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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조전(大造殿).서울 창덕궁 본문

☆~ 바람소리/궁궐(宮闕)

대조전(大造殿).서울 창덕궁

푸른새벽* 2007. 1. 19. 00:20

 

대조전(大造殿)


대조전(大造殿)은 창덕궁 내전의 으뜸 전각으로 곧 중궁전(中宮殿).창경궁의 통명전(通明殿)과 같은 격이다
『宮闕志(궁궐지)』에서는 대조전을 '大內坤殿正堂(대내곤전정당)'이라 하여 내전의 정당임을 설명하였다
왕업을 계승할 큰그릇으로 왕자가 탄생해야 국리민복(國利民福)을 이룩할 수 있다는 기원으로
왕비의 침전인 이곳을 대조전이라 이름 붙였다
'大造'란 '크게 만든다' 또는 '위대한 창조'를 의미한다
이는 곧 성군(聖君)의 자질을 가진 왕자가 태어나기를 기원하는 이름인 것이다
역대로 대조전에서는 성종과 인조와 효종,철종,순종,그리고 헌종의 왕비 효현왕후 김씨가 승하하였고
순조의 세자로 후에 왕으로 추존된 익종이 태어났다
그리고,남행각의 양심각(養心閣)에서는 현종과 순조비 순원왕후 조씨가 승하하였으며
서행각의 관리각(觀理閣)에서는 영조비 정성왕후(貞聖王后)서씨가 승하하였다


대조전은 창덕궁 창건(1405)당초에 건립된 것으로 추정되며,연산군 2년(1496)에 중수하였다는 기록이 있다


임진왜란으로 소실되었다가 광해군 때 중건된 것으로 추정되며,인조 반정 때 다시 소실되어 인조 25년에 복구되었다
이때는 인경궁(仁慶宮)의 경수전(慶壽殿)을 철거하여 그 재목으로 지었다
순조 33년(1833)에는 이곳 서온돌과 맞붙은 나인 갱의실(內人更衣室)에서 발화하여
대조전 일곽은 물론 내전 전체를 불태우는 큰불로 번졌다
그 복구는 1920년에 마무리되었는데,대조전은 경복궁의 교태전을 헐어다가 새로 지었다


대조전은 선정전 동북쪽 방향,
희정당의 북쪽에 위치해 있으며 정면 남행각에 선평문(宣平門)을 정문으로 내고
건물 동쪽으로 흥복헌(興福軒)을 서쪽으로 융경헌(隆慶軒)을 익각(翼閣)으로 거느리고 있다
특히,흥복헌은 1910년 8월 22일 국권을 일제에 이양하는 조선 왕조 마지막 어전회의가 열렸던 곳이다
대조전 둘레에는 행각 또는 복도각 등으로 연결되어 양심각(養心閣).청향각(淸香閣).함원전(含元殿).
경훈각(景薰閣).수라간 등이 자리를 잡고 있다
이들 대조전 일곽의 동서 양쪽과 뒤쪽으로는 화계를 구성하였다


대조전은 인조 25년에 중건할 때는 45칸의 규모였으나,순조 34년에 36칸으로 중건한 이후 현재까지 그 규모를 유지하고 있다
현존 건물은 순조 34년에 간행한 『昌德宮營建都監儀軌(창덕궁영건도감의궤)』에 나타난 도면이나 그림과는 매우 다르다
저면 9칸 측면 4칸의 규모로 남향한 대조전은 이익공 양식의 단층 팔작 지붕 건물이다
장대석 다섯벌대로 기단을 쌓고 그 위에 네모뿔대로 다듬은 초석을 놓아 바깥에는 네모 기둥을 안에는 두리기둥을 세웠다
건물 정면 가운데 3칸은 툇간을 형성하여 개방하였으며,그 폭만큼 월대를 쌓아 기단 앞에 설치하였다
월대는 장대석 4벌대로 쌓아 기단 보다 한 단 낮추었으며,윗면 네 귀퉁이에 드므를 배치하였다
월대 위 안쪽에는 개방된 3칸 폭보다 더 길게 돌계단 3급을 설치해 곧바로 퇴로 오를 수 있게 하였다
월대로 오르는 돌계단은 정면과 양 측면에 각각 하나씩 두었다
정면의 돌계단에는 서수(瑞獸)를 조각하여 소맷돌로 붙였으며 선평문에서 계단 앞까지 어로가 연결되었다
대층,즉 거실 앞면 3칸에는 사분합 띠살 창호를 달고 그 위에 빗살 교창을 달았다
건물 앞면 좌우 각각 3칸에는 모두 머름 위에 완자살 창호를 네 짝씩 달고 그 위에 교창을 달았으며
창호 앞으로는 좁은 퇴를 놓고 평난간을 둘렀다


정면 9칸 측면 4칸 중 가운데 정면 3칸 측면 2칸의 대청을 거실로 사용했으며
거실의 동쪽과 서쪽으로 각각 정면 2칸 측면 2칸을 통칸하여 임금과 왕비의 침실로 사용하였다
이들 거실과 침실의 앞면에는 반 칸 폭으로 툇간을 형성하였으며,가운데 3칸은 개방하였다
거실 바닥에는 쪽널마루를 깔았으며 침실 및 작은 방들에는 온돌을 놓았다


