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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정당(熙政堂).서울 창덕궁 본문

☆~ 바람소리/궁궐(宮闕)

희정당(熙政堂).서울 창덕궁

푸른새벽* 2007. 1. 18. 00:23

 

희정당(熙政堂)


원래는 임금의 침전이었으나,후기 들어 순조 때부터는 정사를 살피는 편전으로 사용되었다
『宮闕志(궁궐지)』에는 희정당(熙政堂)을 '便殿視事之所也(편전시사지소야)'하고 설명하고 있다
'희정'이라는 이름의 의미는 정사를 밝혀 백성을 구제한다는 뜻이다
이 건물을 처음 지은 시기는 명확하지 않지만,연산군 2년(1496)에 대조전 전랑(前廊)에 있던 수문당(修文堂)이 불에 탔다가 복구되면서
희정당이라 개칭하였다는 기록이 있다
수문당은 성종이 재위 기간 동안 거처를 했던 곳으로 알려져 있다


희정당 역시 임진왜란 및 인조 반정 때 불에 탔다가 광해군 즉위 초 및 인조 25년에 각각 중건되었다
인조 25년의 중건시에는 인경궁(仁慶宮)의 전각을 헐어서 그 재목을 자재로 활용하였다
순조 33년에 다시 소실되었다가 이듬해(1834년)에 복구되었으며,1917년에도 대조전에서 일어난 불로 소실되었다
1920년에 다시 지어 현재에 이르고 있는데, 이때는 경복궁의 강녕전(康寧殿)을 헐어서 그 재목들을 자재로 활용하였다
이러한 과정에서 평면이나 건축 형태가 크게 왜곡되면서 원래의 모습과는 매우 다른 전각이 들어섰다
즉,인조 때 중건한 희정당은 전체 건물 규모가 15칸 이었으며, 가운데 마루 9칸을 놓고 그 좌우로 온돌방 3칸 씩을 두었다
순조 34년에 중건한 희정당도 전체 15칸 규모였다
「東闕圖形(동궐도형)」에 따르면,정면 5칸 측면 3칸의 15칸 중 앞면5칸에 마루를 깔았고

뒷면 3칸을 퇴로 구성하였으며.나머지는 모두 방을 들였다
희정당의 이러한 건물 규모 및 구조가 1920년의 중건을 거치면서 현재와 같이 크게 바뀐 것이다
또한,원래는 건물 앞쪽에 작은 연못이 네모나게 조성되어 있었다
남행각에 자동차 진입을 위한 돌출 현관 등도 1920년에 중건하면서 설치되었다
돌출 현관의 창방 아래 낙양에는 이화문양(李花紋樣)을 새겼다


희정당은 선정전의 동쪽 방향에 입지하였는데,외전인 인정전.선정전과는 그 축을 약간 달리하고 있다
즉,인정전과 선정전이 동쪽으로 약간 치우친 남향 축인데 비해 희정당은 대조전과 함께 서쪽으로 약간 치우친 남향 축으로 앉혔다
이는 창덕궁의 전각 배치가 지형에 순응하고 있다는 한 예이기도 하다
희정당의 북쪽에는 복도각으로 이어져 대조전이 자리를 잡았다


현재의 희정당 건물은 정면 11칸 측면 5칸 규모로 단층 이익공 양식의 팔작 지붕을 하고 있다
장대석 다섯벌대로 기단을 높이 쌓고 네모뿔대로 다듬은 초석을 놓아 네모기둥을 세웠다
건물 앞뒤로 가운데 칸에 맞추어 넓은 돌계단 하나씩을 설치했다
앞면 가운데 3칸과 뒷면 가운데 한 칸에는 머름을 들이지 않고 여섯 짝씩 궁창 창호를 달아
출입이 가능토록 하였으며,그 위로는 교창을 달았다
나머지 칸에는 머름 위에 네 짝씩의 창호를 달았다
다만,뒷면 서쪽 첫째 칸에는 머름 위에 여섯 짝 창호를 달았다
바깥 기둥 위에 창방을 돌리고 일반적인 형태의 이익공을 결구 하였으며,안쪽 천장은 우물천장으로 마감하였다


