‘보조선사’라 하고, 탑이름을 ‘창성’이라 내리었다.


비는 거북받침돌의 머리가 용머리를 하고 있어 이목구비가 뚜렷한 사나운 모습이며, 등 뒤에는 육각형의 무늬가 전체를 덮고 있다. 등 중앙에 마련된 비를 꽂아두는 부분에는 구름과 연꽃을 새겨 장식해 놓았다. 비몸돌에는 보조선사에 대한 기록이 새겨져 있는데, 김영이 비문을 짓고 김원과 김언경이 글씨를 썼다. 머릿돌에는 구름과 용의 모습을 웅대하게 조각하였고, 앞면 중앙에 ‘가지산보조선사비영’이라는 비의 명칭을 새겼다.


통일신라 헌강왕 10년(884)에 세워진 비로, 당시 조형수준을 대표하는 뛰어난 작품이다.
*문화재청자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