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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주 회암사지(楊州 檜巖寺址).경기 본문

☆~ 절집.절터/경 기

양주 회암사지(楊州 檜巖寺址).경기

沈香* 2026. 7. 17. 21:05

 

 

 

 

 

 

 

 

 

 

 

 

 

 

 

 

 

 

 

 

 

 

 

 

 

 

 

 

 

 

 

 

 

 

 

 

 

 

 

 

 

 

 

 

 

 

 

 

 

 

 

 

 

 

 

 

 

 

 

 

 

 

 

 

 

 

 

 

 

 

 

 

 

 

 

 

 

 

 

 

 

 

 

 

 

 

 

 

 

 

 

 

 

 

 

 

 

 

 

 

 

 

 

 

 

 

 

 

 

 

 

 

 

 

 

 

 

 

 

 

 

 

양주 회암사지(楊州 檜巖寺址)

경기 양주. 연이은 바위봉과 울창한 소나무숲이 수려한 경관을 이루며 빈 절터를 감싸고 있는 천보산 자락 역사의 거친 회오리를 겪고 폐허 속에 침몰해버린 회암사터가 있다.

『동국여지승람』에 따르면 양주 회암사는 늦어도 11세기 후반 이전에 창건된 사찰로 추측되지만 1998년 부터 조사를 통해 드러난 바와 같이.1만여 평에 이를 정도로 사역이 크게 확장된 것은 고려 말 나옹선사의 중창에서 비롯되었다.고려 말 문인이었던 이색(李穡)은 중창된 회암사의 모습을 「천보산회암사수조기(天寶山檜巖寺修造記」에서 자세히 묘사하고 있다.이 기록에 따르면 건물은 모두 262칸이었고,4.5m정도의 큰 불상 7구에 관음상의 높이가 3m에 이를 정도로 규모가 큰 가람이었다.

나옹은 인도 출신의 고승 지공(指空)의 제자라고 전한다.지공은 1326년 고려를 방문하여 2~3년간 체류하면서 고려 불교계의 큰 스승이 되었는데 인도에서 공부했던 아란타사(阿蘭陀寺)를 그의 정신적인 고향으로 여겼다.지공이 연경(燕京)에 유학 온 나옹을 만나 회암사가 위치한 지형이 아란타사와 흡사하다고 전하였다.이에 고려에 귀환한 나옹은 1370년 무렵 회암사 주지로 부임하였고 스승의 뜻을 받들어 대대적 중창불사를 일으켜 1376년에 낙성 기념 문수회를 개최하기에 이른다.

억불(抑佛)시대인 조선 전기에도 회암사는 왕실의 지원을 받는 대가람이었다.태조가 가장 신뢰하는 조언자이자 나옹의 계승자인 무학(無學.1327~1405)왕사가 조선조 초대 회암사 주지를 지낸다.당시 회암사는 행궁에 버금가는 대우와 후원을 받았고,세종대에는 승려 250명에 대지가 1만여 평에 이르는 규모를 자랑하였다.성종조인 1475년 무렵 효령대군의 후원으로 중창되었고,현존하는 석단과 기단석들은 이 때의 것으로 보인다.

이후 명종의 섭정인 문정왕후가 후원한 보우(普雨.1515~1563)는 회암사를 무대로 불교 중흥을 꾀하였으나문정왕후의 임종과 함께 처형되면서 사운(寺運)도 쇠하게 된다.1595년 『선조실록』에 "회암사는 불에 타 옛터만 남았다" 고 했으니 1566년과 1595년 사이 어느 때인가에 폐사되었을 것으로 보인다.고려 말 조선 초를 풍미했던 3대 고승인 지공,나옹,무학의 부도가 회암사터 뒷산 능선에 줄이어 남아 있어 이 절의 높았던 사격(寺格)을 말해주고 있다.

천보산 기슭,평지에 가까울 정도로 완만한 경사에 자리잡은 사역은 8개의 단지로 구성되고 각 단지는 축대에 의해 구획되었다.발굴 결과에 따라 편의상 가장 아래쪽을 1단지라 하고,가장 뒤 위쪽을 8단지라고 하는데 본격적인 건물터가 발굴된 곳은 3단지부터이며,4~5단지 동편 숲인 전단림은 아직 발굴조사가 진행되지 않았다.