대조전 지붕은 경복궁의 강녕전.교태전 및 창경궁의 통명전과 마찬가지로 용마루를 두지 않았으며
내림마루와 추녀마루는 양성을 하여 용두와 잡상을 배열하였다
대조전은 특히,대한제국 시절 황실의 생활 모습이 투영되어 있다는 점에서 소중하다
1926년 4월 25일,조선 왕조 마지막 임금 순종이 "나는 죄인이다...광복하라" 는 유언을 남긴 채 이곳에서 승하하였다


대조전의 지붕에는 용마루가 없다
궁궐 안 수많은 전각들이 양성은 하지 않더라도 용마루는 올렸는데 창덕궁에서는 유독 대조전에만 용마루가 보이지 않는다
대조전은 왕비의 침전,즉 중궁전(中宮殿)이다
경복궁의 중궁전인 교태전과 창경궁의 중궁전 통명전에도 역시 용마루를 올리지 않았다
경복궁에서는 왕의 침전인 강녕전에도 용마루가 없다
반면,창덕궁의 왕의 침전 희정당이나 고종 황제의 침전으로 사용되었던 경운궁의 함녕전에는 용마루를 올렸으며
대비의 침전이던 경복궁 자경전에도 용마루를 올렸다
그렇다면 궁궐 침전 건물에는 용마루를 얹지 않는다는 전제는 성립하지 않는다
다만,궁궐의 침전 중에서도 창덕궁의 대조전,경복궁의 교태전,창경궁의 통명전 등 왕비의 침전
즉,중궁전만은 어김없이 용마루가 없다
무슨 의미가 숨어 있을까?


그 이유를 시원하게 밝혀줄 명쾌한 정설(定說)은 없다
다만,중궁전이 왕비의 거처이기도 하지만,임금 부부가 합궁(合宮)을 하는 즉,사랑을 나누는 침실이기도 하다는 데서 하나의 추측이 가능하다
임금 부부의 동침은 예사롭지가 않다
합방도 길일(吉日)을 정해 이뤄진다
종묘 사직을 이어갈 왕자를 생산하는 행위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다음 보위에 등글(登極)할 왕자를 생산하기 위해서는 하늘과 땅의 기운이 서로 통하고 음(陰)과 양(陽)의 정기가 잘 조화되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하늘과 땅의 교합(交合)을 막는 장애물이 없어야 한다
용마루는 지붕의 가장 높은 곳에서 하늘과 땅의 경계를 짓는다
경우에 따라서는 하늘과 땅의 교류를 막는 장애물로 볼 수도 있는 것이다
그래서,왕비의 침전에는 용마루를 올리지 않았다
*이덕수 지음 '新궁궐기행'중에서*

 

창덕궁대조전(昌德宮大造殿)


보물 제816호 
서울 종로구 와룡동 2-71 창덕궁 


대조전은 왕비가 거처하는 내전 중 가장 으뜸가는 건물이다. 이 건물에서 조선 제9대 왕인 성종을 비롯하여 인조·효종이 죽었고, 순조의 세자로 뒤에 왕으로 추존된 익종이 태어나기도 하였다.


조선 태종 5년(1405)에 지었는데 임진왜란 때를 비롯하여 그 뒤로도 여러 차례 불이 나서 다시 지었다. 1917년 또 화재를 당하여 불에 탄 것을 1920년에 경복궁의 교태전을 헐고 그 부재로 이곳에 옮겨지어 ‘대조전’이란 현판을 걸고 오늘에 이르고 있다. 수차례에 걸쳐 다시 지었기 때문에, 건물 자체는 물론 주변의 부속 건물들도 많은 변화를 거쳤다.


대조전은 현재 36칸으로 앞면 9칸·옆면 4칸이며, 지붕은 옆면에서 볼 때 여덟 팔(八)자 모양을 한 팔작지붕이다. 건물 가운데 3칸은 거실로 삼았으며, 거실의 동·서쪽으로 왕과 왕비의 침실을 두었다. 각 침실의 옆면과 뒷면에는 작은 방을 두어 시중 드는 사람들의 처소로 삼았다. 건물 안쪽에는 서양식 쪽마루와 유리창, 가구 등을 구비하여 현대적인 실내 장식을 보이고 있다. 
*문화재청자료*

 

 *대조전 편액

'대조'는 크게 만든다 혹은 위대한 창조라는 의미로,

왕업을 계승할 큰그릇으로 왕자가 탄생하기를 바라는 기원이 담겨 있다

이곳 대조전에서는 순조의 맏아들 효명세가가 태어났으며

성종과 인조,효종,철종,순종이 승하하였다

 

 *대조전 거실

바닥에는 쪽널마루를 깔고 중국풍의 의자와 거울을 놓았다

사진 뒤쪽 분합문으로 구획된 방은 왕후의 침실인 서온돌이다

 

 *대조전의 동익각 홍복헌

대조전은 경복궁 교태전의 원길헌.함홍각.건순각 등과 마친가지로 홍복헌.융경헌.함원전.청향각 등의

익각을 거느리고 있다

1910년 8월 22일,

이곳 홍복헌에서는 한일합병을 결의하는 조선 왕조 마지막 어전회의가 열렸다

 

 *대조전 일곽의 처마 빗물받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