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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천 조계산 선암사(曹溪山 仙巖寺).전남 순천 본문

☆~ 절집.절터/전 남

순천 조계산 선암사(曹溪山 仙巖寺).전남 순천

푸른새벽* 2006. 1. 6. 11:23

 

 






 






 






 






 











 

 






 






 






 






 











 

 











 

 






 






 











 

 






 











 






 

 






 






 






 











 

 






 






 






 






 






 






 






 






 










 






 






 

 

조계산 선암사(曹溪山 仙巖寺)

 

전남 순천시 승주읍 죽학리802 


송광사가 우리 불교계에 최대 종단인 조계종의 근본 사찰이라면 선암사는 조계종 다음으로 큰 교세를 가진 태고종의 총본산이다.선암사는 '산사'의 모범답안같이 청정하고 아름다운데 그중에서도 특히 봄이 가장 아름답다.갓 부화한 물고기의 여린 몸뚱이처럼 야들야들한 신록으로 조계산이 물들기 시작하면 이에 화답이라도 하듯 절 곳곳에는 벚꽃이며 목련.모란.앵두.모과.철쭉.영산홍.동백.상사화.옥잠화.치자.파초.부용 등 갖가지 화초와 꽃나무가 잇달아 피어난다.화훼전시장인양 그 빛깔과 모습들이 다채로운데 고풍이 흐르는 전각들과 어울린 분위기는 화려하기보단 새악시 볼에 번지는 분홍색 부끄럼처럼 조신하다.

『신증동국여지승람』에 나타난 고려 중기 선암사의 모습은 적막한 산골 속에 자리한 엄숙한 예배처였다."적적한 산골 속 절이요,쓸쓸한 숲 아래의 중일세. 마음속 티끌은 온통 씻어 떨어뜨렸고,지혜의 물은 맑고 용하기도 하네" 라고 읊은 김극기(金克己:고려 명종 때의 문신)의 시구처럼,오랜 세월이 흐른 지금도 선암사는 이러한 모습에 크게 벗어나지 않는다.

선암사는 통일신라 말기 도선이 호남을 비보하는 3대 사찰인 3암 의 하나로 창건했다는 설과,백제 성왕 7년(529)에 아도화상이 세운 비로암을 통일신라 경덕왕 원년(742)에 도선이 재건하였다는 두 가지 창건설화가 전해온다.신라에 한창 불법을 전하던 아도화상이 어느새 이웃 나라인 백제까지 와서 절을 지어주었을까 하는 의문과 함께 통일신라 말기에 세워진 것으로 보이는 삼층석탑이 엄연히 실제하는 현실에 비추어보면 통일신라 말에 도선이 창건했다는 주장이 더 설득력 있게 다가온다.

고려 중기로 들어서면서 선암사는 선종 9년(1092) 대각국사 의천에 의해 크게 중창된다.의천은 문종의 넷째 왕자로,출가한 뒤 국내의 여러 종파의 불교사상을 두루 익혀 천태종을 개창하였다.선암사를 중창할 때 의천은 대각암에 머물렀던 것으로 알려져 있으며 선종이 의천에게 하사한 금란가사,대각국사 의천의 부도로 전하는 대각암 부도가 선암사에 전해오고 있다.

고려 후기에 이르면 선암사가 자리잡은 조계산은 불교 개혁의 산실이 된다.산 하나를 사이에 두고 이웃한 송광사에서 보조국사 지눌이 기존의 타락한 불교계를 비판하며 정혜쌍수를 내세우는 개혁불교를 부르짖었던 것이다.이와 같은 시기에 이웃한 선암사가 과연 어떤 입장을 취하였는지는 관련기록이 없어 알 수 없지만 송광사가 사세를 떨침에 따라 상대적으로 주목받지 못하였을 것으로 추측된다.

성리학을 정치.교육 이념으로 채택한 조선 왕조가 억불정책을 실시하기 시작한 조선 전기는 사찰들이 대단히 어려웠던 시기로 선암사 역시 예외는 아니었을 것이다.그후 선조 30년(1597) 정유재란으로 사찰이 거의 불타버리다시피 한 이후 부분적으로 조금씩 중수되다가 숙종 24년(1698) 호암대사 약휴(1664~1738)에 의해 크게 중건되었는데 당시 선암사는 '교학의 연원'이라 할 만큼 교학이 융성하였다.이후에도 선암사는 크고 작은 화재를 만나 여러 차례 중창 불사되었다.영조 35년(1759)봄 또다시 화재를 당해 계륵대사가 중창 불사를 하였는데 화재 발생이 산강수약(山强水弱)한 선암사의 지세 때문이라하여 화재예방을 위해 영조 37년(1761)에 산 이름을 청량산(淸凉山)으로,절 이름을 해천사(海泉寺)로 바꾸었다.그런데도 순조 23년(1823)에 다시 화재가 일어나자 해봉,눌암,익종 스님이 지휘하여 대대적으로 중창 불사를 하였으며 이후 옛모습을 되찾아 산 이름과 절 이름을 조계산과 선암사로 원위치하였다.현존하는 선암사의 건물 대부분은 이때 지어진 것으로 당시에는 전각 60여 동이 있었다고 한다.그러나 1948년 여순사건과 1950년 한국전쟁의 피해로 많은 전각이 소실되어 지금은 20여 동 만이 남아 있다.
*한국문화유산답사회 지음 '답사여행의 길잡이'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