1,2단지는 절의 진입부로 넓은 빈 터에 당간지주 등의 유물이 남아 있다.3단지는 절의 대문과 향적전(香積殿).종루.관음전.욕실 등이 있던 곳이며 4단지는 정문과 서료,동료,서객실,동객실, 미타전과 긴 창고 등이 빼곡히 들어섰던 곳이다.5단지는 주불전인 보광전의 앞마당에 해당되는데,정문터와 함께 정료대,석등좌대,집수구 등의 석물 흔적이 출토되었다.정문 양 옆으로 동랑과 열중료가 길게 연결되어 중심 불전지구의 경계를 형성하였는데 열중료는 두 건물이 하나로 연결된 듯 보이는 특이한 건물이다.안마당 양쪽으로 서파침과 서운집,동파침과 동운집이 있었고, 건물들 주변 바닥에는 전돌을 깔았다.

보광전이 있는 6단지는 중심 불전지구에 해당한다.주불전인 보광전은 24.9X21m의 규모로 정방형에 가까운 정면 7칸의 중층 건물이었다.보광전 앞에는 6.2m에 달하는 넓은 월대가 놓여졌고,월대를 포함하여 사방에 납석을 깔아 비 오는 날에도 통행이 가능하였다.이는 일반 사찰에서는 볼 수 없는 고급스러운 시설이다.

서쪽 서승당은 E자형 구들 시설 두 개가 남북으로 마주보게 놓여졌는데 보통 구들과는 달리 지면보다 높게 설치된 침상식 구들이다.또한 보광전 동쪽에는 두 개의 중정을 가진 日자형 건물터가 발굴되었는데 이색의 기록에도 등장하지 않은 건물이어서 후대에 중창된 승방 건물로 추정 된다.보광전 뒤 7단지는 가장 조밀하게 건물들이 들어선 지역이다.중앙의 설법전 좌우로 영당과 조사전이 놓이고 그 주위에 서기료,입실료,수좌료,시자료 등 승려들의 지위를 암시하는 승방들이 촘촘히 배열되었다.모든 승방에는 구들을 설치하였고,왕을 호위하는 신하들처럼 강당인 설법전을 에워싸고 있다.

가장 뒤쪽의 8단지는 중앙에 정청과 동.서 방장이 놓였다.중앙 정청에는 마루를 설치하였고,양 옆의 방장들은 방고래가 열 줄이나 되는 온돌시설이었다.이 세 건물은 서로 연결되었고,중앙 정청의 폭이 양 옆 건물보다 넓다.마치 지방 도시의 객사와 같은 모습의 이 건물군은 왕실의 행차 때 쓰였던 곳으로 추정되며 행궁의 역할을 했다고 볼 수 있다.건물군 좌우로는 나한전과 대장전이,정청 바로 앞에는 직각 방향으로 사리전이 놓였다.
사리전의 위치난 방향 역시 일반 사찰에서는 이례적이며,정청을 보호하고 통행하기 위한 건물로 추정된다.이 지역에서는 청기와 파편,봉황과 용이 새겨진 막새기와,드므에 해당하는 청동기,토수(吐首)와 잡상 같은 지붕 장식물들이 출토되었는데,모두 궁궐에서만 사용할 수 있는 것들이다.

궁궐적 성격을 가진 회암사에는 또 다른 건축사적 의의가 있다.남북으로 겹쳐진 각 단지의 남단에는 동서로 긴 건물들이 들어서서,마치 행랑과 같이 각 단지들을 명확하게 경계 짓는 독특한 배치를 하고 있다.고려 중기 이전의 고대 가람들은 회랑을 둘러 중심 영역을 형성했지만,조선조의 가람들은 동서남북 사방에 4동의 건물을 배열하여 중심곽을 이루면서,회랑이 사라졌다.회암사 역시 회랑은 없지만,동서로 긴 행랑으로 가가 영역을 형성하고 있어 고대에서 조선으로 넘어가는 과도기적 가람 형식이라 할 수 있다.
*김봉렬 지음 '불교건축'중에서*



양주 회암사지(楊州 檜巖寺址)

회암사는 고려시대에 창건되어 고려 말기부터 조선 중기까지 왕실과 밀접한 관계를 유지하면서 당대 최고의 장인들이 동원되어 전국 최대 규모의 가람으로 조영되었다. 발굴 조사 결과 그러한 사실을 입증해 주는 유적과 최고급 유물들이 출토되어 당대 불교 사상과 문화를 대표하는 사찰이었음을 알게 한다.
 