건물 내부는 정면 9칸 측면 3칸을 거실로 사용하고 그 주위는 툇간을 구성하여 통로로 활용하였다
이 중 정면 3칸은 회의실로 꾸몄다
그리고 동쪽 3칸은 여러 개의 방 또는 창고로 나누었다
거실 주위를 둘러싼 반 칸 폭 툇간 중 앞면의 동서 툇간은 ㄷ자 형태의 행각과 이어지고 뒷면의 동서 툇간은 대조전 남행각으로 연결되었다
응접실의 동서 양쪽 벽에는 대들보 아래로 각각 「叢石絶景圖(총석절경도)」와
「金剛山萬物勝景圖(금강산만물초승경도)」가 걸려 있는데,
이들은 모두 해강(海岡)김규진(金圭鎭)의 작품으로 알려지고 있다


건물의 처마는 부연을 단 겹처마이며,지붕의 각 마루는 양성을 하고 취두.용두.잡상을 배열하였다
이 건물이 경복궁 강녕전 일 때는 용마루가 없었으나,이곳 희정당으로 이건되면서 용마루가 형성되었다
합각면에는 무시무종(無始無終)의 길상(吉祥)문양을 장식하고
그 가운데 동쪽 면에는 '康(강)'자를,서쪽 면에는 '寧(녕)'자를 장식하였다
이는 이 건물이 경복궁 강녕전이었음을 알려 준다


희정당 건물은 전체적으로 1920년에 중건 되면서 전통 양식을 위주로 하되
건물 내부의 응접실과 회의실 바닥의 마루,유리 창문,문위의 휘장,벽체 등에 서양식 건축이 가미되었다
커튼 박스 및 전등,카펫 따위가 대표적이다
희정당은 건물 앞뒤와 서쪽 측면으로 회랑,즉 복도각이 선정전.대조전과 연결되지만 어딘지 모르게 답답하고 폐쇄적인 분위기를 풍긴다


고종이 즉위하여 재위 5년에 경복궁으로 이어하기 전까지 이곳에서 거처했으며 조대비가 수렴청정을 한 곳도 이곳 희정당이었다
*이덕수 지음 '新궁궐기행'중에서*

 

창덕궁희정당(昌德宮熙政堂)


보물 제815호 
서울 종로구 와룡동 2-71 창덕궁 


희정당은 본래 침전으로 사용하다가, 조선 후기부터 임금님의 집무실로 사용하였다. 건물을 지은 시기는 확실하지 않으나, 조선 연산군 2년(1496)에 수문당이라는 건물이 소실되어 이를 다시 지으면서 이름을 희정당이라 부르게 되었다. 그 후 몇 차례의 화재로 다시 지었는데 지금 있는 건물은 일제시대인 1917년에 불에 탄 것을 경복궁의 침전인 강녕전을 헐어다 1920년에 지은 것이다.


규모는 앞면 11칸·옆면 4칸으로 한식건물에 서양식 실내장식을 하고있다. 지붕은 옆면에서 볼 때 여덟 팔(八)자 모양을 한 팔작지붕으로 꾸몄다. 앞면 9칸·옆면 3칸을 거실로 하고 주위는 복도로 사용하였다. 앞면 9칸 중 3칸은 응접실이며 서쪽은 회의실로 꾸미고, 동쪽은 여러 개의 방으로 나누었다.


응접실에는 김규진의 금강산도, 해금강도 등의 벽화가 걸려있다. 건물 앞쪽에는 전통 건물에서 볼 수 없는 현관이 생겼고 자동차가 들어설 수 있게 설비되었다. 이는 마차나 자동차가 사용되기 시작하면서 채택된 서양식 구조라 할 수 있다.


조선 후기와 대한제국시대에 왕의 사무실과 외국 사신 등을 접대하는 곳으로 사용하면서 한식과 서양식이 어우러진 건물로, 시대의 변천사를 엿볼 수 있는 건축이라 할 수 있다. 
*문화재청자료*

 

 *희정당의 서쪽 측면

희정당은 앞뒷면 모두 복도각이 이어져 있다

뒷면 동서 양쪽에 낸 복도각은 대조전 남행각으로 통한다

 

 *희정당 남행각

1920년에 희정당을 중건하면서 자동차의 진입이 용이하도록 돌출 현관을 설치하였다

 

 *남행각의 돌출 현관

 

 *희정당 서쪽 측면의 굴뚝과 샛문과 지붕이 합각면

팔작 지붕의 각 마루는 양성을 하고 취두와 용두,잡상을 장식하였다

동쪽 합각면에는 康자를,서쪽 합각면에는 寧자를 새겼는데,

이는 이 건물이 경복궁 강녕전을 옮겨지었음을 알려준다