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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정전(仁政殿).서울 창덕궁 본문

☆~ 바람소리/궁궐(宮闕)

인정전(仁政殿).서울 창덕궁

푸른새벽* 2007. 1. 17. 10:36

 

인정전(仁政殿)


인정문을 들어서면 창덕궁의 정전(政殿),인정전(仁政殿)이 품격을 갖추어 자리잡고 있다.인정전은 17세기 중건된 이후 오랫동안 조선 왕조의 법전(法殿)역할을 해왔다.행각으로 둘러싸인 인정전의 앞마당,즉 전정(殿庭)에는 품계석(品階石)이 배열되어 있으며 남행각 가운데는 인정문이 위치했다.태종 5년에 창건 되었으며,이때는 정면 3칸 규모의 작은 전각이었다.세종 즉위년에 고쳐지었으며,임진왜란 때 소실된 후 광해군 즉위년에 재건되었다.이후,순조 3년(1803)에 선정전 서행각에서 일어난 불로 다시 소실되었다가 그 이듬해 중건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철종 8년(1857)에 개축하였다는 기록이 있다.앞마당의 품계석은 정조 원년(1777)에 설치하였다.일제 강점기에는 앞마당의 박석(薄石)을 모두 걷어내고 잔디를 깔았으나 최근에 다시 잔디를 걷어내고 옛 모습대로 복원하였다


연산군 11년(1505)의 기록에 인정전과 선정전에 청기와를 올렸다고 한 것으로 보아 임진왜란으로 소실되기 전의 인정전은 청기와 지붕을 하였던 것으로 짐작된다


인정전은 정면 5칸 측면 4칸 규모의 중층으로 겹처마에 팔작 지붕을 한 다포계양식의 건물이다.장대석을 쌓아 상하 이중으로 월대를 구성하였으며 상하 월대의 앞쪽 중앙과 좌우 측면에 돌계단을 설치하였다.『宮闕志(궁궐지)』에서는 인정전 상월대의 남북 길이를 45척으로 적고 있다.경복궁 근정전의 상하 월대에는 가장자리를 따라 돌난간을 둘렀으나 인정전 월대에는 없다.다만,상하 월대로 오르는 돌계단에 각각 네마리씩 모두 여덟 마리의 서수(瑞獸)가 앉아 있다.인정문에서 품계석 가운데를 따라 아래 계단까지 어로(御路)가 놓였으며 상하 돌계단의 한 가운데는 구름 사이로 노니는 봉황(鳳凰)두 마리씩을 새긴 판석,즉 답도(踏道)를 배치하여 정전의 격식을 차렸다.답도의 층계석 앞면에는 당초문(唐草紋)을 새겼다


건물은 상월대 위에 장대석 기단을 한 단 더 높이고 세웠다,.초석은 둥글게 다듬었으며 초석의 높이와 같게 고막이돌을 짜돌렸다.초석 위에 높이 16척 가량의 두리기둥을 세웠으며,기둥 사이에는 벽체를 치지 않고 창호를 달았다.정면 가운데 어칸에는 이단 궁창 솟을빗꽃살 무늬 사분합의 문짝을 달아 출입토록 하였으며 나머지 칸에는 모두 머름을 놓고 솟을빗꽃살 창호를 달았다.건물 뒷면 가운데 칸은 사분합이고 나머지는 모두 세 짝 창호이다.창호들 위에는 빗살 무늬 교창(交窓)을 설치해 채광을 도모하였다.위층에도 교창을 달았는데,교창 안쪽으로 다시 마름모꼴 교창을 설치함으로써 이중창으로 마감하였다


기둥 위에 짠 공포는 내사출목 외삼출목으로 조선 중.후기의 기법을 잘 보여준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즉,외부는 삼제공에 모두 끝이 날카롭게 위로 솟은 양서를 만들고,내부는 살미 첨차가 한데 모여 둥글둥글하게 장식된 운궁(雲宮)이 되어 내목도리와 보를 받쳤다.단청은 모루단청이다


