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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주 회암사지 무학대사비(楊州 檜巖寺址 無學大師碑).경기 양주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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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주 회암사지 무학대사비(楊州 檜巖寺址 無學大師碑).경기 양주

푸른새벽* 2019. 6. 17. 09:33































































양주 회암사지 무학대사비(楊州 檜巖寺址 無學大師碑)


시도유형문화재 제51호(양주시) 
경기 양주시 회암동 산8-1 


경기도 양주시 회암동에 있는 조선 전기 무학대사(無學大師)의 사적비.


무학대사[1372~1405]는 고려 말~조선 초의 이름난 승려로, 이름은 자초(自超)이고 호가 무학(無學)이다. 18세에 출가하여 소지선사(小止禪師) 아래로 들어가 머리를 깎고 승려가 되었으며, 혜명국사(慧明國師)에게서 불교의 교리를 배운 후 묘향산에서 수도하였다. 1392년(태조 1)에는 태조의 부름을 받고 스승이 되어 도읍지를 물색하기도 하였다. 이후 회암사(檜巖寺)에서 머물다가 금강산의 금장암(金藏庵)에서 입적하였다.


처음에 만들어진 비석의 지붕과 받침 부분 바로 옆에 중건비가 만들어져 있는데, 비석에 써 있는 내용을 통해 처음 비석은 1410년(태종 10)에 제작되었고, 1828년(순조 28)에 중건비가 만들어졌음을 알 수 있다. 1821년(순조 21) 광주의 유학(幼學) 이응준(李膺峻)이 회암사의 부도와 비석을 파괴하고 사리를 훔친 후 그 자리에 자신의 아버지를 묻었는데, 관찰사가 이 사실을 조정에 보고하니 이를 두고 조정 대신들 사이에서 사형에 처해야 한다는 논의가 일었다. 이에 당시 임금인 순조가 이응준을 섬에 유배하고 그 무덤을 파 버리라 명하면서 무학대사비(無學大師碑)를 다시 세운 것이다.


양주시 회암동에 있는 양주 회암사지(楊州檜巖寺址)에서 천보산 자락으로 올라가면 현재의 회암사에 이르는데, 무학대사비는 회암사의 오른쪽 능선에 자리한 양주 회암사지 무학대사탑(楊州檜巖寺址無學大師塔)[보물 제388호]과 양주 회암사지 무학대사탑 앞 쌍사자 석등[보물 제389호] 바로 앞에 위치한다.


비석의 오른쪽에는 처음 비석에 쓰였던 사각 받침과 연꽃잎 형태의 지붕이 올려 있다. 규모는 지붕이 가로 106㎝, 세로 40㎝, 높이 57㎝, 사각 받침이 가로 180㎝, 세로 87.5㎝, 높이 57㎝, 비석 받침이 가로 144㎝, 세로 54㎝, 높이 23㎝, 비석 받침공이 가로 109㎝, 세로 26㎝이다.


중건비는 낮은 지대석 위에 모죽임을 한 높직한 사각 받침을 놓고 흑청석재의 비석을 세웠으며, 팔작지붕이 그 위에 놓여 있다. 중건비의 규모는 총 높이가 340㎝이며, 비석은 높이 223㎝, 폭 89.5㎝, 두께 28.5㎝, 사각 받침은 가로 147㎝, 세로 90㎝, 높이 65㎝, 지대석은 가로 224㎝, 세로 133㎝, 높이 17㎝이다. 비공은 지름이 89.5㎝, 깊이가 28.5㎝이다.


조선 왕조 개창의 주역인 무학대사의 행적을 담은 사적비로, 생애와 업적, 비석의 파손 과정과 중건비를 세우게 된 경위가 상세히 기록되어 있다. 비문은 세종 때 학자로 알려진 변계량(卞季良)이 짓고 공부(孔俯)가 썼으며, 추도비 음기(陰記) 부분은 김이교(金履喬)가 짓고 김겸(金鎌)이 썼다. 비문의 기록으로 무학대사 부도가 1407년(태종 7)에 세워졌음을 알 수 있다.


무학대사비는 1974년 9월 26일 경기도 유형 문화재 제51호로 지정되었다. 소유자 및 관리자는 회암사이다. 현재 무학대사비는 양주 회암사지 관광객들과 천보산 등반객들이 찾는 중요한 명소이다. 또한 주위에 있는 양주 회암사지 선각왕사비(楊州檜巖寺址禪覺王師碑)[보물 제387호], 나옹선사 부도 및 석등[경기도 유형 문화재 제50호], 지공선사 부도 및 석등[경기도 유형 문화재 제49호], 양주 회암사지 무학대사탑 및 양주 회암사지 무학대사탑 앞 쌍사자 석등과 함께 조선 시대 불교문화 유적의 참모습을 확인할 수 있는 역사 교육의 장으로 활용되고 있다.


무학대사비의 음기에 각수(刻手) 박지춘(朴枝春)과 석수(石手) 박종석(朴宗錫)·문수조(文守兆)라는 이름이 기록되어 있는데, 이는 기술력을 중시하였던 조선 후기 당시 사회상을 확인할 수 있는 부분으로서 역사적으로 매우 중요한 의의를 지니고 있다.
*디지털양주문화대전자료*



양주 회암사지 무학대사비(楊州 檜巖寺址 無學大師碑)


시도유형문화재 제51호(양주시) 
경기 양주시 회암동 산8-1 


회암사터에 세워져 있는 무학대사의 묘비로, 바로 뒷편에는 그의 묘탑(보물 제388호)이 함께 서 있다.


무학대사는 고려말·조선초의 이름난 승려로, 이름은 자초이고,무학은 그의 호이다. 18세에 출가하여 소지선사에게서 머리를 깎고 승려가 되었으며, 혜명국사에게서 불교의 교리를 배운 후 묘향산에서 수도하였다. 조선 태조 원년(1392)에는 태조의 부름을 받고 그의 스승이 되어 도읍지를 물색하기도 하였다. 그 후 회암사에서 머물다가 금강산의 금장암이라는 암자에서 입적하였다.


비는 높직한 4각 받침돌 위에 비몸을 세우고, 지붕돌을 얹은 간결한 모습이다. 지붕돌의 네 귀퉁이는 하늘을 떠 받들 듯 부드러운 곡선을 그리며 위를 향하고 있다. 비문에는 대사의 일생이 적혀 있는데 특히 원나라에 들어가 지공선사와 나옹선사를 만나 그들의 제자가 된 일, 한양천도에 큰 역할을 한 일, 회암사에 두 스승의 묘탑을 세운 일 등이 잘 나타나 있다.


태종 10년(1410)에 왕명을 받들어, 변계량이 비문을 짓고 공부의 글씨로 하여 비문을 새겨두었다 하나, 순조 21년1821)에 파괴되었고, 순조 28년(1828)에 다시 비를 세워 오늘에 이르고 있다.
*문화재청자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