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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해 용문사(南海 龍門寺).경남 남해 본문

☆~ 절집.절터/경 남

남해 용문사(南海 龍門寺).경남 남해

푸른새벽* 2023. 8. 25. 19:49

 

 

 

 

 

 

 

 

 

 

 

 

 

 

 

 

 

 

 

 

 

 

 

 

 

 

 

 

 

 

 

 

 

 

 

 

 

 

 

 

 

 

남해 용문사(南海龍門寺)

경남 남해군 이동면 용소리 868

용문사는 남해군에서 가장 유서가 깊은 사찰로서 신라시대의 원효대사(元曉大師)가 금산(錦山)에 창건한 보광사(普光寺)의 후신이라고 전한다. 당시 보광사에는 첨성각(瞻星閣)만이 있었다고 한다.

그 뒤의 역사는 거의 전하지 않고, 조선시대에 들어와 1660년(현종 1) 남해현의 남해 향교와 용문사 입구가 마주하고 있다 하여 유생들이 절을 다른 곳으로 옮길 것을 요구하였고, 이에 백월(白月) 스님이 남쪽에 있는 용소마을 위에 터를 잡고 용문사라 하였다.

이로부터 절의 역사가 자세히 전하는데, 1661년(현종 2)에는 신운(信雲)이 탐진당(探眞堂)을 세웠고, 상운(尙雲)이 적묵당(寂默堂)을 세웠다. 1666년 대웅전을 지었으며 봉서루(鳳棲樓)를 새로 지었다.
 
그 뒤에도 명부전, 나한전, 향적전, 천왕각 등을 지었다. 그리고 1708년(숙종 34)에 염불암을 중창하였다. 임진왜란 때 모든 승려들이 의승군(義僧軍)이 되어 왜병과 싸웠고, 숙종 때에는 이 절을 수국사(守國寺)로 지정하고 왕실의 축원당(祝願堂)을 세웠다. 당시의 유물로 용문사의 승병들이 사용하였던 삼혈포(三穴砲), 번(幡)과 수국사금패(守國寺禁牌) 등이 남아 있는데, 모두 용문사가 임진왜란 때 의승군이 주둔하면서 구국에 앞장섰던 역사를 말해주는 유물들이다.

이 가운데 번은 축원당에 걸어두었던 궁수(宮繡)와 궁중매듭이다. 세로 147㎝, 가로 32.5㎝의 비단에 ‘南無大聖引路王菩薩(나무대성인로왕보살)’이라고 수를 놓고 그 둘레를 우아한 매듭으로 장식하였다. 또, 수국사금패는 경릉관(敬陵官)과 익릉관(翼陵官)이 발급한 것으로 지름 14.5㎝의 원통형 나무로 되어 있다.

그밖에 숙종 때 하사받은 연옥등(蓮玉燈) 2개와 촉대 1개가 있었으나 아쉽게도 연옥등과 촉대는 일제강점기에 일본인들이 빼앗아갔다고 한다.
*한국전통사찰정보자료*



남해 용문사(南海龍門寺)

경남 남해군 이동면 용소리 868

경상남도 남해군 이동면 호구산(虎丘山)에 있는 사찰.

대한불교조계종 제13교구 본사인 쌍계사의 말사이다. 802년(신라 애장왕 3) 창건되었다. 1592년(조선 선조 25) 임진왜란 때 이 절 승려들이 승병으로 참여하여 왜군과 싸웠는데, 이 때 절이 불에 타 없어졌으며 1661년(현종 2) 학진(學進)이 인근 보광사(普光寺) 건물을 옮겨와 중창하였다. 보광사는 원효가 세운 사찰이었으나 이곳으로 옮길 때에는 폐사 직전의 상태였다고 한다. 용연(龍淵) 위쪽에 터를 잡았다고 해서 용문사라고 이름을 붙였다. 임진왜란 이후 호국도량으로 널리 알려져 숙종(재위:1674∼1720) 때 나라를 지키는 절이라며 수국사(守國寺)로 지정하였다. 또 이 때 왕실의 축원당(祝願堂)으로 삼았다. 1703년(숙종 29)과 1735년(영조 11), 1819년(순조 19), 1857년(철종 8) 각각 중수하였으며, 1900년 호은당이 복원 중흥하였다. 

현존하는 건물로는 대웅전과 천왕각·명부전·칠성각·봉서루·산신각·요사 등이 있으며, 산내 암자로는 1751년(영조 27)에 세운 백련암(白蓮庵)과 염불암(念佛庵)이 남아 있다. 용문사대웅전은 정면 3칸, 측면 3칸의 팔작지붕 건물로 처마 밑에 용두(龍頭)를 조각해 넣었다. 1974년 경상남도유형문화재 제85호로 지정되었다. 용문사천왕각과 용문사명부전은 1985년에 각각 경상남도문화재자료 제150호, 제151호로 지정되었다. 한편 백련암은 용성과 성철 등 고승들이 수도하던 곳으로 경봉이 쓴 편액이 걸려 있다.

유물로는 용문사석불과 촌은집책판이 각각 경상남도유형문화재 제138호, 제172호로 지정되었다. 이 중 용문사석불은 높이 약 81cm로 고려 초기에 조성된 것이다. 임진왜란 이후 절을 중창하기 위해 땅을 파다가 발굴되었다고 한다. 촌은집책판은 조선 인조 때 학자인 유희경(劉希慶)의 시집 《촌은집(村隱集)》을 간행하기 위해 만든 것이다. 그밖에 임진왜란 때 승병들이 사용하던 대포 삼혈포(三穴包)와 숙종으로부터 하사받은 연옥등(蓮玉燈) 2개, 촛대, 번(幡), 수국사 금패(禁牌) 등이 있었으나 연옥등과 촛대는 일제강점기에 일본인이 훔쳐갔다고 한다. 절 입구 일주문 오른쪽 언덕에 9기의 부도가 있다.
*두디피아자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