중층 전각이지만 인정전의 건물 내부는 한 공간으로 트인 통칸이다.내부 고주 위로 대들보를 걸고 고주 밖으로는 툇보를 걸어 툇간을 만들었으며 대들보의 위치에 우물천장을 드리웠다.천장 가운데는 한 단을 높여 감입(嵌入)하는 형식으로 보개천장을 형성,구름 속에서 여의주를 희롱하는 봉황 두 마리를 황금빛으로 채색하여 새겨 놓았다.경복궁 근정전과 경운궁 중화전이 쌍룡인 것과는 차이가 있다.뒷면 고주 사이에 용상(龍床)을 설치한 어좌(御座)가 마련되었으며,그 뒤에는 삼절병(三折屛)과 일월오악도(日月五岳圖)를 그린 병풍을 둘렀다.어좌 위에는 천장에서 달아낸 닫집(寶蓋)을 두었는데,그 섬세한 가공이 돋보인다


중층 지붕의 각 마루는 양성을 하고 용마루에는 취두,내림마루에는 용두,그리고 추녀마루에는 잡상을 배열하였으며 사래 끝에는 토수를 끼웠다.또한,용마루에는 다섯 개의 이화문장(李花紋章)을 장식했다.이화문장은 대한제국 황실의 상징이었다.즉,순종이 경운궁에서 즉위한 이후 거처를 창덕궁으로 옮기면서 당시 국장(國章)이던 이화문장을 현봉하였던 것이다.인정전은 이때,내부 시설 일부를 서양식으로 개조하였으며 전등도 가설하였다.이 전등들은 황실을 상징하는 노란색 천 등으로 장식했다.내부 바닥도 원래는 전(塼)이 깔려 있었으나 마루로 바뀌었으며,서양식 유리창도 달았으며 역시 노란색 커튼도 드리웠다


칠보문(七寶紋)으로 장식된 액자 가운데 검정 바탕에 흰 글씨로 양각된 인정전의 편액은 죽석(竹石) 서영보(徐榮補)가 쓴 것으로 전해온다.현존 인정전 건물은 순조 4년(1804) 중건 당시의 건축 형태를 비교적 잘 간직하고 있는 것으로 평가되고 있다


건물 뒤에는 화계를 조성하고 그 위로 담장을 둘렀다.또한 건물 동쪽 측면 기단의 북쪽 모서리에 붙여 동쪽 방향으로 7칸 짜리 복도각을 형성하여 선정전 서행각으로 통할 수 있게 하였다.그러나 「東闕圖(동궐도)」에는 이 복도각이 창호를 단 막힌 공간으로 묘사되면서 觀光廳(관광청)으로 표기되어 있다


1863년,흥선대원군의 둘째아들 명복(命福)이 12살의 어린 나이로 인정문에서 즉위식을 가진 후 이곳 인정전의 용상에 올랐으니 곧 고종이다
*이덕수 지음 '新궁궐기행'중에서*

 

창덕궁인정전(昌德宮仁政殿)


국보 제225호
서울 종로구 와룡동 2-71 창덕궁 


인정전은 창덕궁의 중심 건물로 조정의 각종 의식과 외국 사신 접견 장소로 사용하였으며, 신하들이 임금에게 새해 인사를 드릴 때에도 이곳을 이용하였다. 또한 왕세자나 세자빈을 결정하였을 때나 국가의 커다란 경사가 있을 때에도 왕이 인정전으로 나아가 신하들의 축하를 받았다.


태종 5년(1405)에 창덕궁을 세우면서 함께 지었는데, 그 뒤 여러 차례 보수를 거쳤다. 지금 있는 건물은 순조 4년(1804)에 다시 지은 것이다.


규모는 앞면 5칸·옆면 4칸의 2층 건물이며, 지붕은 옆면에서 보았을 때 여덟 팔(八)자 모양을 한 팔작지붕으로 2층의 높은 기단 위에 세웠다. 지붕 처마를 받치기 위해 장식하여 짜은 구조가 기둥 위뿐만 아니라 기둥 사이에도 있는 다포 양식으로, 밖으로 뻗친 부재 끝이 날카롭게 표현되어 조선 후기의 특징을 보여주고 있다. 지붕 꼭대기에는 오얏꽃무늬로 장식하였는데, 이것은 한말 대한제국 황실을 상징하던 무늬이다. 건물 좌우에는 복도(행각)가 있고, 마당에는 신하들의 지위를 표시하는 품계석이 놓여 있다.