양주 회암사는 창건 시기를 알려 주는 기록은 없지만 그 동안 여러 차례의 발굴 조사를 통하여 늦어도 고려 중기 이전에는 창건된 것으로 밝혀졌다. 그리고 인도 출신의 원나라 승려 지공선사(指空禪師)가 1326년 3월경 개경의 감로사(甘露寺)에 도착하여 1328년 9월 돌아갈 때까지 통도사(通度寺)와 화장사(華藏寺) 등 전국의 여러 사찰을 순례하다가 회암사의 지형이 인도의 아란타사(阿蘭陀寺)와 같아 가람을 이룩하면 불법이 크게 흥할 것이라고 말하자 그 뒤에 제자인 나옹(懶翁) 등이 크게 중창하였다고 한다. 이러한 내용이 이색(李穡)이 지은 「천보산 회암사 수조기(天寶山檜巖寺修造記)」와 김수온(金守溫)이 찬한 「회암사 중창기(檜巖寺重創記)」 등에 전하고 있다. 고려 말기 회암사를 크게 중창한 나옹은 선각왕사 혜근(禪覺王師 惠勤, 1320~1376)으로, 원나라에 가서 지공선사로부터 수학하여 법을 이어받은 대표적인 제자 중 한 명이었다. 나옹이 회암사의 전당(殿堂) 확장 공사를 끝냈을 때에는 262칸의 전각이 있었으며, 1376년 4월 낙성 법회 개최 때에는 전국의 많은 승려와 신도들이 대거 참가하였다고 한다. 당시 회암사가 크게 발전하자 유생들은 백성들이 회암사에 가는 것을 금지해야 한다고 국왕에게 주청할 정도였다. 이에 국왕은 나옹을 다른 사찰로 옮겨 주석하게 하였다. 그리고 고려 말기 왕실과 밀접한 관계에 있었던 원증국사 보우(圓證國師 普愚, 1301~1382)도 제자인 무학대사 자초(無學大師 自超, 1327~1405년)와 함께 회암사를 크게 중창하였다.

조선시대에 들어와 회암사는 더더욱 부각되는데, 태조 이성계는 왕위를 물려주고 스승으로 삼았던 무학대사가 회암사에 머물 때 이곳에서 함께 생활하기도 하였다. 불심이 깊었던 효령대군(孝寧大君)은 전국의 여러 불사를 직접 관장하거나 후원하였는데, 그 중에서도 회암사 중창에 각별한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 그리고 『성종실록』에 의하면, 1472년 세조의 비 정희왕후(貞熹王后)가 회암사를 크게 중창하게 하였다고 한다. 또한 문정왕후(文定王后)는 보우(普雨)로 하여금 회암사를 대대적으로 중창케 하여 전국 제일의 사찰로 중흥을 꾀하기도 하였다.
  
회암사는 고려 말기부터 조선 중기까지 전국 최대 규모의 사찰로서 왕실과 밀접한 관계를 유지하면서 당대의 불교 사상과 문화를 주도하였다. 그래서 『조선왕조실록』을 비롯한 여러 기록물에 회암사에서 거행된 왕실 관련 의식이나 행사 등이 전재되어 있으며, 왕실 후원으로 실시된 회암사의 중창과 중수에 대한 내용이 수록되어 있다. 그러나 문정왕후 이후 불교계의 쇠퇴 분위기 속에 회암사도 쇠락하면서 서서히 폐사된 것으로 추정된다.

회암사지는 역사 속에서 잊혀졌다가 1997년 이후 수년 간에 걸친 발굴 조사 과정에서 웅장하였던 사찰의 규모와 위상을 보여 주는 많은 유적과 유물들이 발견되었다. 발굴 결과, 회암사는 기록처럼 고려 말기부터 대대적인 중창이 이루어져 조선시대 들어와 대찰(大刹)의 면모를 갖추었으며, 조선 중기까지 불교계에서 중심적인 역할을 하다가 조선 후기에 폐사된 후 다시는 중창되지 못한 것으로 확인되었다.