내부 천장 가운데는 한 단을 높여 구름 사이로 봉황 두 마리를 채색하여 그려 넣었다. 뒷면의 높은 기둥 사이에 임금이 앉는 의자가 마련되어 있고 그 뒤에는 해와 달, 5개의 봉우리를 그린 일월오악도 병풍이 있다.


인정전은 경복궁의 근정전, 창경궁의 명정전, 덕수궁의 중화전과 함께 조선왕조 궁궐의 정전다운 격식과 장식을 잘 갖추고 있는 건물이다. 
*문화재청자료*

 

 

 

 

 *인정전 앞마당의 차일과 박석고리와 품계석

이곳의 박석은 일제강점기 때 모두 걷어내고 대신 잔디를 깔았었다.최근에 다시 잔디를 걷어내고 박석을 복원했는데,경복궁 근정전이나 종묘 정전의 박석에 비해 자연스럽지 못하다.기계로 가공한 흔적이 역력해서이다

 

 

 

 

 *상하 월대를 오르는 정면 돌계단

경복궁 근정전과는 달리 돌난간을 두르지 않았다.다만,상하 각각 네 마리씩 모두 여덟 마리의 서수를 배치하였다

 

 

 

 

 *인정전 월대로 오르는 돌계단의 한가운데에는 답도(踏道)를 배치하였다.경복궁 근정전이나 창경궁 명정전,경희궁 숭전전의 답도에서처럼 구름 속을 노니는 봉황 두 마리를 새겼다

 

 

 

 

 *인정전 월대로 오르는 돌계단의 서수(瑞獸)

 

 

 

 

 

 *드므

상하 월대의 좌우 양끝에 각각 하나씩 모두 네 개의 드므를 놓았다.그러나,인정전 월대에는 경복궁 근정전이나 경운궁 중화전과는 달리 청동으로 만든 정(鼎)은 놓지 않았다

 

 

 

 

 *인정전의 창호

두리기둥 사이에 머름을 놓고 솟을빗꽃살 창호를 달았다.그 위로는 빗살 무늬 교창을 달아 채광을 도모하였다.경복궁 근정전 및 창경궁 명정전과는 달리 인정전과 경운궁 중화전의 창호는 황색인데 이는 대한제국시대 황실의 상징과 관련이 있다사진은 좌우협칸의 창호이다.기둥에 박은 고리는 차일 등을 칠때 사용하는 것이며,그 아래 갈고랑쇠는 창호를 열었을 때 걸어서 고정시키는 용도이다 (안내인의 재촉으로 사진을 급하게 찍었더니...엉망)

 

 

 

 

 *인정전 아래위층의 처마와 편액

흙과 매운 손끝으로 빚어낸 섬세한 조화가 예술의 경지에 이르렀다

 

 

 

 

 *인정전 아래층의 귀공포와 추녀와 사래

다포 양식의 공포는 조선 중.후기의 기법을 잘 보여준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인정전 지붕 용마루의 양성 부분에는 다섯개의 이화문장을 장식했다.대한제국 황실의 상징이었던 이화문장은 경운궁에서 즉위한 순종이 그 거처를 이곳 창덕궁으로 옮기면서 현봉한 것이다.이 이화문장은 인정문에도 세 개가 장식되었으며,희정당 남행각 돌출 현관의 창방 아래 낙양에도 장식되어 있다

 

 

 

 

 *인정전의 어좌

용상 뒤로 삼절병과 일월오악병(日月五岳屛)을 두르고,어좌 위 천장에는 섬세하게 가공한 보개를 덧달았다.1863년, 12살 소년 명복이 이 용상에 오르며 즉위하였으니 이곳에서의 마지막 등극이었다

 

 

 

 

 *인정전 내부 가구

인정전은 중층 전각이지만 건물 내부에서는 경복궁의 근정전과 마찬가지로 한 공간으로 높이 트인 통칸 구조이다.고주 위로 대들보를 걸고 고주 밖으로는 툇보를 걸어 툇간을 형성하였다.황실을 상징하는 노란색 천으로 장식한 전등과 화려하게 치장한 낙양 등이 눈길을 끈다.우물천장으로 마감한 천장 한가운데는 보개 천장을 구성하여 구름 사이에서 여의주를 희롱하는 봉황 두 마리를 새겼다 (앞에 막아 놓은 시설물 때문에 천장은 아무리 노력해도 사진을 찍을 수가 없었으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