회암사지는 평지가 아닌 낮은 구릉이 있는 산간에 조영되었음에도 평지 가람에서 볼 수 있는 남회랑(南回廊)이 있었으며, 석축이나 건물들의 배치 형식이 궁궐과 닮은 것으로 밝혀졌다. 그리고 사찰에서는 보기 힘든 특정한 목적으로 건립된 건물들도 있었다. 또한 석재들을 다듬은 기법도 상당히 우수한 석공들이 관여하였음이 확인되었다. 이와 같이 회암사는 전체 규모와 가람의 조영 기법 등으로 보아 왕실에 소속된 당대 최고의 장인들이 동원되어 공사가 진행되었음을 알 수 있다.
 
회암사지에서 출토된 유물들은 기와, 자기(瓷器), 도기(陶器), 소조품(塑造品), 금속품, 석제품 등으로 다양하고 품질도 최고급으로 평가되고 있다. 그리고 상당수 유물들에 명문이 새겨져 있어 후원자와 제작 시기를 알 수 있고 제작 배경과 함께 당대 유물들의 편년을 설정하는 데 기준이 되고 있다. 또한 궁궐이나 왕실 관련 사찰에서만 사용된 청기와를 비롯하여 궁궐 건축물의 지붕 추녀마루에 올리는 용두(龍頭)나 잡상(雜像)도 출토되었으며, 최고급 도자기와 금속 공예품 등이 다량으로 수습되어 당시 회암사의 위상이 상당하였음을 짐작케 한다.

한편, 회암사의 부침과 함께 사용되거나 폐기된 기와는 사찰의 연혁을 알려 주는 가장 중요한 근거 자료가 되기도 하는데, 다른 사지들보다 다종다양한 범자(梵字) 진언(眞言)이 새겨진 기와들이 출토되었다. 특히 막새류를 중심으로 많은 양이 출토되었는데, 제작 기법이 우수할 뿐 아니라 제작 시기를 알 수 있는 기와도 다수 출토되었다. 조선시대에는 범자 진언이 새겨진 기와가 지속적으로 제작 활용되었는데, 회암사지에서 출토된 범자 기와는 그 전환점 역할을 한다는 점에서 학술적으로 중요한 자료로 평가되고 있다. 범자 진언이 새겨진 기와 사용은 당시 밀교가 서서히 유행하면서 육자진언(六字眞言)을 비롯한 특정 진언에 대한 신앙이 본격화되는 계기가 되었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자료*



양주 회암사지(楊州 檜巖寺址)
사적
경기 양주시 회암동 산14  

고려 충숙왕 15년(1328) 원나라를 통해 들어온 인도의 승려 지공이 처음 지었다는 회암사가 있던 자리이다. 그러나 회암사가 지어지기 이전에도 이 곳에는 이미 절이 있었던 것으로 추측된다. 

조선 전기 이색이 지은『천보산회암사수조기』에 의하면, 고려 우왕 2년(1376) 지공의 제자 나옹이 “이곳에 절을 지으면 불법이 크게 번성한다”는 말을 믿고 절을 크게 짓기 시작하였다고 한다. 

조선 전기까지도 전국에서 가장 큰 절이었다고 하는데, 태조 이성계는 나옹의 제자이면서 자신의 스승인 무학대사를 이 절에 머무르게 하였고, 왕위를 물려준 뒤에는 이곳에서 수도생활을 하기도 했다. 성종 때는 세조의 왕비 정희왕후의 명에 따라 절을 크게 넓히는데 13년이나 걸렸다고 한다. 그 후 명종 때 문정왕후의 도움으로 전국 제일의 사찰이 되었다가, 문정왕후가 죽은 뒤에 억불정책으로 인하여 절이 불태워졌다. 

이 절이 있던 자리에서 500m 정도 올라가면 지금의 회암사가 있는데, 그 부근에는 중요 문화재들이 남아있다. 

고려시대에 세운 나옹의 행적을 새긴 회암사지선각왕사비(보물)를 비롯하여, 지공의 부도 및 석등(경기도유형문화유산)·회암사지부도(보물)·나옹의 부도 및 석등(경기도유형문화유산)와 조선시대에 만들어진 쌍사자석등(보물)·무학대사비(경기도유형문화유산)·회암사지부도탑(경기도유형문화유산)·어사대비(경기도유형문화유산)·맷돌(경기도민속자료)과 당간지주, 건물의 초석들이 남아있다. 

이 사찰은 평지가 아닌 산간지방에 위치하면서도 평지에 있는 절에서 볼수있는 남회랑을 만든 점에서 고려시대의 궁궐이나 사찰 배치형식을 보이고 있는 것이 주목된다.  
*국가유산포털자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